頓漸에 대한 書證 -禪門正路 에 대하여-
-香山-
돈점書證
1980년대 초에 故 성철종정 스님의《禪門正路》가 출간함에 따라 한국불교는 이른바 ‘돈점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도 불자로서 그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료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 글은 돈점논쟁에 관해서 생각했던 것을 나름대로 간략히 정리해 본 것이다. 아마도 90년대 후반이라고 생각된다.
1. 서론
열반하신 성철스님의 《禪門正路》로부터 야기된 ‘돈점논쟁’은 한 동안 불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것은 韓國禪의 정통성시비 문제로까지 비약되었고 지금까지도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이 《禪門正路》의 파장은 대단하여, 불교계가 성철스님을 信하는 쪽과 信하지 않는 쪽으로 양분되는 상황을 가져왔다.
전국 강원의 공통교육과목인 四集중의 하나인 《節要》를 頓悟漸修를 선양한 보조스님이 저술했다 하여 頓悟頓修의 본거지인 해인사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듯 돈점문제로 인하여 한국불교계는 상당한 사상적인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절대로 兩非論이나 兩是論이 아니다. 어느 한 견해가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돈오돈수의 견해를, 선문정로에서 정안종사로 내세웠던 분들의 語錄을 통해서 反證해 보고자 한다. 우선 육조단경에서 參請機緣편의 至誠 조에서 논한 ‘돈오돈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선지식이여,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점(頓漸)이 없건만 사람의 성품에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서, 미혹한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한꺼번에 닦는 것이다.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곧 차별이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돈점이라는 거짓 이름을 세운 것이다.
善知識 本來正敎 無有頓漸 人性 自有利鈍 迷人漸契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 所以 立頓漸之假名.
자성을 스스로 깨달아서 돈오돈수(頓悟頓修) 하므로 또한 점차가 없나니 이런 까닭에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법이 적멸할 뿐인데 어찌 차제(次第)가 있겠는가.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 不立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그러나 육조단경의 돈오돈수의 개념하고, 《선문정로》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의 개념하고는 같은 것이 아니다.
청량징관 스님의 《청량소》에는 頓修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頓修란 살피지도 않고 맑히지도 않으며 텅 비어 도에 합하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보조스님의 《절요》에는 頓修에 대해 청량징관스님이 사용하신 뜻과 규봉스님이 《선원제원집도서》에서 쓰신 뜻에 대해 해설하였다.
“--선원제원집에선 事智가 앞에 나타나 백천삼매를 원만히 얻는 것을 돈수라고 하는데 대해, 청량소에서는 理智가 앞에 나타나 일행삼매를 얻는 것을 돈수라 한다.”
《선문정로》의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오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육조단경의 頓修개념을 ‘事智가 앞에 나타나 백천삼매를 원만히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선문정로》에서는 ‘見性의 개념’을 열반경, 大智度論, 唯識論, 大乘起信論, 宗鏡錄 등에서 인용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經論에 나타난 ‘見性의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편향되게 한 부분만을 취한 데에 있다.
즉 경론에 나타난 견성은 理事가 구족한 究竟覺으로 佛果를 말한다. 경론에서 말하는 理事가 구족한 究竟覺이라는 것은 제 8아뢰아식이 永斷된, 大乘起信論에서 말한 細中細의 無明번뇌까지도 永斷되어, 一切種智와 6神通이 모두 갖추어진 그런 궁극적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선문정로》에서 見性하였다는 正眼宗師들 중에 누가 일체종지를 갖추었으며, 6신통을 구족하게 갖추었는가?
또 육조단경 참청기연편에도 ‘견성’에 대해 나오는데, 혜능스님이 지성스님에게 말씀한 내용이다.
“견성한 사람은 세워도 되고 안 세워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어, 쓰임에 응하여 따라 짓고 말에 응하여 따라 대답한다. 널리 化身을 나타내지만 자성을 떠나지 않으므로 곧 자재한 신통과 유희삼매를 얻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견성’ 이라 하느니라.”
見性之人 立亦得 不立亦得 去來自由 無滯無礙 應用隨作 應語隨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卽得自在神通 遊戱三昧 是名見性.
