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각묵
스님. 10여 년 간 인도와 미안먀 등지에서 공부하여 주로 산스끄리뜨· 빠알리· 쁘라끄리뜨를 연찬했으며, 지금은 '빠알리 삼장'의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사천 구룡사에 주석하고 있으며,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간화선과 위빳사나에 대한 비교는 여러 각도에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의 주제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이므로 필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차이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하겠지만 이 둘은 근본적으로는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부터 먼저 내리고 글을 전개하려 한다.
왜냐하면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둘 중 하나는 불교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본 글을 통해서 초기불교와 위빠사나(아비담마)의 입장에서 한국 간화선에 대한 고언을 늘어놓을 것이다. 필자는 화두에 대한 의정 때문에 출가하였고 지금도 간화선적 태도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간화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어느 누구보다 크고 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비판이 없으면 한 집단이나 교학체계나 수행법은 썩기 마련이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작금의 한국 간화선풍토를 비판하는 이유는 필자가 한국의 간화선전통을 아끼기 때문이며, 간화선이 중국이라는 산을 넘어 불교 만대의 표준인 초기불교라는 근원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초기불교수행법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위빠사나를 한국불교가 바르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며, 대승불교의 발판이요 위빠사나 수행의 완벽한 지침서인 아비달마에 눈떠야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먼저 본 주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중요한 측면 몇 가지를 고찰하고 들어가려한다.
먼저 위빠사나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남방의 많은 주석서들에서는 한결같이 "[법의]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 ivedha, 洞察) 혹은 수관(隨觀)하는 것(anupassan )"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빠사나는 "법"{{ 정확하게는 구경법(paramattha-dhamma)이지만 줄여서 법(dhamma)이라 부르는 것이 남방의 관례이다. 본고에서 필자가 사용하는 법은 모두 구경법을 의미한다.}}을 통찰하는 것이지 사람이니 인간이니 우주니 세계니 하는 "개념적 현상(pa atti, 施設)"을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위빠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적 현상(빤�띠, pa atti)과 법(담마, dhamma)을 정확히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띠(개념적 현상)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최소단위를 아비담마에서는 법이라 부른다. 마치 자동차가 수 만개의 부품의 조합이듯이 개념적 현상은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개념적 존재는 위빠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청정도론》을 위시한 상좌부 주석서에서는 거듭해서 밝히고 있다. 위빠사나의 대상은 바로 법이다. 아비담마에서 법은 찰라생·찰라멸을 거듭하는 것으로 우리 인식에 개재되는 최소단위라고 규정한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 1,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 52, 물질(구체적 물질 18, 추상적 물질 10), 열반 1하여 모두 82가지 법을 들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 물질은 구체적인 토대가 없으므로 위빠사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 10가지를 제외한 72가지 법들을 위빠사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72가지 법들은 각각 그 자신의 고유성질(sabh va-lakkha a, 自相)을 가진다. 탐욕과 성냄이 다른 이유는 탐욕은 거머쥐는 성질을 가졌고 성냄은 밀쳐내는 성질을 가졌다. 이렇게 법들은 자신만의 고유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법들이 어떠한 고유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보편적인 성질(s ma a-lakka a, 共相)을 가진다. 이러한 72가지 법들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이렇게 제법을 무상이나 고나 무아로 철저하게 꿰뚫을 때 해로운 법(不善法)들의 뿌리인 탐·진·치를 멸절하여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위빠사나를 말하는 것은 마치 ‘짚신세벌로 즉심시불’을 알려는 무모하고도 무지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을 체계화하는 아비담마(對法)는 위빠사나의 생명이다. 아비담마를 모르는 위빠사나라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아비담마가 위빠사나요 위빠사나가 아비담마라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빠사나는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 즉 제법의 고유한 성질(自相)과 무상·고·무아의 보편적 성질(共相)을 드러내는 반야(통찰지, 慧, pa )라는 것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위빠사나는 유익한 마음부수(心所)에 속하는 반야(통찰지)와 동의어이다. 다시 말하면, 위빠사나는 바로 반야(지혜)를 뜻하지 선정이나 삼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相似影像, pa ibh ga-nimitta)이라 불리는 개념이다. 