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수행과 깨달음이란 두 주제어로 본 한국 불교의 현재 모습과 미래를 위한 전망
조성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졸업(석사: 인도철학). 미국 UC 버클리 대학원 졸업(박사: 불교학). 전 스토니 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현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 및 본지 편집주간. 논문으로 〈현대불교학의 합리주의적 경향: 재평가(Rationalist Tendency of Modern Buddhist Scholarship: A Revaluation)〉, 〈무아: 불교의 정의관을 향하여(Selflessness: Toward a Buddhist Vision of Justice)〉 등 다수가 있다.
1.들어가는 말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종지로 삼고 있는 선불교가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최상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님은 이미 많은 지식인 불자들에게 상식이 된 지 오래다.
더구나 최근에는 화두 참구를 최고의 수행으로 하는 한국의 간화선 전통에 문제를 제기하고 남방 선을 비롯한 제 3수행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 불교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현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 불교가 현대 사회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불교 붐은 21세기가 불교의 르네상스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게도 한다. 이러한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깨달음과 수행을 둘러싸고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 또한 전 세계적인 불교 르네상스의 예감이 실현되는 과정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낙관적인 전망도 든다.
본고에서는 수행과 깨달음이란 두 주제어를 가지고 한국 불교의 현재 모습을 진단하고 한국 불교의 미래를 위한 제언과 전망을 하고자 한다. 보다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 논의의 대전제로서 필자의 입장과 결론을 먼저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둘째,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
이 두 가지 전제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이다. 불교는 도그마의 종교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해왔다. 초기불교·대승불교·선불교·밀교 등 다양한 불교 전통은 단순한 시대적 구분이나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부단히 적응해온 사상사적 구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수행과 깨달음의 문제에 관해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교적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한다고 해서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불교를 ‘창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신흥 종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사의 다양한 전통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교’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교리 하나하나를 놓고 ‘이것은 유지하고 저것은 폐기하고’ 하는 따위의 일은 애초 불가능하거니와 옳은 방법도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한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불교적 이해의 변화를 제안하는 전략은 이른바 ‘불변수연(不變隨緣)’이다. 요컨대 불변하는 불교적 정신이 시간과 공간의 변화라는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롭게 구현되어 온 것이 바로 불교라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변화의 구체적 프로그램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변하는 불교적 정신인가? 전통적으로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불변이라고 하고 그 깨달음이 구체적 ‘현장’에서 구현되는 것을 수연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할 때 그러한 이해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고의 논지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한 불변하는 불교적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이다. 요컨대 깨달음의 불교가 아니라 행복의 불교이며, 깨달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행복을 위한 불교이다.
율장의 《마하박가(Maha�agga)》에는 붓다가 60명의 제자에게 최초로 전법을 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른바 불교의 시작이다. 붓다는 “……가라. 가서 많은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법을 설하라. ……”고 하였다. 제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한 예수와는 구별이 되는 대목이다. 예수에게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알림의 구체적 내용이 중요했다. 붓다는 ‘무엇’이라고 하는 설법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설법인가가 중요하였다. 붓다에게 무엇을 설하느냐의 문제는 일차적 중요성이 아니었다. 무엇을 설하느냐의 문제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왜 설하느냐의 문제로서 그 각각의 현장에 따라 결정될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설법의 현장에 맞게 무엇이든 설하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본고에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불교를 제안하고자 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그 종교적 유용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목표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대승의 보살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대전제에서 출발하여 현대 한국 불교의 모습을 진단하고 미래에의 전망을 위한 각론을 논의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수행과 깨달음을 논의하는 현장은 다름 아닌 현대 한국 사회이다. 