육조단경에서 ‘견성’을 이렇게 설명했는데, 과연 《선문정로》에서 말하는 정안종사들이 자재한 신통과 유희삼매를 갖추었는가?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 신통묘용’이라고 방거사가 얘기한 바 있지만, 그것은 이변지(理辯智) 분상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사변지(事辯智) 분상에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참청기연편의 ‘견성’은, 경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理事가 구족한 究竟覺으로 ‘견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문정로》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見性과 頓修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아래의 글은 《선문정로》에서 正眼宗師라 극구 칭찬한 조사들의 語錄 가운데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이 부분들은 선문정로의 견해가 바르지 못한 것임을 명백히 나타내주고 있다.
만약에 頓悟頓修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神通의 문제’는 오류가 있다고 인정하여, 《선문정로》에서 말하는 見性이란 <신통은 안 난다 하더라도, 無明의 미세번뇌와 習氣까지도 永斷된 것>이라 한다면 이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붓다고사의 《淸淨度論》에 보면 신통이란 禪定力에서도 나오고, 지혜에서도 나오고, 공덕에서도 나온다고 되어 있다. 무명의 미세번뇌와 습기가 永斷된 見性이라면 선정력과 신통이 자연히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선문정로》에서 禪門의 見性이 理事가 구족한 圓證이라 해 놓고 어찌 理 따로 事따로 일 수 있는가.
육조스님 밑에 제자들도 모두 육조스님과 같은 果位를 증득한 것이라면, 大悟한 후에 각지로 흩어져 중생구제를 해야 하건만, 무엇 때문에 남악회양선사는 大悟 후 십여년 동안 육조스님 회상에서 지냈으며, 小釋迦라 불리던 앙산은 위산 스님회상에서 그토록 오래 모시고 지냈겠는가. 이와 같은 예는 수도 없이 많다.
기록으로 살펴보면, 옛 스님들은 大悟하여 正眼宗師에게 印可를 받은 후 오랜 동안 保任을 했는데, 《선문정로》의 견해로는 그렇게 바르게 깨친 분들이 무엇 때문에 그 오랜 동안 保任을 한다는 것인가. 頓悟頓修를 주장하는 분들도 설마 이 保任이, 理를 갖추었으니 事를 갖추기 위해 즉 神通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증득한 佛性의 大寂光三昧를 즐긴다는 것인가. 禪定樂에 빠지는 것은 ‘보살의 죽음’이라고 극렬히 경계하신 경전의 말씀은 어찌된 것인가. 또한 전통적인 선종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런 견해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禪門正路》에서 정안종사라고 한 《宗鏡錄》의 저자인 永明延壽 선사는 다른 책 《萬善同歸集》에서 頓漸에 대해 논하였는데, 頓悟頓修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知解종사’라고 극력 매도하는 圭峰종밀선사의 《都序》의 내용을 전부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후에 일부 선종의 사람들이 규봉종밀선사를 知解종사라고 매도하는 바, 그렇다면 天台德韶 국사의 법제자이며 《宗鏡錄》의 저자인 永明스님도 그 아류란 말인가.
깨달음은 꼭 화두라는 것을 통해서만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五祖 弘忍스님은 금강경을 읽어 마음을 밝힐 것을 권하였고, 證道歌의 영가스님은 《유마경》을 읽다가 마음을 밝혔다.
이런데도 규봉스님이 《원각경》을 읽다 마음을 밝혔다하여, 또 선종이 아닌 화엄종의 5조라 하여 규봉스님의 깨달음을 알음알이라고 말하는 것은 宗派주의에 깊이 빠진 사람들의 잘못된 소견이다.
심지어 선종의 스님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효성사, 의상조사, 화엄종의 初祖 杜順조사, 천태종의 남악혜사선사, 천태지의스님 같은 대선지식의 깨달음을 알음알이, 혹은 선종의 정안종사라는 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지라고 단정내릴 수 있는지……. 진실로 바르지 못한 견해요, 뒤집혀진 견해이다.
돈오돈수는 돈오점수(돈오돈수포함)보다 말은 좋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正見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다.
