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일미
안성두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에 대해 공부했다. 그 후에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독일 함부르크대학 인도학과에서 인도불교를 학부부터 다시 공부했다. 전공은 인도유식불교이며, 저서로는 Die Lehre von den Kles�s in der Yoga�a�hu�i (유가사지론의 번뇌설), 논문으로는 〈유가행파에 있어 견도설(I)〉, 〈《禪經》에 나타난 유가행유식파의 단초〉 등이 있다. 현재 금강대학교 국제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1.들어가는 말
필자는 단지 인도 대승불교의 한 시대를 조금 공부했음에 불과하고, 따라서 필자의 미약한 능력으로 한국불교의 상황을 일반화시켜 논의한다는 것이 역부족이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제넘게 이러한 일반적 논의를 감히 떠맡은 까닭은 지금 한국불교의 상황이 필자가 공부하는 현장에서 바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많은 진지한 선(禪)수행자들이 다른 수행도의 유행 내지 유포에 대해 일종의 우려를 표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실천적 수행에 관한 한 다른 불교국가에 비해 뛰어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기도취적 입장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학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우려는 많은 점에서 역사적 안목과 문제의식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많다.
따라서 이하에서 서술하고 지적하려는 문제도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제기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전 세계적인 불교의 르네상스에서 한국불교가 변방의 한 종교현상으로서가 아니라 후세대를 위한 창조적이고 주도적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십여 년 전부터 전통적인 간화선이나 염불 등의 수행법 이외에 다른 전통에 속하는 수행법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유행한 수행법은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관법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삶의 고통과 심리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으로서 위파사나에 눈을 돌리고 있고, 또 이 관법은 많은 이들에게 현실적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보인다.
필자가 여기서 관심을 가진 측면은 위파사나 관법의 실제적 기능이 아니라 이 관법에 대한 전통적 주류불교측의 대응이 어떠했는지에 있다. 한국의 주류불교를 대표하는 선불교의 반응은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위파사나를 현금의 수행체계 내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견해는 극히 소수이고, 다수의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선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간화선이 해탈을 위한 불가결의 수행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인다.
적극적으로 선을 옹호하려는 선사들은 위파사나의 효과가 빠르다고 하는 점을 빗대어서 선이야말로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른 수행체계에 대한 오불관언식의 이러한 배타적 태도가 현금의 선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위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라고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수행법과의 조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선사들은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법을 간화선 수행의 기초수행법으로 간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한 관점은 현금의 수행 다원주의적 상황 속에서 최상승으로서의 간화선의 정통성과 전통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의 일환일 것이다. 아마 그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현재의 백가쟁명식 수행론의 무정부주의적 상황에서 간화선을 정점에 둔 새로운 수행체계의 정립이라는 목적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정립을 위해 가장 손쉽고도 유용한 방식의 하나는 동아시아 불교에서의 경전 해석의 기준이었던 교판을 수행론의 맥락 속에 다시 도입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간화선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위계적 수행체계의 성립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의 한 극단적 형태는 예를 들면 남방불교에서의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을 대승불교의 보살 10지에서 초지에 해당된다고 해석하는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이 가진 교리상의 문제점은 일단 제쳐놓더라도 과연 이러한 전통적인 교판이라는 해석적 관점이 과연 이 시대에 적절한 패러다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선다. 왜냐하면 교판은 실로 불교의 포용성의 상징이 아니라 종파적 폐쇄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교판이란 본질적으로 자종의 견해를 최상부에 놓고 다른 종파의 견해는 그것보다 하위에 소속시킴으로써 자종의 이론이나 관점을 중심으로 이론과 수행론을 조직화하고 논쟁화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불교사상사 전체를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러한 이해도 자종 중심의 자기이해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더욱 발전된 화엄 등의 교판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수행이 배제된 형식논리라는 인상을 주기에 족하다. 지난 세기에 인도의 네오힌두이스트들이 그들 문화의 융합적·통합적·전체적 성격을 강조했을 때, 독일의 하커(P. Hacker)가 역설적으로 힌두이즘의 ‘동이불화(同而不和)’적 성격을 지적하기 위해 ‘포괄주의(Inklusivismus)’라는 개념을 사용해 이를 비판한 것도 교판론이 가진 한계와 관련해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다른 수행체계에 대한 기존 선불교의 대응논리가 가진 한계는 쉽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선불교의 강점은 이런 대응논리의 유무에 있지 않다는 것도 명백하지만, 적어도 이런 외적 도전에 대응해 선불교가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기존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자세는 지극히 ‘비선불교적’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있어 간화선 중심주의의 문제점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자유롭게 기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불교학도로서 불교를 역사적으로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현실불교와의 괴리감의 일단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는 답답함이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어떤 공통분모는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문제는 한국 선불교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간화선 수행전통의 우수성과 효과를 확신하는 사람은 현금의 위기의 원천이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전통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면서 따라서 자신의 원래의 뿌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듯하다. 위기의 본질은 간화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간화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고 보는 이러한 생각이 필자가 보기에는 바로 위기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본질적으로 선불교를 ‘교조화’하고 탈역사화시키려는 시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교사를 통해 선불교는 말할 나위도 없이 불교의 주류전통은 항시 이런 종류의 ‘교조화’에 저항해 왔음을 알고 있다.