오랜 집중 수행에 의해서 대상이 익힌 표상(uggaha-nimitta)이 되고 마침내 닮은 표상이 되어서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모두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요함만으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요함(사마타)의 상태란 마음들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內觀)라는 강력한 지혜(반야)를 개발시켜서 이런 지혜의 힘을 통해서 이들을 여실지견하고 꿰뚫어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적 현상(빤�띠)이요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며 위빠사나를 이해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출발은 개념적 현상과 법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간화선을 살펴보자. 간화선(看話禪)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송대 대혜종고 스님(1089∼1163)에 의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그러면 왜 남종 돈오선이 대해종고에 의해서 간화선으로 정착이 되었는가. 학자들은 무사선, 문자선, 묵조선의 폐풍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화선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첫째, 학자들은 남종선의 돈오가 무사선(無事禪)으로 오해된 폐풍을 들고 있다. 돈오를 주장하는 남종선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에 다만 그 마음을 쓰면 곧 바로 성불해 마친다(보리자성 본자청정 단용차심 직료성불)"라는 《육조단경》의 명제로 압축된다. 이러한 명제는 불교역사를 통해서 본래부처 본자청정 본무생사 본무번뇌 등의 무수한 명제로 전개되어 왔다. 이런 가르침은 후대로 올수록 "본래부처이기에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무사선으로 오해가 되었다.
이것은 작금의 한국 선방에도 널리 퍼져있는 폐풍이다. 수행자들은 입만 열면 본래부처 본자청정 본무생사 본무번뇌를 읊조린다. 심지어 그들은 "간화선에서는 번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매순간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휘둘리면서도 탐·진·치는 본래 없다고 말한다.
아니 자신에게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는지 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무사선의 극치이며 "관념의 유희"요 '음주와 사음이 무방반야'라는 타락의 근본이다. 이런 폐풍을 없애기 위해서 간화선에서는 소위 말하는 조사관(祖師關)을 설정하여 화두를 제기하고 이를 통과해야 깨달음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돈오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런 무사선을 경계하기 위해서 대혜스님은 이독제독(以毒除毒, 독인 화두로써 독인 번뇌를 제거함)의 극약처방인 간화선을 주창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가 '불이문자(不離文字)'로 되어버린 '문자선(文字禪)의 폐풍을 들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兩宋 선종의 주된 흐름으로 이처럼 불립문자에서 불리문자로 표현되는 문자선을 그 특징으로 들고 있으며,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시 말하여 晩唐·五代, 北宋에 걸쳐서 어록이 대량으로 출현하고, 또한 이른바 '공안(公案)'에 대하여 拈古·頌古·評唱·代別 등의 주석이 대거 나타나게 됨으로써 점차 선의 수행은 일종의 주석학으로 빠져들게 된다. 특히 임제 계통의 분양선소(947∼1024)의 《頌古百則》,《公案代別百則》,《詰問百則》등의 저작에서 공안해석에 대한 통일된 형식과 답안을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繞路說禪'의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를 이어 수많은 선사들이 모두 송고를 짓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대혜 스님의 스승인 원오극근 스님의 《벽암록》에 이르러 문자선은 극성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선의 수행은 모두 문자를 통한 문자선의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점차 사대부 문인들의 언어적 유희로 전락하게 되어 그러한 폐해를 고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대혜 선사가 바로 스승인 원오극근 선사의 《벽암록》을 모두 불살라 유포를 금지시킨 것은 바로 이런 문자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셋째, 묵조선의 폐해를 들 수 있다. 본자청정을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묵조선의 입장을 대혜는 '묵조사선'이니 '아무 말 없이 흑산 아래 귀신굴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니 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정작 투철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식정의 분별로 본자청정이라 여기고 그 경지를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발상자체가 미혹에서 나온 분별망상일 뿐이라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대혜 스님은 묵조사선의 병통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공안 참구의 중요성은 대혜 스님이 일생을 두고 강조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혜 스님은 《서장》의 곳곳에서 이륙시중에 화두를 제기할 것을 다그치고 있다. 묵묵히 앉아서 본래부처임을 시현한다는 좌선보다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의정을 촉발할 것을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제방선원에서는 시간 늘리기에 급급하고 있다. 입만 열면 간화선이 최고라고 말하면서도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 스님이 극복하려 했던 좌선 지상주의에 안주하고 있다.