2. 본론
이제 전등록이나 조사어록 가운데에서 <돈점>에 관계된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달마혈맥론(선문촬요중) p24
若擬修無作法 先須見性後 息慮緣 若不見性 得成佛道 無有是處
만일 작위없는 법을 닦으려 하거든 우선 성품을 본 뒤에 반연하는 생각을 쉴지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돈오돈수의 견해에서 보면, 성품을 보는 것과 반연하는 생각이 쉬는 것은 동시일 텐데 왜 후(後)라는 글자를 썼을까?
●(전등록 2)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p525-
(하택신회) : 먼저 頓을 말했다가 나중에 漸을 말하기도 하고, 먼저 漸을 말했다가 나중에 頓을 말하기도 하는데, 頓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아리송합니다.
(육조) : 법을 들을 때는 頓 가운데 漸이요, 법을 깨달을 때는 漸 가운데 頓이요, 수행을 할 때는 頓 가운데 漸이요, 果位를 증득할 때는 漸 가운데 頓이니 頓과 漸을 항상한 원인으로 삼으면 깨달을 때엔 아리송하지 않는다.
●마조록 -장경각- p64
<亮座主 문답>
……前略……
양좌주 : 마음이 강의할 수 없다면 허공이 강의를 합니까?
마조 : 오히려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다.
좌주가 뜻에 맞지 않아, 당강 나가며 섬돌에 내려서려다가 크게 깨닫고 다시 돌아와 절을 하니, 스님께서 말했다. [下堦大悟回來礼謝]
마조 :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엇하느냐.
양좌주가 일어나니, 등에 땀이 축축히 흘렀다. 밤낮으로 엿새 동안 스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다가 나중에 사뢰었다.
양좌주 : 이제 스님 곁을 떠나 스스로 수행할 길을 찾으려 하오니,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오래 오래 세상에 계시어 많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自看省路修行]
좌주가 본사로 돌아온 후 대중에게 고했다.
“내 일생동안의 공부를 앞지를 이가 아무도 없다고 여겼더니, 오늘 마조스님 앞에서 꾸지람을 받고는 미혹한 생각[妄情]이 몽땅 사라졌다.”
그리고는 학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서산으로 들어간 뒤에 아무 소식이 없었다.
▶양좌주가 마조스님께 참례하여 깨닫고 나서, 마조스님께 스스로 수행할 길을 찾으려 한다 하고 하직인사를 드린 것은 무슨 뜻일까?
양좌주의 깨달음은 어떠한 것일까?
양좌주가 돈오돈수의 究竟覺을 성취한 것이라면 왜 다시 수행하러 산으로 들어갔을까?
究竟覺이 아니고‘알음알이’로 깨달은 것이라면 그런 양좌주를 인가한 마조스님은 眼目이 없는 것이 되니 그것도 큰일이다.
●(전등록 1)-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p361
長沙景岑
皓月이라는 중이 스님에게 물었다.
(호월) ; 천하의 선지식들은 三德의 열반을 증득하셨습니까.
(경잠) ; 대덕은 果位 위의 열반을 묻는가, 原因 안의 열반을 묻는가.
(호월) ; 果位 위의 열반을 묻습니다.
(경잠) ; 그렇다면 천하의 선지식은 증득하지 못했다.
(호월) ; 어찌하여 증득하지 못했습니까.
(경잠) ; 功行이 성현들과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월) ; 功行이 성인들과 가지런하지 않으면 어찌 善知識이라 하겠습니까.
(경잠) ; 佛性을 분명히 보기만 해도 善知識이라 할 수 있다.
(호월) ; 그러면 공력이 어떤 도에 이르러야 큰 열반을 증득했다 합니까.
(경잠) ; 마하반야가 비춰주는
해탈의 깊은 법은
法身의 적멸한 본체이니
셋과 하나의 이치가 원만하다.
功行이 가지런할 곳을 알려는가.
그것이 항상 고요한 광명이다.
(전등록 1)-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p328
福州 大安선사
*대사가 百丈스님에게 물었다.
대안 ; 학인이 부처를 알고자 하는데 어느 것입니까.
백장 ; 흡사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 같구나.