초기불교 이래 “이것이 진리이고 저것은 아니다” “나의 길만이 열반으로 인도하고 너의 길은 아니다” 등으로 정형화된 계금취(戒禁取)에 대한 비판은 교조화의 위험을 경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것을 교조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절대화시키는 태도야말로 가장 반불교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물과 관념의 공과 무실체성을 설하는 반야경의 논리를 언급할 것도 없이 자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을 교조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선불교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길’임을 명확히 인식하는 데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조차 없어 보이지만, 구체적 현장에서는 전통과 기득권의 강력한 벽에 부딪쳐 짓눌려 있는 ‘불교적’ 상식이다. 이러한 불교적 상식의 세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통도 역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의식을 갖고 붓다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자각이 선행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선불교도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제기되고 선택된 ‘수행방법’이며,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는 적절하게 응용되고 변화되어야 할 수행도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대적 인식에 의해 선불교의 방법은 역설적으로 실생활의 맥락에서 우리의 의식을 창조적으로 상승시키는 활구(活句)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불교사상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상대주의적 인식을 불교에 도입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고고학자와 같은 관심이 저변에 놓여 있다. 그것은 불교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 나타난 여러 다양한 교리와 수행체계를 발굴해 내고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 수행체계가 유행했고 어떤 조건 하에서 쇠퇴했는가를 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선불교의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역사적 지평을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보통 불교사상사에서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가 두 번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 첫 번째가 소위 소승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도입이고, 다른 하나의 변화는 대승불교에 기초해서 일어난 선불교 내지 탄트라 불교이다. 첫 번째 패러다임의 변화가 인식론과 존재론, 해탈론 등의 교리상의 전면적 변화를 초래한 데 비해, 두 번째 변화는 대승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다만 깨달음의 교육적 측면에 있어 보다 효율적인 방법론과 관련되었다고 보인다. 이들 변화가 사회적·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 하에서 진행된 것도 사실이지만, 지면상 모든 요소를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대승불교에로의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인 보살 관념을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대승불교를 전 시대의 사상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생에 대한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의 이상이다. 보살사상은 여러 내적·외적 요인의 결합에 의해 시작되었고 발전되었겠지만, 일단 전개된 이후에는 대승의 전 역사를 통해 그리고 대승불교가 전파된 모든 지역에서 하나의 강력한 이념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보살의 이상 없는 대승불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고, 만일 그러한 불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대승의 범주에 묶을 수 없을 것이다.
최초로 보살계를 독립된 장에서 설하고 있고 따라서 대승의 보살윤리를 정착화시켰다고 평가받는 《유가사지론》 〈보살지〉는 보살이 공성(空性)과 대비(大悲)를 어떤 긴장감 속에서 수련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보살이 공성의 수습을 통해 수행도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상승했을 때 그에게 두 가지 대안이 있다. 하나는 무상, 고, 무아의 관찰을 강화시켜 사물의 공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길이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열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단계에서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강화시키는 길이다.