전통과 구별되는 현대의 특징과 함께 한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불교적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구체적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볼 때 전통 사회와 구별되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화와 그에 따른 삶의 분절화이다. 전통 사회에서 종교는 삶의 총체적 규범이었고 가치체계였다. 관혼상제 등 삶의 전 과정에서, 또한 정치·경제·문화와 양육을 포함한 교육 등 사회의 전 부문, 그리고 사·농·공·상 등의 전 직업에 걸쳐, 종교는 가치판단의 기준과 실천의 준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이르러 사회 각 부문의 분업화와 직업의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종교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어 삶의 한 특정 영역으로서만 그 역할이 축소되게 되었다. 그 결과 종교가 일상적 삶을 위한 구체적 지침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본다. 전문직 종사자의 경우 종교가 자신의 직업윤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때로 사회 변혁과 개혁을 외치는 사회 운동가들의 사회적 실천윤리에 자신들의 종교가 별로 뚜렷한 행동 지침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 마디로 직업 따로 종교 따로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또 다른 한 가지 특징은 다원성이다. 특히 종교 현상에 있어 다원성은 가장 두드러진다. 다시 말해 전통 사회는 어떤 주류적 종교가 한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주도하는 사회였던 데 반해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교리와 세계관을 가진 여러 종교가 공존하게 되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같은 목적의 사회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초교파적으로 사회의 공동선의 실현을 위하여 함께 협력해야 할 일도 많다. ‘초교파적인 사회적 공동선’이란 말은 곧 종교의 교리를 ‘특수’로 사회적 공동선을 ‘보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조차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종교가 보편으로 인식되던 전통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가 ‘삶의 보편이 아닌 특수’로 인식되고 한 종교의 교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주의적 진리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이상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불교적 수행’을 논의하는 지금 우리 현실의 부정적 단면들이다. 현재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나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출발점은 지금 여기일 수밖에 없다.
한편 불교에 관련해볼 때 현대 한국 사회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교육받은 재가자’의 등장이다. 해방 후 한국 불교계에서 불교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던 사람들이 대처-비구의 갈등 속에서 제 기능을 못하고 사라진 이래 한때 한국 불교는 ‘치마 불교’ ‘보살 불교’라는 용어로 스스로를 비하했을 만큼 당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 신도들이 재가 신자들의 대부분이었다.(이 점은 그 당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상황과 크게 대조된다.)
이 ‘보살’들은 신심에 있어서는 대단했을지 몰라도 현대 사회에서 불교를 새롭게 이해하고 다양화하는 데 까지는 그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의 출가자들의 경우도 교육 수준이 그리 높지 못했던 터라 한국 불교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세속 사회의 발전과는 거리를 두고 전통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교육 받은 재가자들의 참여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해 지금에는 이들의 활동이 불교계뿐 아니라 NGO와 같은 일반 사회단체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 교육 받은 재가자들은 한편으로 각자의 전문영역에서의 지식을 불교 신행에 접목시키려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불교를 자신들의 전문지식에 접목시키려고 모색하고 있다. 이러는 가운데 이들은 전통적인 불교 이해에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하고 불교의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모색하기도 한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본고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이 아닌 행복을 위한 불교’는 이러한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론과 실제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나 자신의 고백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교육 받은 재가자의 출현은 현재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에 큰 도전이자 기회이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엘리트는 출가자들이었고, 또 그들은 사회적 엘리트이기도 했다. 불교 교리의 학습과 교수, 경전의 번역과 주석 등의 해석 작업은 전적으로 출가자들의 몫이었다. 