이처럼 간화선은 본래성불, 본자청정, 즉심시불 등의 명제에 함몰하여 번뇌의 때가 새까맣게 끼어있으면서도 깨달은 양 착각하여 날뛰는 악성적인 무사선과 미혹인지 깨달음인지 분간도 못하고 미혹한 상태에서 묵묵히 근본을 반조한다면서 앉아있는 묵조선과 불입문자를 표방하면서도 온갖 훈고학적 문자놀음을 일삼은 문자선을 극복하고 실참실구를 통해서 깨달음을 구현하려는 체계이다.
이런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이 둘의 같은 점을 살펴보자. 먼저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근본적으로 같은 점은 둘 다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간화선을 두고 경절문이라 하고, 견성을 중시하며, 화두라는 참구대상을 설정하는 이유도 모두 선정의 고요함에 함몰하기보다는 지혜로써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이본 《육조단경》에는 '오직 견성만을 논하지 선정을 통한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라고 강조한다.
한편 위빠사나가 근본 수행법인 이유도 사마타의 적정처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니 우주니 마음이니 하는 온갖 개념적 현상(pa atti)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드러나는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화두참구와 위빠사나를 제대로 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겠지만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요 위빠사나이다.
그러나 몇 몇 학자들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성격을 4禪과 같은 선정에서 찾기도 하고 그 교두보 역시 선정에서 확보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선정수행은 초기경 곳곳에서 부처님이 강조하고 계신다. 그러나 선정수행은 깨달음을 위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초기경 곳곳에서 선정체험이 없이 오온과 12처와 18계의 무상·고·무아와 연기법 등을 철견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아주 많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정을 중시하는 초기경들에서도 선정을 깨달음이라고 설한 곳은 결코 없다. 선정의 경지에서 나와서 번뇌와 번뇌의 일어남과 번뇌의 소멸과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 혹은 고와 고의 얼어남과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철견하여 번뇌를 다하고(漏盡) 구경지(究竟智, a )를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선정을 강조하는 경들에서도 4선-3명, 4선-6통, 4선-4처-상수멸로{{ 4禪(jh na) - 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3明(vijj ) -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6通(abhi ) - 신통변화[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4處( yatana) -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想隨滅(sa vedayita-nirodha) - 인식과 느낌까지 완전히 소멸된 경지 = 滅盡定.}} 해탈열반 혹은 깨달음을 설명하지 4선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설한 곳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정체험을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만나는 교두보로 이해하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정신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를 수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각각 화두나 법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이처럼 화두를 챙겨 의정을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은 흑산귀굴에 앉은 것으로 표현되는 묵조사선(삼매)이요, 대상에 마음챙겨 무상·고·무아를 수관을 하지 않는 남방수행은 단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만을 설하는 사마타 수행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간화와 수관은 화두와 법이라는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을 통해서 마음이 매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중시하는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같다.
작금의 많은 한국 간화선 수행자들은 좌선지상주의에 빠져 앉는 시간 늘리기에 급급해 있다. 이렇게 되면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실제로 몇몇 위빠사나 행자들이 간화선을 비판하는 제일 중요한 근거가 간화선은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화두를 단순히 집중을 위한 대상쯤으로 여긴다면 간화선은 분명히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한국 간화선은 이러한 비판에 귀 기울여서 스스로를 최상승이라 뻐기면서도 정작 수정(修定)주의에 머물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가장 중요한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여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을 출발점으로 삼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적인 현상(빤�띠)을 분리/분석/해체하여 드러나는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빠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본자청정이니 본래부처니 본무생사니 본무번뇌니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제한, 조건, 발상, 가정, 가설, 관념에서 일시에 초탈하고 초탈했다는 생각까지도 거부하는 게 간화선이다.