그는 붓다에의 길이 오랜 세월 동안의 지혜와 공덕의 자량을 쌓는 길임을 보면서, 그리고 중생들이 윤회 속에서 얼마나 고통 받는가를 보면서 열반으로 들어가는 대신 대비심을 강화시켜 다시 세간으로 돌아온다. 〈보살지〉에서 보살은 중생에 대한 그의 앙가주망이 공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그럼에도 허깨비 같은 중생들의 구제를 위해 허깨비 같은 노력을 지속하는 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공성과 대비 사이에서 양자의 긴장관계를 의식하면서도 중생에 대한 앙가주망을 하는 보살의 행위를 두 심연 사이에 걸쳐진 밧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보살의 행위의 근거는 모든 존재가 가진 동일성에―그것을 유식에서는 모든 존재의 공통적 특징으로서의 진여(眞如)라고 부르는데―있다. 그리고 이에 의거해 보살의 구제론적 모델도 혁신적으로 바뀌어졌다. 만일 자아라고 불릴 만한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자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어떤 본질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존재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어떤 존재론적 차이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 즉 보살의 행동은 이전의 수행자와는 전혀 다른 실천적 목표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의 ‘생사즉열반’의 세계이고, 이런 존재론에 입각해 있을 때 비로소 보살의 무주처열반의 윤리적 이상이 실현가능해지는 것이다.
공성과 대비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 보살의 이상에 대해 인도의 유명한 불교시인이자 수행자인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대승보살의 보리심의 계발을 두 가지 단계로 설하고 있다. 첫째는 타인과 자신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타의 동일성을 통달한 후에,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교환하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단계로 나아간다.
전자의 단계에서 이타행의 근거는 고통의 변재성과 모든 존재는 고를 피하고 낙을 구한다고 하는 ‘황금률’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동일한 고통과 동일한 기쁨을 갖고 있고, 자신은 스스로를 보호하듯 그들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보살의 실천윤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손 등의 여러 다양한 부분으로써 이루어진
상이한 몸이 단일한 것으로 보호되듯이,
그와 같이 동일한 고통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이 다양한 중생계도 보호되어야 하네.
다른 이들의 고통을 나는 제거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고통처럼 고통이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를 도와야 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나처럼 유정이기 때문에.
고통의 변재성을 통한 이러한 윤리적 명령은 다음 단계에서 ‘자아’의식의 허구성과 모든 존재의 비실체성에 대한 통찰에 의거해 새로운 차원의 윤리로 전환된다. 만일 모든 존재가 본래적으로 공하다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하등 근거가 없게 된다. 모든 내적·외적 대상의 존재성이 제로로 수렴되었을 때, 집착되어야 할 대상도 집착하는 의식도 함께 소멸되며 따라서 이 단계에서 대승보살은 기꺼이 자신의 기쁨을 타인의 고통과 바꾼다.
종자와 피로 가득 찬 낯선 항아리에 대해
습관으로부터 ‘나’라는 인식이 생겨나네.
왜 우리는 낯선 몸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것일까?
자신의 몸이 낯설다는 것은 확실한데도 말이다.
자신과 타인을 구제하려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의 교환이라는
최고의 비밀에 헌신해야 한다.
4. 경험의 직접성(不立文字)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경전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수행의 방법론과 관련된 문제이다. 선수행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방식으로 스승의 직접적 가르침에 의해 전달되는 가르침으로서 문헌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는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말해져 왔다. 필자는 선수행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의도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선의 황금시대’에서 엿보는 선사들의 기상과 품격이야말로 불교적 정신의 한 극치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한 선이 불교의 ‘꽃’으로서 최상승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주장을 인정하는 측에 서 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선이 최상승이면서도 어떻게 동시에 많은 사람을 가장 쉽게 열반이라는 목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전통적으로 초기불교와 초기대승의 수행도는 붓다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해서 이것을 반복함에 의해 그의 깨달음을 추체험하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사성제를 개인적으로 추체험함에 의해, 또 법계에서 흘러나온 것으로서의 붓다의 가르침을 청문(聽聞)함에 의해 시작되는 체험의 영역이다. 초기불교에서 4성제는 제자들의 깨달음을 위한 일종의 매뉴얼로서 기능했다고 여겨지며 그런 한에 있어 이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깨달음으로 이끌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듣는 것은 이런 깨달음의 흐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출발점으로서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선에 이르러 이러한 전통적 교육방법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직접성에 대한 의심이며,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영역이 문자화되고 언어화된다는 사실에 대한 거부일 것이고, 그것의 깨달음을 위한 효용성에 대한 회의라고 말할 수 있다. 