그러한 만큼 출가자들은 종교적 엘리트이자 사회적 엘리트였지만 근대 교육의 시작과 함께 재가자들의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출가자의 교육 수준보다 높은 경우가 많게 되고, 불교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불교학자의 등장으로 전통적으로 출가자들의 몫이었던 교리 연구나 역경 작업이 이제 많은 경우 재가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불교 연구에 관한 한 이제 출가자들의 독점적 영역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재가 지도자들에 의한 다양한 불교 수행단체들을 보더라도 수행이 더 이상 출가자들의 독점적 영역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 불교의 미래를 조망함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교육 받은 불교 지식인의 등장이다. 이들 불교 지식인의 사회 참여 욕구와 불교 대중화의 욕구는 전통적 개념의 재가자들의 신행 활동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상이 새로운 불교 수행과 깨달음을 논의하는 우리의 ‘현장’이다. 이후 다음 장에서는 궁극적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종교 환경에 맞는 ‘행복을 위한 불교 수행’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수행의 목적을 최종적인 깨달음에 두는 것은 붓다 당시부터 아비다르마의 교학 전통, 그리고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통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승인해온 전통이며 어떤 경전 전통이나 교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염두에 둔다면 수행의 목적을 최종적 깨달음에 두고 있는 전통은 이제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그 이유와 정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깨달음을 수행의 최종 목적으로 하는 것은 ‘출가 중심 불교’의 역사적 산물로서 재가자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중요해지는 현대 사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수행과 관련한 불교 교리의 구조적 문제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 지상주의는 때로 계율과 세간적 윤리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선불교의 수증론(修證論)에서 계율은 항상 도구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뗏목의 비유에서처럼 계율은 초세속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세속적 차원의 도구일 뿐이며, 강을 건너고 나면 더 이상 필요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버려야 할 짐이 된다. 계(戒)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상계(無相戒)를 최상위 개념의 계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원효나 경허 등이 보여주는 파계 행위가 비윤리적 행위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탈신화’로 특징지워지고 이성의 합리적 사용과 함께 종교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초세속적이며, 윤리 초월적 행태가 용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가장 현실적 이유로서 목표는 실현 가능할 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수행의 목적이라 하지만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그 목표에 도달하고 있는가? 종교는 세속적 차원의 양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목표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비종교적이지 않을까? 일부 특출한 수행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재가자를 비롯한 모든 수행자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
대부분이 도달하지 못하는 목표는 꿈 아니면 신화에 불과하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처럼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은 박제가 되어 버린 깨달음이 아닐까? ‘박제’는 불임과 무생산의 상징이다. 박제된 독수리는 구경시켜 주고 관람료를 벌어들이는 수단은 되겠지만 스스로 비상할 수도 새끼를 낳을 수도 없다.
깨달음에 관한 한 한국 불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현대 한국 불교에서 불교인들에게 흔히 보이는 냉소주의는 바로 ‘박제된 깨달음’ 혹은 ‘신화화 된 깨달음’에 대한 솔직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이후 한국 불교계에서 몇몇 깨달은 선지식이 나왔다고 하지만 한국 불교 전체의 역량이 되기에는 우선 그 수가 너무 적을 뿐 아니라, 그 중 어떤 선지식의 경우는 그 행태가 기이하여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마저 들게 하고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로 한국 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며 그 각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깨달음과 출가 중심 불교
깨달음 지상주의는 출가 중심 불교의 역사적 산물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도 맞지 않는 ‘궁극적 깨달음’이란 수행의 목표는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수행의 목표로 삼았던 출가 중심 불교의 역사적 연원과 발전을 살펴보자.
붓다 당시 인도 사회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정착되어 가던 시기였고 불교의 사원제도는 그 과정의 정착을 의미한다. 붓다의 탄생에 관해 전해지고 있는 한 설화는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막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의 관상을 살핀 아시타 선인은 태자가 출가를 하지 않고 세속 사회에 머무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줄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세상 사람을 제도할 붓다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시타 선인은 태자가 커서 출가할 것임을 확신하고 태자가 성도할 때까지 생존하지 못할 자신의 나이를 한탄한다.