모든 제한, 조건, 가정, 가설, 관념, 경계로 표현되는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 아뜨마산냐( tm -samj , 我相, 자아라는 산냐)를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아뜨만)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거기에 몰입하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초월적(transcendental)인 접근을 하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전제도 부정하는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빠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와 물질(色)의 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해체하여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제법의 고성을 철견하게 되고[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는 연기적인 현상임을[無我, anatt ]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빠사나는 철저한 분석과 해체를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화선자들은 분석과 해체 없는 무전제의 직관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고뇌해야 한다. 본무생사를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본무생사라고 단지 믿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봐야한다. 보는 것과 믿는 것은 그 성격이 판이하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 한국 간화선은 봄(見性)을 주장하면서도 '믿∼씁니다'라는 유일신교적 발상에 놀아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6. 아비담마와 위빠사나는 과연 아공법유(我空法有)에 빠져있는가
여기서 필자는 무아를 인무아와 법무아로 나누어 초기불교와 아비달마는 인무아를 설뿐 법무아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다분히 대승의 종파적 우월주의에 바탕한 대승 학자들의 논지는 좀처럼 동의할 수가 없다. 초기불교나 아비달마에서 인(人)은 이미 개념적 존재(빤�띠, 혹은 산냐)일뿐이라서 애초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남방 칠론에서는 《인시설론》이라는 작은 논서에서만 개념적 존재(빤�띠)를 다루고 있다. 초기불교와 아비달마에서의 무아는 모두 법무아이다.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오온 12처 18계의 무상고무아를 설하고 계시며 법구경에서도 제법무아를 강조하지 않는가. 온처계로 대표되는 제법을 설하는 궁극적 목적은 개념적 존재를 해체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법들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하려는 데 있으며 《청정도론》과 《구사론》의 수행편은 모두 제법의 찰라성과 연기성을 철견하여 몇 심찰나에 성자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개념적 존재들을 법들로 해체하여 설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법들의 무상성과 고성과 무아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특히 제법무아는 초기불교와 아비담마 체계 전체에 흐르는 기본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는 인무아를 설할 뿐 법무아를 설하지 못하니 소승이라는 잘못된 관점은 이제 극복되어야한다. 인무아니 법무아니 아공법유니 하는 주장명제들은 애초 아비달마의 정교한 교학체계를 부정하기 위한 대승에서 만들어낸 자의적인 발상일 뿐이지 아비담마에 적용되지 않는다.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너는 나쁜 놈'이라는 억지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간화선의 지향점은 견성이고 위빠사나는 해탈열반의 실현이다. 그러면 과연 이 둘은 다른 것인가? 견성이 도대체 무엇인가 특히 견성의 性이 무엇을 뜻하는가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으며 쉽게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주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견성과 초기불교와 위빠사나의 궁극적인 메시지인 열반을 직접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초는 있다고 본다.
초기불교에는 j n ti(알다) - passati(보다)의 구문이 도처에 나타나며 이것의 명사형인 a-dassana(知-見)로 많이 나타나며 이것은 중국에서 知見으로 정착이 되었다. 선종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술어이며 한국 수행자들도 즐겨 쓰는 용어이다.
한편 이것은 돈황본 《육조단경》의 識心見性에서 識(앎)과 見(견)의 문제와 합치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위빠사나도 분리해서(vi-) 본다(passan ), 해체해서 본다, 꿰뚫어 본다는 의미이며 견성의 견도 본다는 뜻이며 간화의 간도 볼 간자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와 남방 북방의 양 전통에서 봄(見)은 중요한 술어이다.
한편 초기불교에서 법을 보는 수행의 출발은 지금여기(現今, di he va dhamme)와 한길 몸뚱이(나)이다. 선가(禪家)에서도 지금여기(즉시현금)와 내 안에서를 강조한다. 이렇게 지금여기에서 나 자신 안에서 법을 봄으로 해서 법의 무상·고·무아에 사무치고 그렇게 하여 염오-이욕-해탈, 혹은 염오-이욕-소멸-고요-초월지-깨달음-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열반의 실현이요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도 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보는 것을 위빠사나라 한다는 것은 이미 밝혔다. 그리고 이 무상과 고와 무아는 해탈의 세 가지 관문(dv ra)이라고 주석서들에서 강조하고 있다. 법의 무상을 꿰뚫어 봄으로써 표상 없는(無相, animitta) 해탈을 성취한다고 하며 고를 꿰뚫어 봄으로서 원함 없는(無願, appa ihita) 해탈을 성취한다고 하며 법의 무아를 꿰뚫어 봄으로써 공한(su at ) 해탈을 성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 空·無相·無願은 대승경전에서도 강조되고 있는데 화엄경의 정행품 등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견성은 견법성이요 견법성은 법의 무상·고·무아인 세 가지 보편적인 특상을 보는 것이라고 초기불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혹은 대승의 성은 공성( yat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성은 다름 아닌 무아를 뜻하며 이는 연기의 이치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견성은 견공성이요 이는 견무아이며 이것이 바로 무아를 철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아는 것이라는 위빠사나와 같은 입장이다.