대신 선이 내세우는 방식은 일 대 일(1:1)의 직접적 깨우침을 통한 전승이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직접적 가르침인 한에 있어 다수를 위한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이며, 그것이―작금의 우리의 상황처럼―다수를 위한 가르침으로 변모될 때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선의 위대함은 선사들의 교육적 방식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공안(公案)의 체험이란 본질적으로 말해 그 공안을 교환했던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벌어진, 어떤 모방도 허용치 않는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다. 그것은 스승이 제자의 능력과 수준을 가까이 보고 그에게 다른 차원의 통로를 열어 보임에 의해서, 같은 차원에서 맴돌던 제자의 의식을 급속히 실재에의 인식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그런 한에 있어 ‘직접적’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공안이 다수를 위한 가르침으로서 ‘문헌화’된다면, 그것은 이미 직접성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선이 그렇게 혐오했던 다른 모든 수행도처럼 경전이라는 정형구적 방식에 입각해 해탈을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집된’ 공안의 참구나 간화의 방식에 의지해 수행해 나가는 방식은 필자의 견해로는 넓은 의미에서 매뉴얼에 의거해 수행하는 전통적 수행도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간화선의 본질을 활구(活句)라고 함에 의해 사구(死句)로서의 공안선과 준별하려는 목소리가 선의 역사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역사적 인식과 보다 관련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직접적 경험의 강조가 보여주는 위험성이다. 그것은 청문과 이에 대한 사유, 그리고 수습으로 이루어진 불교의 수행체계에서 앞의 두 요소를 배제하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실로 이 문제는 한국 선불교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수행론에 대한 극단적 견해가 지배했던 곳에서 항시 나타났던 위험이기도 했다. 쫑카파는 《보리도차제론》에서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의 적극적 수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양자의 관계를 카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며 다른 것은 아니다.” 그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허물이 없는 경과 탄트라 및 이에 대한 위대한 논사들의 진실한 주석문헌에 대해 큰 존경심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게 만들고, 따라서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다.” 물론 경전에 의지해서 확실성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직접적 가르침에 의지한 후 경전의 가르침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직접적 가르침은 경전의 가르침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한 보충적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최고의 핵심적 가르침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국 선불교의 역사적 사명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선불교는 조선 시대 이후 한국불교의 주류전통으로서 서 있고 이것은 현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숭유억불정책 하에 있었던 조선시대에 화엄과 천태 등의 교학적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그러한 과거의 소극적 수동적 상황 속에서 불교가 존속하기 위해 택했던 방식들이 현재 한국의 상황에 얼마나 타당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더구나 만일 그 전통이 다른 불교적 전통의 배제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파이지 불교 전체를 대표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직까지 선불교 수행자들의 마음에는 교에 대해 선을 구별하고, 공안선에 대해 간화선을 구별하고, 간화선의 전통 중에서도 적통을 구별하려는 ‘분별심’만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그것이 한국 선종의 역사적 정통성의 탐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러한 ‘축소지향적’ 자기순수성의 확보가 과연 오늘날의 한국 불교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그 정체성의 인식에 얼마만큼 순기능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판단이 앞선다.
과거 불교의 황금시대에 그 중심축에는 항시 활발한 교학적 논의가 있었다. 이것은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성립기에 있어서도 타당하다. 특히 인도 중세문화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굽타왕조 시대에 학파적으로 성립되었던 유식불교의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유식불교는 근본적으로 외딴 곳에서 홀로 수행했던 불교 요가행자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교학이다.
우리가 그것을 서양철학의 관념론과 등치시킬 수 없는 이유도 그 점에 있다. 그렇지만 유식은 요가행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의 위대한 체계적 해석을 이끌어 내었고 그것을 통해 인도 대승불교의 수행체계는 철학적, 이론적 근거를 확실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통해 인도불교는 비로소 인도의 정통 철학체계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등장하게 되었고 따라서 인도철학에서의 철학적, 종교적 논의가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 선사들에게 있어 이러한 논의 자체가 불만족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필자가 믿는 한 유식불교가 주는 메시지는 청문과 사유가 수습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식은 절대적인 것, 즉 진여가 언어와 사유, 즉 청문과 이에 대한 사유를 초월하고 있고, 단지 자내증(自內證)의 영역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점에서는 다른 대승불교나 선불교와 동일하다. 그러나 유식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유식은 초기불교 이래 제자들의 깨달음의 체계인 사성제의 진리성을 인정하고 이를 ‘언설로서 정립된 진리’ 또는 《기신론》의 표현을 빌리면 ‘의언진여(依言眞如)’로서 인정한다.