이 전설적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붓다의 위대함과 불교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것일 것이다. 출가하지 않았다면 전 인도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전설 속의 성군(聖君)이 될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붓다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불교는 위대한 종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설적 이야기는 전륜성왕이 되면 붓다가 될 수 없고, 붓다가 되면 전륜성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륜성왕의 길과 붓다의 길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두 다른 삶의 방식인 것이다. 삶의 방식과 목표에 관해 출가와 세속적 삶을 구분하던 당시 인도 사회의 관념이 이야기 구조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불교가 원천적으로 출가자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유가 바로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던 당시 인도 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붓다가 상인들을 비롯한 많은 재가자들을 만나고 가르침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불교 경전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는 불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출가자 중심의 교리이며 이 출가자들의 최종 목표는 붓다와 마찬가지로 생사윤회를 끝내는 최종적 깨달음에 있었다. 출가자들이란 세속적 생활을 떠나 있고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한 노동의 필요성이 없다는 점에서 고도의 명상 수행의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들 전문가 집단은 집단 고유의 목표 의식이 있게 마련이었고 초기 불교 당시 그 집단적 목표는 ‘더 이상 삶이 연속되지 않는’ 다시 말해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획득이었다. 초기 불교에서 불교적 깨달음의 경험이 멸(滅)을 의미하는 열반으로 개념화되는 데에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엘리트들인 출가자들의 이러한 독특한 종교적 가치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카고 대학의 불교학 교수 스티브 콜린스(Steve Collins)는 그의 저서 《열반과 또 다른 불교의 행복들(Nirvana and Other Buddhist Felicitie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의 서문에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가 1979년 당시 자신의 박사 종합시험 때 받았던 질문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 당시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클리포드 그리츠(Clifford Geertz) 교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인도 초기의) 불교인들은 삶에서 벗어나려고 했을까, 아니면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했을까?”
스티브 콜린스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당시 그는 “불교의 전통적인 교리에 입각하여” 불교인들의 목표는 윤회라고 하는 ‘삶과 죽음의 계속적인 반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원론적 수준에서 대답했지만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스티브 콜린스 교수의 답변은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리츠(Geertz) 교수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초기 경전은 일관된 답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초기 경전 가운데서도 깨달음의 경험을 생사의 멸을 뜻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때로는 불사(不死) 등의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나중에 등장한 대승경전에서는 좀더 과감하게 깨달음의 경험을 반야라든지 법신이라든지 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깨달음의 경험은 하나이겠지만 그 경험을 설명하는 개념에는 한 집단의 독특한 종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이 불교 경전은 그 전체를 볼 때 각 시대의 독특한 종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는 역사적 산물의 집적체이다.
본고의 논의와 관련하여 불교 경전의 이러한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 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을 기초로 편찬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적이었다. 경전의 편찬자는 출가자들이었고 내용 또한 출가자들에 의해 취사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경전은 붓다 가르침의 전부가 아니라 ‘선택된’ ‘일부’이며 그 선택과정에는 한 특정 집단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된 일부의 내용을 꿰뚫고 본래의 붓다의 가르침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바로 불설(佛說, Buddhavacana)을 둘러싼 해석학적 논쟁들이다. 대승 전통의 카말라실라가 아쇼카 왕 석주 중의 하나에 기록되어 있는 “불설선설(佛說善說 :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좋은 가르침이다)”라는 말을 뒤집어 “선설불설(善說佛說 : 좋은 가르침은 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이라 한 것이 좋은 예이다. 대승불교인들이 새로운 경전을 편찬할 수 있었던 종교적 정당성은 바로 이러한 불교 특유의 경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교 경전의 이러한 역사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불교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출가 중심 불교와 그 불교가 독특하게 강조하고 있는 최종적 깨달음의 강조 또한 한 시기의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최종적 깨달음만을 목표로 한 출가 중심의 불교는 현대사회에 더 이상의 유용성이 없다고 본다.