대안 ; 안 뒤에는 어떠합니까.
백장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간 것 같다.
대안 ;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保任해야 합니까.
백장 ; 소 먹이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지켜보아 남의 곡식밭에 들지 않게 하는 것 같느니라.
(福州 大安선사) P329
……前略……
그대들이 부처를 이루고자 하면 다만 허다한 전도망상, 반연, 알음알이, 더러운 욕망 따위의 중생심이 없어지면 그대들이 처음 발심함과 동시에 부처임을 허락한다. 다시 어디에서 따로 찾겠는가. 그러므로 나도 潙山에 30년을 편안히 있으면서 潙山의 법을 먹고 潙山의 똥을 싸면서도 潙山의 禪을 배우지는 않고 다만 한 마리의 검정 암소를 지키되 풀밭에 침범하면 끌어냈는데 오래되니 신통한 놈이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 지금은 드러난 땅에 우뚝 선 흰 소로 변해서 항상 눈앞에 있다. 그리하여 훤하게 드러난 땅에 종일 서서 쫓아도 가지 않는다.
▶“潙山의 법을 먹고 潙山의 똥을 싸면서도 潙山의 禪을 배우지는 않는다”는 것은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大安스님은 백장스님과 위산스님께 참학한 후 백장스님의 법을 이은 분이다. 그런 분이「검정암소가 풀밭을 침범하지 못하게 지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돈오돈수의 견해라면, 깨닫는 그 즉시 검정소가 흰소로 변하여 자기 마음대로 부려야 될텐데 어찌된 일인지 …
●임제록 -장경각 출간-
p49 (이하 거의 모든 것이 장경각출간 조사어록의 페이지이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기만 한다면 선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되어서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그대들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묵은 습기와 5무간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큰 해탈바다가 되는 것이다.
儞且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 回換不得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 自爲解脫大海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것은 깨달은 사람의 경계인데, 돈오돈수의 견해에서 보면 깨달은 사람에게 무슨 습기가 있다는 말인가?
●潙山錄
P25(원문 P9) : 괄호안의 원문의 페이지 수
上堂
스님께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사람의 마음은 거짓없고 곧고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으며, 허망한 마음씨도 없어야 한다. 듣고 보는 모든 일상에 굽음이 없어야 하며, 그렇다고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옛부터 성인들은 단지 물든 세속사를 치유하는 측면에서 말씀하셨을 뿐이니 허다한 나쁜 지견과 망상 습기가 없으면, 맑고 고요한 가울물처럼 청정할 것이다. 맑고 잔잔하여 아무 할 일도 없고 막힐 것도 없으리니 그런 사람을 道人이라 부르기도 하고 일없는 사람[無事人]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단박 깨친 사람도 더 닦을 것이 있습니까?”
“참으로 근본을 체득한 이라면 닦는다느니 닦을 것이 없다느니 하는 것이 관점을 달리하는말[兩頭語]”임을 깨닫는 그 순간 스스로 안다. 지금 처음 발심한 사람이 인연따라 한 생각에 본래 이치를 깨달았으나 비롯함이 없는 여러 겁의 習氣를 당장 없애지는 못하므로 그것을 깨끗이 없애기 위해서는 현재의 업과 의식의 흐름을 다 없애야 하는데, 이것을 닦는다 하는 것이지 따로 닦게 하는 이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듣고 진리를 깨치는데 깊고 묘한 진리를 들으면 마음이 저절로 밝아져서 미혹한 경계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그렇긴 하나 백천가지의 묘한 이치로 세상을 휩쓴다 할지라도 나아가 자리 잡고 옷을 풀고 앉아서 스스로 살 꾀를 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실제 진리의 경지에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행을 닦는 가운데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만일 단도직입으로 깨달아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허망한 생각이 모두 녹아지면 참되고 항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理와 事가 둘이 아닌 如如한 부처이다.”