이러한 적극적 해석의 의의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교가 내적, 외적 시대적 상황의 도전에 항시 창조적으로 응전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새로운 길은 이런 창조적 응전이 불교사 속에서 어떻게 제기되고 수용되어 왔는지를 관찰하고, 이를 우리의 정신적 상황에서 ‘온고이지신’함에 의해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
전통적으로 각각의 수행도는 어느 하나의 번뇌를 치료하는 데 특효가 있는 것으로서 설명되었다. 예를 들어 부정관(不淨觀)은 애욕이 강한 자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이 주는 매력이 실은 얼마나 추하고 소멸하기 쉬운지를 보여줌으로써 욕망을 포기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자애관은 증오심이 강한 자에게, 연기관은 어리석은 자에게, 수식관은 마음이 혼란한 자에게 특효가 있는 관법으로서 제시되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위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승의 흥기와 함께 대승의 실상관이 수습되었을 때 이들 관법은 하나의 예비적 단계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현상적 요소의 존재란 단지 명칭으로서 주어져 있을 뿐 명칭에 대응하는 외적 실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대승적 통찰은 보다 넓은 지평에서 욕망과 번뇌의 뿌리를 제거하는 데 유효한 것으로 체험되었다고 보이며, 따라서 대승의 경향을 따르는 수행자에 의해 더 높은 실재성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대승의 관법의 하나로서 유식에서의 4종 심사(尋思)와 4종 여실지(如實知)를 예로 들어 보자. 이것들을 통해 가설로서의 대상에 대한 집착이 그치게 된다. 언어와 지시체 사이의 비동일성 문제는 실제 사물의 본성에 대해 조금의 철학적 사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유식학에서 이 문제를 대상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탐구의 기초에 놓는 이유는 이러한 분석을 일상적 삶 속에서 적용시킬 수 있기 위한 보다 실천적인 면에 있다.
우리의 지각을 명상적이고 분석적 방법으로 해석해 나간다면 지각의 확고부동함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며, 나아가 지각대상도 고정불변의 어떤 실체로서 간주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실천적 입장에 적용시켜 볼 때 매우 커다란 긍정적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그에 대해 증오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의 덧없음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런 감정에 쉽사리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 이런 ‘적’이나 ‘친구’와 같은 개념에 대응하는 외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위계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상책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소승 간의 진정한 통합이 가능할 것인가에 관해 의문이 들게 된다. 이 점에서 《해심밀경》의 ‘일미(一味)’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의 전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설의 일미란 《법화경》 등의 일승사상을 현양하는 경전에서 강조된 것으로 모든 강물의 다양한 맛이 바다로 들어가면 하나의 ‘맛’으로 되듯이, 삼승의 모든 다양한 수행법과 여기서 나오는 차별적 인식도 일승의 바다에서 해소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해심밀경》은 〈승의제상품〉에서 궁극적 진리의 특성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면서, 그 중의 하나로서 궁극적 진리를 ‘일미’로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일미’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 함축적 뉘앙스는 《법화경》의 설명과는 다르다고 보인다. 여기서 《해심밀경》이 설정하는 무대는 다원적 수행론이라는 본고의 주제에도 부합되기 때문에 간략히 그 광경을 스케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낮 동안에 각기 다른 곳에서 수행을 하다가 저녁이 되어 한 곳에 모여 자신들의 수행과 그 소득에 대해 논의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수행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느 수행자는 5온의 관찰에 의지해서, 다른 사람은 12처 내지 연기관 등의 관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수행법들은 대체로 전통적 수행법을 망라하고 있는데, 그것을 나열해 보면 온·처·연기·식(食)·계·4념주 등의 37보리분법 등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얻은 인식만이 궁극적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밤새도록 서로 논의하면서 다투고 있다. 수부티가 그들이 증상만을 품었기 때문에 궁극적인 진리가 일체처에 변재하고 일미의 모습을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붓다에게 궁극적인 것에 대해 묻는 부분에서 《해심밀경》의 ‘일미’의 해석이 제시된다.