현대 사회에서 재가자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그 한 이유이며, 또 출가자 집단에서조차 깨달음은 더욱더 희귀한 뉴스가 되고 있는 지금 출가자 중심의 ‘최종적 깨달음’을 위한 불교는 이미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 경전을 근거로 깨달음을 위한 불교를 옹호하는 것은 출가자 우위의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깨달음이 멀고 불가능하면 할수록 출가 우위의 종교 권력은 더욱더 공고해진다는 것은 불교사뿐 아니라 종교 일반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2) 깨달음 지상주의의 반계율적· 반사회적 성격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수행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계(戒)·정(定)·혜(慧)의 ‘세 가지 공부(三學)’라고 한다. 이 세 가지 공부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서 불교 수행체계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계(戒)라고 하는 것은 도덕 습관, 또는 도덕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며, 정(定)이란 선정(禪定)의 경험을 말하는 명상 수행이며, 혜(慧)란 선정에서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 통찰력(解脫智, liberating insight)을 의미한다. 이때 계(戒)란 불교적 도덕과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윤리 신학(moral theology) 등에서와 같이 엄격한 일반 원칙으로부터 추론된 윤리 덕목이나 실천 체계라고 하기보다 해탈의 통찰력을 얻기 위한 목적론적, 예비 수행적 성격을 또한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계율은 인간의 도덕적 자아실현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 원칙으로서 제시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계율은 열반 혹은 해탈이라는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실현하는 예비적 수행 혹은 뗏목과 같은 도구적 성격에 불과하다. 계율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양면성은 원칙적으로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전통에서 계율의 양면성은 재가와 출가를 도덕적 행위와 그 목적에 따라 구분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재가자의 목표는 도덕적 행위의 수련과 그 결과로 인한 세속적 인격의 완성 그리고 적절한 범위 내에서의 종교적 보상(이를테면 선업을 많이 쌓으면 내생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하는 등등의)을 보장받는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윤회는 도덕적 행위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 어떠한 선(善)한 행위도 그 자체 목적일 수 없고 존재의 무화(無化)라 할 열반의 도구적 성격에 불과하였다. 대승불교에 와서 현세 윤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열반은 특수한 심적 경험(mental experience)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현세적·세간적 윤리는 부차적이고 하위의 가치 체계였다.
계율과 세간적 윤리 행위의 도구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선불교에서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레토릭은 단지 권위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관한 한 세간적 윤리의 무용성을 지적하는 선불교의 반사회적(anti-social) 반계율적(anti-nominal)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의 확립을 위한 선언이다.
원효나 경허 등의 파계 행위 대한 선불교 전통 일반의 관용적 태도는 우선 계율에 대한 느슨한 태도에서 일차적으로 기인하는 것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마음의 자유는 곧 행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자유가 행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깨친 자의 행위는 무엇이나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윤리적으로 혹은 계율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결국 도덕적 하위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왜, 어떻게, 그리고 어떤 교리적 정당성에 의해 마음의 자유(깨달음)는 윤리적 행위(業)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또한 깨달은 자의 모든 행위는 윤리적인가? 혹은 윤리적 행위는 궁극적 깨달음을 보장해주는가, 해주지 못하는가? 아니면 깨달음은 윤리적 행위와 아무런 내적 상관관계가 없는가?
이상의 물음들은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씩 자문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얼른 한 마디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질문 자체가 복합적인 문제를 함의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불교 전통 자체가 이 문제에 관한 한 일관된 입장이 아니라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모순된 다른 입장을 전통 내에서 보존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기 불교 이래 승려의 불음계(不淫戒)는 어길 경우 승단에서 쫓겨나게 되는 네 가지 중한 금계(禁戒)인 사바라이(四波羅夷)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원효나 경허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의 불음계의 파계는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다. 물론 그들 이야기의 상징성이나 레토릭이 지닌 종교학적 의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는 일정하게 불교 전통이 가지고 있는 초월성과 세간적 윤리 행위간의 불일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일치는 비단 선불교 전통에서만이 아니다. 초기 불교 경전인 아함경이나 파알리 경전을 살펴보면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이라는 초월성과 세간적 윤리의 도덕성의 문제가 항상 일정한 대립적 구도로 설정되고 있고 양자간의 교리적 긴장이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모든 도덕적 행위의 근거와 정당성이 깨달음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깨달음이 반드시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깨친 자의 자살이 허용되고 있는 경우이다.) 깨달음이 반드시 도덕적이 아니라면, 깨달음은 어떤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무위법(無爲法)이라는 개념이 의미하고 있듯이 깨달음은 그 자체 목적이요, 그 자체 어떤 다른 근거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행위는 깨달음을 보장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불교에서 도덕은 그 자체 목적일 수 있는가 등등, 윤리학의 기본적 의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의문과 문제점의 한 근원이 바로 깨달음 지상주의와 그 깨달음 지상주의의 부산물인 ‘깨달음의 신비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 현대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세속적 문제들―그것이 개인적 문제이든 아니면 환경이나 실업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이든―을 해결해줄 수 없듯이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행위의 기준과 구체적 실천은 이미 붓다에 의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불교적 윤리이며 도덕적 지침이자 그 자체 도덕의 완성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동시에 깨달음 후에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의 길이 노력에 의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체득된 길이라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수행에서는 깨달음 또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쉽게 간과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깨달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그 이후의 양자 모두)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상식적이어야 한다. 선종의 전통에서 선사들의 기행과 이적은 그 당시 ‘현장’의 역사적 컨텍스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할과 방(棒)은 바로 그 당시 ‘현장’에서의 일회적인 활발발한 사건이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적 컨텍스트를 떠난 다른 ‘현장’에서 다시 재현될 수 없으며, 재현한다면 모방일 뿐이다.