이처럼 이해해야 초기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한 성이 된다. 그렇지 않고 견성을 성이라는 그 무엇을 세우고 그것에 계합하려거나 그것을 깨치는 것쯤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비불교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많은 한국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당체를 건립하여 그것을 굳게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대아 진아 본성 자성 주인공 여래장 불성을 세워 그것을 철견하거나 그것과 하나되는 것으로 간화선 수행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세워서 그것을 철견하거나 합일하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무엇이든 깨달음의 당체를 세우는 한 외도적, 힌두교적 발상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수행자가 수행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은 그 어떤 타락보다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견성과 해탈을 초기불교적으로 이해하면 이 둘은 같은 현상의 다른 표현이다.
굳이 돈오냐 점오냐를 말하자면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 다 돈오이다. 이것이 초기불교와 남방의 주요저술을 나름대로 접해본 필자의 결론이다. 깨달음을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예류부터 아라한까지의 성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범부에서 성자가 되는 것은 즉각적이다. 《청정도론》에서는 3∼4심찰나에 성자가 된다고 하며 《구사론》에서는 부처님은 34찰나에 견도를 하였다고 하며 범부는 최소 162 혹은 178찰나가 걸린다한다.{{ 권오민 《아비달마 불교》(민족사, 2003) 244이하 참조.}} 《구사론》의 찰나가 75분의 1초이고 이를 토대로 남방의 심찰나는 75 16=1200분의 1초라고 한다면 이것은 즉각적이다. 그리고 한번 성자가 되면 결코 범부가 되지 않는다. 일득영득인 것이다.
만일 본자청정 본래부처 본무번뇌를 믿거나 이를 이해하는 정도로 돈오를 삼는다면 그것은 해오(解悟)일 뿐이라고 정통 선문(禪門)에서는 주장한다. 이것은 무사선의 아류일 뿐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를 강하게 비판하시는 이유는 일득영득의 거룩한 돈오를 단지 번뇌가 본래 없음을 이해하는 해오로 치부하여 다시 점수를 하거나 보임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견해를 척파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믿음-돈오-보임을 말하는 일부 선학자들의 주장은 정통 조사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설일 뿐이다.
물론 간화선이나 위빠사나에서 돈오하기 전에 혹은 성자의 계위를 실증하기 전에는 각고의 수행과정이 있다. 그래서 성철스님께서도 정중일여, 요중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의 관문을 설하고 계신다. 오매일여의 경지를 투타해야 그것이 돈오견성이요 그것이 구경각이라고 하신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7청정이나 10가지 위빠사나의 지혜 등 위빠사나의 여러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의 돈오의 논의에서 제외된다. 돈오의 논의의 핵심은 깨달음이 실현되는 바로 그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닦았던 몇 년, 몇 십 년 아니 몇 겁, 몇 백겁의 과정은 돈오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보자면 남북의 열반의 실현과 깨달음의 증득은 공히 즉각적이다. 깨달음은 일득영득이다. 그러면 깨닫고 나서는 무엇을 하는가? 깨달은 후는 보임이 아닌 수행불행을 하거나 팔정도를 구현한다.
그러나 돈오를 잘못 이해하여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정을 무시하려 드는 현금의 한국 수행풍토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실 우리 간화선 수행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과정이나 방법은 알려들지도 않고 오직 깨달으면 그뿐이라는 단편적인 사고에 빠져있다.