(有僧問頓悟之人更有修否 師云若眞悟得本他自知是脩與不脩是兩頭語 如今初心雖從緣得一念頓悟自理猶有無始曠劫習氣未能頓淨須敎渠淨除現業流識卽是脩也不可別有法敎渠脩行趣向 從聞入理聞理深妙心自圓明不居惑地縱有百千妙義抑揚當時比乃得坐披衣自解作活計始得 以要言之則實際理地不受一塵萬行門中不捨一法 若也單刀直入則凡聖情盡體路眞常理事不二卽如如佛)
●앙산록 -장경각- p201
28
완능의 道存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폐불 뒤에 다시 호남에 가셔서 위산스님을 뵈었을 때, 어떤 미묘한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내가 법난 뒤에 위산으로 갔더니, 어느날 위산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가 仰山에서 주지할 때나 설법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속여 홀리지나 않았는가?
--자기 眼目을 따를 따름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제방에서 온 납자에게 스승이 있는가, 스승이 없는가, 이론을 따지는 남자인가, 禪學의 宗門을 배우는 납자인가를 가려내는가, 나에게 말해보라.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제방에서 학인들이 와서 曹溪의 참 뜻을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저는 그에게 <大德은 어디서 왔는가>하고 물어 학인이, <제방의 老宿에게서 왔습니다>하면 제가 즉시 한 경계를 들어서 <제방의 노숙들도 이렇게 말하던가, 말하지 않던가>하고 묻습니다. 혹은 한 경계를 들어보이고는 말하되 <이것은 그만 두고 제방 노숙들의 뜻은 어떠하시던가> 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법칙인 경계와 지혜입니다.
--매우 좋은 말이다. 과연 예부터 전하는 종문의 기둥[牙爪]이로구나.
또 물으셨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묻되, 일체 중생은 다만 끝없는 업식일 뿐이라 의거할 근본이 없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갑자기 그 학인을 불러 그가 <녜> 하고 대답하게 하면 제가 <이것은 무엇인가>하고 묻겠습니다. 그가 모른다고 하면 저는 그에게 말하되 <너 역시 의거할 근본이 없을 뿐 아니라 업식이 망망한 사람이로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사자의 젖 한 방울과 당나귀의 젖 여섯 섬이 동시에 쏟아져 나와 흩어지는 경계로구나!
또 물으셨다.
--그대 주변에도 禪法을 배우는 衲子가 있는가?
--한두 사람이 있기는 하나 그저 얼굴 앞이거나 등 뒤일 뿐입니다.
--어찌하여 얼굴 앞이거나 등 뒤라 하는가
--남 앞에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면 마치 등 뒤와 같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비추어 밝히는 경계를 따져보면 業性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도 선법을 배우는 衲子가 있는가.
--위산에서 나온 지가 오래 되어서 있다 해도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물으셨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眼目이 潙山에도 있던가?
--있다 해도 여러 도반이나 사형사제들과 자세한 토론을 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大安은 어떤가.
--그를 모릅니다.
--從諗은 어떤가.
--그도 모르겠습니다.
--志和는 어떤가.
--그도 모르겠습니다.
--志遇는 어떤가.
--그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묻는 것을 그대는 모두 모른다 하니, 무슨 뜻인가?
--그들의 見解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行解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대는 무엇을 見解라 하는가?
--그들이 見解를 얻었음을 알고자 하신다함은 위에 열거한 다섯 사람이 뒷날 스님의 가르침을 받잡고 남의 스승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말해 주되 마치 병에서 물을 쏟는 것 같아서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니, 남의 스승이 된 이가 이러한 이유가 있으면 이를 견해라 합니다.
--무엇을 행해라 하는가.
--天眼通과 他心通을 갖추지 못하면 그가 작용하는 경지[照用處]를 알지 못합니다. 行解로 하여 맑고 흐림을 스스로 가리키는데, 그 業用과 성품이 意密에 속하므로 알지 못합니다. 마치 제가 강서에 있을 적에 전혀 참괴(慚愧)가 없었는데 그 때 스님에게 이런 저를 보시고 선법을 배우는 사람이냐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내가 사람들에게 그대는 禪을 모른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가?
--제가 무슨 개구리나 지렁이라고 선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대의 빛이거늘 누가 감히 그대를 막겠는가?
내가 다시 물었다.
--인도 27조인 반야다라가 선종에서 일어난 3천년 뒤의 일까지 미리 예언하셨는데 때가 되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답니다. 지금 스님에게서도 그렇습니까?