모방은 선의 죽음이다. 어록이 전하고 있는 선사들의 기행과 ‘현장’의 일회적 사건을 컨텍스트가 전혀 다른 현장에서 다시 재현코자 하는 것은 모방이며 전위 연극의 비상식적 생경함을 줄 뿐이다. 이제 기행과 이적으로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할과 방의 생경한 재현으로 깨달음을 박제화하는 것은 끝나야 한다. 붓다가 성도 후에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깨달은 후의 살아가는 모습 또한 도덕적이며 상식적이어야 할 것이다.
3) 보살사상의 재해석
그렇다면 깨달음 지상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의 제시에 앞서 한 가지 먼저 밝혀둘 사실이 있다. 본고에서 출가 중심 불교와 그 역사적 산물인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현대 불교에서 출가가 필요 없다든가 출가 제도의 불교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출가자의 역할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들이 교단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다만 현대사회의 변화에 맞게끔 그 역할과 종교적 목표가 바뀌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출가자의 새로운 역할이라든지 재가 출가의 새로운 관계와 역할 분담 등에 관한 것은 본고의 일차적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시 본고의 주제로 돌아가서 보살 사상의 재해석을 통해 깨달음 지상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의 한 핵심은 중생 구제의 서원으로서 ‘자신의 깨달음을 미루겠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살의 깨달음의 연기는 대승불교의 자비심과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 다른 해석은 보살사상의 발생론적 동기와 종교적 동기에서 볼 때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중생 구제의 서원으로 ‘깨달음을 미룬다’라는 보살사상은 그 출발의 종교적 동기가 출가 중심 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의 극복에 있었다고 본다. 아라한이라는 종교적 이상(理想)은 이번 생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승인들이 아라한이 아니라 ‘부처’가 되고자 하는 성불의 원을 세워 보살이 되고자 한 것은 깨달음을 반드시 이번 생에 이루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할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자각이며, 동시에 불교 수행의 목표가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최종적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윤리적 행위에 있다는 자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자각의 이면에는 수행만 할 뿐 정작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들이 거의 없었던 당시 인도 불교계의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고 본다. 다음의 《육도집경》의 한 구절은 대승불교 흥기 당시 인도 불교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때 나는 상비(常悲)라는 이름의 보살이었다. 그 보살은 항상 울고 다녔다. 왜냐하면 때는 무불(無佛)의 시대였고(또한 무법의 시대였다), 경전은 다 훼손되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사문도, 성인도 없었다. 보살은 오로지 부처님을 만나 뛰어난 가르침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세상은 혼탁하여 바름을 버리고 악한 것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보살은 항상 낙담하여 울고 다닌 것이다.(《육도집경》 T152 43a 중에서)
상비(常悲)보살. 항상 울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상비(Sad prarudita)’이다. 《육도집경》 중에 처음 등장하는 이 상비보살 이야기는 반야경전류에 등장하는 상제(常啼)보살 이야기보다 먼저 성립된 것으로, 대승 불교 흥기 당시의 상황에 대한 대승인들의 시대적 위기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불의 시대에 경전은 다 훼손되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사문도 성인도 없는, 그야말로 불·법·승 삼보가 다 없는 무불·무법·무승의 시대였던 것이다. 상비보살과 같은 절실함이 없었다면 대승불교는 등장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상비보살 당시에도 불교 교단이 있었고 승려도 있었고 경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 어느 것도 진정한 가르침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승’이라는 새로운 새벽이 오기 전의 깜깜하던 시대에 대한 낙망과 좌절의 느낌을 ‘지금은 무불의 시대’라 하였던 것이다.