이것은 우리 불교가 돈오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많은 수행자들은 돈오를 한방으로 이해한다. 현실을 괴롭고 모순투성이지만 한방에 깨달으면 인생역전이 된다고 맹신한다. 한방에 깨달으면 즉시에 부처가 되어 만인의 존경과 찬탄을 받는다고 맹신한다. 한방에 인생역전이 되고 한방에 부처가 된다 이 얼마나 유쾌 통쾌 상쾌한가. 그러나 이런 것은 로또 한방에 인생역전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없이 '일자무식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지 않고도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 우리 선사들은 '즉심시불'을 '짚신세벌'로 잘못 알아듣고도 깨달았다고 지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하고 있으며 심지어 화두타파하여 도인이 되면 모르던 영어도 독일어도 범어도 모두 다 알게 된다고까지 설하기도 한다!
9.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함께할 수 없는가 - 위빠사나에서 배우자
몇몇 학자들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다른 전제와 다른 지역과 다른 문화전통에서 발전한 수행법이므로 섞어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며, 수행자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수행해야한다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섞일 수 없는 것인가? 화두에 대한 의정 때문에 출가를 결행하였고 10여년간 인도의 유학생활 중 간간히 위빠사나 코스에 참여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체험하기도 한 필자는 이 둘은 함께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서로 배울 점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아비담마와 위빠사나에서 전후제단 심행처멸의 의정을 일으키는 노둣돌을 만들어야 한다고 감히 적고 싶다. 간화선의 생명은 화두에 대한 의정이다.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는 간화선이야말로 무사선, 문자선, 묵조선일 뿐이다. 어떻게 의정을 일으킬 것인가가 간화선자의 생명이다.
《선문염송》이나 《전등록》 등에 나타나는 옛 스님들의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의정을 돈발하는 방법은 많다. 그런데 이러한 화두의 기연은 모두 중국적 전통에 바탕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중국적 전통은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판치생모,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좌 등의 참구명제는 이미 현대의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다. 만일 간화선의 방법론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명제들은 현대인들에게 재밋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근원적인 의정을 일으킬 수단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석이라는 취모검을 거머쥔 과학이라는 방법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판때기 이빨에 털 난 도리(판치생모)'라는 재밋거리보다는 물심의 분석의 끝에서 만나는 찰나(순간)와 조건(연기)이라는 번갯불보다 재빠르고 예리한 법과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이 더 큰 의정을 돈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치원부터 분석적 교육을 받고 자라 분석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물질적이거나 심리적인 현상들을 법들로 해체하여 찰나와 연기를 이해하고 보게 되면 의정은 한순간에 돈발할 수 있다고 본다.
개념적 현상들을 해체해 들어가면 법들을 만나고 법들은 찰라요 조건(연기)이라고 《청정도론》 18∼21장은 말한다. 법은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바로 지금 여기 이 찰나이다. 이것은 전후제단의 간화선의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과 대면하면 언어가 끊어지고 마음길이 비로소 멸할 수밖에 없다. 간화선자가 아비담마와 위빠사나를 이해할 때 그는 비로소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한 법에 대한 진정한 의정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감히 적는다.
그러면 위빠사나 행자들은 간화선을 통해서 배울 것이 없는가. 필자는 많다고 본다. 그러나 아직 한국 수행풍토에서 거론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되므로 생략한다.
불교는 2600여 년 전에 실존하셨던 고따마 붓다, 석가세존에 의해서 출발되었으며 그 분의 가르침은 빠알리어로 잘 보존 되어 있고 아함부 경전들로 중국에서 한역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처님의 직설은 불교 만대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다. 간화선을 하던 위빠사나를 하던 그런 수행법의 뿌리는 초기경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화선 전통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간화선의 뿌리를 초기경에서 찾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최상승이라는 미명아래 지금 우리가 주장하고 자행하는 간화선 수행방법이 초기경의 가르침과 위배될 때는 뒤 닦은 휴지 버리듯 과감히 버리고 시정하려는 자기점검과 자기비판을 처절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상승이라는 껍데기를 움켜쥐고 외도적, 힌두교적 수행을 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왜 간화선 수행자들은 중국선의 전통에만 머물려 하는가. 왜 육조 스님을 넘어서지 못하는가. 왜 중국불교의 산을 넘어서지 못하는가.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이미 비구·대처 분쟁의 암울했던 시대에 성철 스님께서는 백일법문을 통해서 초기불교에서 모든 불교와 선종의 근원을 찾으셨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와 위빠사나는 대승불교나 간화선의 반대편에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들은 대승불교 교학과 수행법의 뿌리이다.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같으며 이 둘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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