--이는 行通 쪽의 일인데 나는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나는 理通을 했을 뿐이며 배움도 역시 우리 종지만을 통하였으니, 그러므로 6神通을 갖추지 못했다.
……中略……
위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도 뒷날 사람들의 공부를 授記하겠는가?
--만일 수기를 한다면 見解만을 수기하고 行解는 수기하지 않겠습니다. 見解는 말[口密]에 속하고 行解는 마음에 속하는데, 曹溪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감히 남을 수기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수기하지 못하는가.
--이는 연등부처님 이전의 일로서 중생들의 行解에 속하는 일이라 인가할 길이 없습니다.
--연등 부처님의 뒷일이라면 수기하겠는가?
--연등 부처님의 뒤에는 또 인가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제가 수기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앙산--스님께서는 뜬 거품같은 마음[浮漚識]이 요즘 평안하신지요?
위산--나는 처음부터 5․6년을 경과했다.
앙산--그러시다면 스님께서는 전생에 이미 삼매의 정수리를 몽땅 뛰어넘으셨겠습니다.
위산--아니다.
앙산--성품자리에서 일어나는 뜬거품도 편안하셨거늘 연등부처님 이전에 어째서 그렇지 않았습니까?
위산--이치로는 그러하나 나는 아직 잘 保任하지 못했다.
앙산--어디가 스님이 잘 간직하지 못한 곳입니까.
위산--그대는 입으로만 해탈치 말라. 듣지 못했는가? 安선사와 神秀선사가 측천무후에게 시험을 받고 물에 들고서야 비로소 도가 높은 줄 알게 되었으니 이 경지에서는 무쇠부처라도 땀이 흐를 것이다. 그대는 용맹정진을 해야지 종일토록 입으로만 따지지 말아야 한다.
위산스님이 또 물으셨다.
―-그대는 三生 중에서 어느 생이 진짜라고 여기는지 말해보라
―-생각(想)이 나면 모습(相)이 납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담박해졌습니다만, 지금이야말로 번뇌의 흐름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지혜의 눈[智眼]은 아직 흐리다. 法眼의 힘을 얻지 못하나 사람이 어찌 내 뜬거품 속의 일을 알겠는가?
―-太和 3년(892)에 스님의 분부를 받들고 진리를 참구하여 實相의 성품과 實際의 妙理를 몽땅 究明하여 찰라간에 자기 성품의 맑고 흐림을 가려냈고, 이론과 行의 갈피가 분명해졌습니다. 이로부터는 이어받을 종지는 비록 행과 이치이지만 힘과 작용은 쉽사리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러한 경지를 얻으셨습니까? 얻지 못했다면 海印三昧로써 맞추어 보시면 앞에 배운 이와 뒤에 배울 이가 딴 길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의 眼目이 이미 그러하니, 인연따라 아무 곳에서나 수행하면 가는 곳 그대로가 출가한 것과 똑 같으리라.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분들이 明眼宗師라고 말하는 위산, 임제, 앙산 등의 큰스님들이 六神通이 나지 않은 것은 기록상으로 보면 명백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선문정로》에서는 경전을 인용해‘見性'의 개념을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하는‘견성’이란 아뢰야식의 극미세번뇌인 根本無明까지 永斷함은 물론, 육신통이 자재한 그런 견성이다.
어떤 개념을 인용할 때, 부분적으로만 인용하게 된다면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玄沙錄 : P231(원문 P299) -장경각 출간-
함통 11년(870) 설봉스님이 설봉산에 주지를 맡게 되자 스님은 부용산 동양동에 터를 골라 풀과 나무를 잘라내고 원숭이들을 길들여 그 곳에 홀로 살면서 오직 오묘한 도를 탐구하여 남은 무시습기를 아득히 잊어버렸다.
함통 13년(872) 다시 설봉산으로 올라가 일심으로 禪關을 잡아당기기를 희구하고 힘을 모아 鳥道를 개척했는데, 그 사이 밥먹을 여가마저 없었으나 저녁이 되어도 고단하다 하지 않았다.