보살사상은 이러한 시대적 절망감에서 출발하여 아라한이 아닌 보살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理想)을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생을 거듭했듯이 ‘나도 먼 훗날 언젠가 부처가 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이 걸어왔던 길을 지금부터 따라 걷겠다’라는 정신이 바로 보살의 출발점인 발보리심의 정신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의 삶’이 나의 ‘현생의 삶’인 것이다.
깨달음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의 일이다. 혹자는 ‘그래도 보살의 목표는 결국 부처가 되는 것’에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깨달음을 미룬다’라는 레토릭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전생·현생·내생 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현생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성불을 미루고 현생에서 보살로 살겠다’라고 하는 의미는 성불은 언제나 미래일 뿐 항상 영원한 보살로 살겠다는 의미이다. 이럴 때 현생에서 실현할 목표는 성불이 아니라 보살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생은 항상 현생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사상은 먼 훗날 성불을 이루겠다는 긴 여정의 수행자로서의 재가와 출가의 동등한 지위를 교리적으로 선언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붓다의 전생이 그러했듯이 보살은 출가자일 수도 또 재가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가와 출가를 동등하게 여기는 보살 불교는 역사 속에서 쇠퇴하고 다시금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발전하고 말았다. 다만 그 편린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부 대승경전에서 몇몇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사원 불교로 옮아가고 말았다. 이제 진정한 보살 사상은 실천되지 않는 명목상의 교리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에 수입된 후 불교는 더욱더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발전되어온 것 같다. 한역 경전의 역경자들 가운데 안세고나 강승회 등 재가자의 이름이 잠깐 등장하다가 후대에는 거의 전적으로 출가자들에 의해 역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원산지에서의 오랜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였던 보살사상의 등장 배경과 동기를 모르는 중국인들로서는 그 전통을 전해주는 출가자들의 입장을 본래적인 오리지널 불교의 모습으로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는 교리적으로는 보살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대승불교라지만 한 번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살사상이 실현되었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상 불교는 사원 중심이었고 출가자 중심이었다. 재가자는 복전(福田)에게 물질적인 보시를 베품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었을 뿐 다 같은 수행자라는 동료 의식이나 도반 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고 혹 있었다 하더라도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였다.
선종의 철저하게 불이(不二)적인 교리는 이론적으로는 재가 출가의 구분, 중생과 부처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 선종은 ‘지금’ ‘여기’ 현생에서의 깨달음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더욱더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불교로 발전하고 말았다. 선종은 스스로 보살사상을 강조하고 대승불교임을 자처하지만, 대승 보살사상의 중요한 핵심인 ‘하화중생’의 목표는 명목만 남아 있을 뿐 그들의 수행과 어떤 교리적 관련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 불교는 이제 바뀌어야 할 때다. 우리는 불교적 세계관에 따라 전생이니 현생이니 내생이니 하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항상 금생이다. 성불의 목표를 내생으로 미루고 지금 여기의 타인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보살 사상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항상 타인을 도우면서 살 뿐 깨달음 따위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제대로 돕기 위해서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변명이다. 제대로 돕기 위해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경우는 어떤 길이 옳은지 모를 때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이미 무엇이 바른 길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지 이미 보여주었다. 팔정도가 그것이고 바라밀이 그것이다. 깨달음 후에도 붓다는 팔정도와 바라밀을 실천하였을 뿐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깨달음 이후 걸어가는 길은 똑 같은 길이다.