《해심밀경》의 설명에 따르면 궁극적 진리는 일체의 온에 있어 청정의 대상이다. 그것은 처·연기 등의 다른 수행법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럴 때 이것은 ‘일미의 모습으로, 다른 것과 구별되는 개별상으로 나타나지 않게 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수행도는 그것에 의해 궁극적 진리가 증득되는 한에 있어 모두 ‘일미’이다. 예를 들어 만일 5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해 궁극적인 것을 증득했다면 그것이 다른 수행도를 통해 획득된 궁극적인 것의 인식과 배치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해심밀경》은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적시해서, 만일 어떤 수행자가 하나의 온의 진여와 궁극적인 진리성과 법무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다른 온에 관해서나 다른 처, 연기관 등의 관법에 의지해 다시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설명에서 논의의 초점이 각각의 수행도가 가진 궁극적인 측면에 맞추어져 있지 결코 각각의 수행도가 궁극적인 불설의 바다에서 ‘일미’로 용해되는 측면에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해심밀경》에서 ‘일미’의 해석이 일승론자의 그것과 다른 점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도 이런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 모든 현상적 사물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으로서, 현상적인 사물의 본성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설하는 〈승의제상품〉의 설명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점에 입각해서 유가행파가 ‘삼승진실 일승방편’의 설을 제창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해심밀경》은 수행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그 다양한 방식이 중생들의 능력과 의향에 달려 있다는 자각을 구체적 맥락에서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수행도의 가치를 다른 수행도의 희생의 대가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진리의 ‘일미’를 통달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 궁극적인 것을 인정하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고찰은 대승불교, 특히 유가행파에 의해 강조된 대상과 명칭 간의 불일치라는 유명론적(唯名論的) 관점을 통해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구별되는 것은 명칭일 뿐이지 그 내용이 아니라면, 오히려 명칭에 의거한 구별이야말로 ‘명칭대로 사물이 존재한다’는 집착일 뿐이며 가장 비대승적 사고방식이 되게 될 것이다.
수행이란 하나의 치료약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에게 맞는, 모든 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능의 치료약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극히 비역사적일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야와 방편(또는 대비)이라는 대승의 두 기둥 중에서 방편을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살도를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유마거사의 침묵은 ‘우레와 같은’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도그마화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만일 유마의 집에 병문안을 왔던 다른 대보살들이 침묵을 했다면, 아마 유마는 ‘우레와 같은’ 사자후로써 궁극적인 것에 대해 설했을 것이고 이것이 붓다의 찬사를 받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선을 포함해 모든 수행도는 응병여약의 방식에 따라 설해진 것이다. 중생의 능력과 의향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듯 그에 상응해서 무수한 수행도도 제시되는 것이다.
어떤 약의 효과가 빠르다고 해서 그 약만을 환자에게 제시하는 의사는 돌팔이를 빼고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의 효과가 빠르다고 해서 그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교육적인 면에서 하지하책일 것이다. 또한 선이 최상의 가르침이고 다른 것은 하위에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교판을 통해 수행 다원주의를 극복하겠다는 발상도 지나치게 안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원적 수행론의 세계에 더 이상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어려운 배타적 방식일 뿐이다.
‘최상승’의 방식으로 획일화된 ‘일미’의 수행법보다는 다양한 수행도를 통해 궁극적인 ‘일미’에 대해 깨닫는다는 《해심밀경》의 설명이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다 적시적(適時的)인 것은 아닐까? 이를 통해 오히려 붓다의 세계가 보다 장엄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현대 한국불교의 돌파구는 ‘무엇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인가의 논의에 있다기보다는 ‘왜’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대승의 대승으로서의 존재의의를 다시금 인식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오늘날 절간에서 여자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평가절하된 보살이란 말을 다시금 ‘이상적인 대승의 인간상’이라는 원래의 의미로 살려내는 데 있을 것이다. 재가든 승가든 불교도가 보살적 이상을 내면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 사회적 실천에 나설 때 참다운 대승의 세계는 열리게 된다고 필자는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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