공부도 그렇고 세상 모든 일에는 그 일을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분량의 일을 한 시간에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흘이 걸려도 못 끝내는 사람이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근기라 하든 전생사라 하든, 어쨌든 수행을 잘해 그 길을 현생에 마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몇 생을 걸려서도 도저히 못 마칠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깨칠 수 있다는 교리 하나만 믿고 허송세월 하느라 밥 축내고 시간 축내고 남을 돕기는커녕 자신도 돕지 못하는 사람은 종교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수행의 목표가 깨달음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혹자는 ‘수행의 목표가 깨달음이지만 그 목표는 이번 생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음 생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번 생에 이루어지든 다음 생에 이루어지든 어쨌든 수행의 최종 목표는 깨달음’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금 강조하건대 우리는 항상 현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내생도 그때 가면 현생이기 때문에.
요컨대 몇몇 예외적인 사람을 제외하고 절대 다수의 수행 목표가 깨달음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수행의 목표가 깨달음에 있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에 다름 아닐 뿐더러 일종의 최면과도 같아 ‘깨달음의 주술’에 사로잡혀 종교인의 최소한의 역할마저 망각하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말 수 있다.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세워 놓고 종교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역할도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살로서 삼아야 할, 그리고 달성해야 할 ‘영원한 현생’에서의 수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행복이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이다.
4. 결론: 깨달음을 위한 불교에서 행복을 위한 불교로
어떤 불교 모임에 가더라도 헤어질 때에는 반드시 두 손 모아 “성불 하십시요.”라고 한다. 현생에 성불하겠다는 각오와 그에 걸맞는 피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불하십시요.”는 허례의 겉치레에 불과하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겠다는 보살이라면 “행복하십시오.”라고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본다. 혹 미래의 성불을 기원한다는 것은 불교적이지 않다. 우리는 항상 현생만 거듭해서 살기 때문이다.
불교 교리를 보면 무상과 고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다. 무상과 고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불교의 근본 취지가 무상과 고에 있지는 않다. 불교의 근본 취지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즉 고를 떠나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고나 무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출가 중심 불교의 산물이다. 세속적 안락함을 떠난 출가자들에게 그 안락함의 무상함과 필연적 고를 강조했던 것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 세속적인 행복과는 다른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행복은 어떠한 행복이며 또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불교적인가? 세속 사회에서의 행복이 주로 욕망의 충족을 통한 것이라면 불교가 가르치는 행복은 욕망을 덜어냄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다. 욕망을 분모로 욕망의 충족을 분자로 하여 얻어지는 그 결과를 행복지수라고 한다면 세속적 욕망 추구는 분자를 끊임없이 늘임으로써 행복지수를 높여가려 하지만 분자와 함께 커지는 분모 때문에 행복지수는 그대로이거나 줄어갈 뿐이다. 붓다가 우리에 가르친 것은 분모를 줄임으로써 행복지수를 크게 한다는 것이었다.(분모가 제로가 되면 행복지수는 무한대가 된다.)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감소를 통해 행복지수를 높여가는 것이 바로 불교적 행복 추구 방법이다. 또 중요한 불교의 행복 추구 방식은 자신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타인을 도움으로써 나의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덜어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바로 이러한 불교의 행복 방정식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러한 방정식을 실천하는 노력을 말한다. 나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행복과 이익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이며 보살의 삶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이 바로 그 수행의 구체적 지침이며 계정혜의 세 가지 공부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성도 후 붓다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듯이 그 수행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일 뿐 아니라 바로 깨달음이 삶에서 구현되는 구체적 모습이다. 그 길만이 나와 타인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붓다가 수많은 전생을 거듭하면서 걸었던 길이고 그 길을 우리는 지금 현생에서 걷고자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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