<해제>
860년 부용산 弘照선사에게 출가
864년 開元寺 도현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부용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고 있던 중, 鼇山鎭에서 깨침
868년 부용산으로 돌아와 설봉스님을 만남.
870년 설봉스님이 상골산으로 옮겨 간후 현사스님도 이곳으로 가서(872) 총림건설에 참여.
※ 깨침을 얻은 시기가 함통7년(866)과 864년 두 가지 설이 있다. 어쨌든 깨침을 얻은 현사스님이 무엇 때문에 872년에 다시 설봉스님 회상으로 가서 그렇게 철저히 공부한 것인가? 전에 얻은 깨침은 알음알이에 불과하단 말인가?
●法眼錄 -장경각 출간-
종문십규론 序 p231
이치(理)로는 단박 깨친다 하겠으나 사실(事)로는 점진적으로 깨달아 가야 한다. (능엄경을 인용)
▶명안종사인 법안스님이 왜 이런 말씀을….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은, <종문십규론>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글은 교학승에게 하신 법문이 아니라, 수좌들에게 하신 법문이라는 것이다.
●萬善同歸集 -永明延壽선사-
<頓漸의 料簡>
1. 四料簡
問 : 대번에 自性을 깨친 上上根人도 도리어 萬行을 빌려서 道를 훈습해 닦아야 하는가
答 : 규봉선사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네가지 유형으로 간추렸다.
※이하는 《都序》의 내용과 같음. 보조스님의 《節要》는 《都序》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2. 따로 頓悟漸修를 나타냄
위에서 말한 네 구절은 모두 깨달아 증득함[證悟]을 주장하였거니와 여기서는 오직 단박에 깨닫고 점점 닦는 법[頓悟漸修]으로 깨달아 앎[解悟]을 드러내는 것이니 마치 해가 대번에 솟아오름에 산천의 이슬은 점점 녹아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엄경》에서도 설하기를 “처음 마음 발할 때에 문득 정각을 이루고 그런 후에 지위에 올라 차례로 닦아 證하는 것이니, 만일 깨닫지 않고 닦는다면 眞修라 하지 못한다”고 하시어 오직 돈오점수만을 佛乘에 합하여 圓旨를 어기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頓悟頓修라는 것도 실은 다겁생에 점점 닦은 것이 모여 금생에 와서 대번에 익은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當人이 그 때에 다달아 스스로 점검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실로 말하는 것이 행함과 같고 행하는 것이 말함과 같아, 量이 법계의 끝까지 다하며 마음이 허공의 이치에 낱낱이 합한다면, 드디어 八風에도 動하지 않고 三受가 寂然해서 種子(業因)와 現行(業果)이 함께 녹아지며 根本번뇌와 隨번뇌가 한 가지로 다하고 말 것이다.
만일 혹 自利만을 들어 말한다면 무엇하러 萬行의 수행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먹을 필요도 없거니와, 그러나 利他를 든다면 또한 폐할 수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스스로가 짓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이에게 권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경에서도 “스스로가 戒를 지녀야 남에게도 戒를 지니게 할 수 있으며, 스스로가 좌선을 하여야 남에게도 좌선을 권할 수 있다”고 한 것이며, 또 《대지도론》에도 이르기를, “마치 백 세의 늙은이가 춤을 추는 것은 兒孫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인 것과 같이 먼저는 곧 끌어당기는 듯하나 그 모두가 뒤에는 마침내 佛地에 들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혹 현행이 번뇌를 끊지 못하고 習氣 또한 농후하다면 눈에 닿는 것마다 情識을 내고 부딪치는 塵勞마다 걸림을 이루고 말 것이니, 비록 無生의 뜻을 요달하고는 있다 하나 그 힘이 충분치 못하다면 “내가 이미 번뇌성이 空寂함을 깨달아 마쳤다”고 고집해 말하지 못하리니, 이렇게 마음을 일으켜 닦는다면[有相心修] 도리어 顚倒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즉 번뇌성이 비록 空寂은 하지만 분명히 또한 업을 받으며 業果도 또한 性이 없지만 다시 苦因을 지으며, 고통이 비록 텅 빈 것이라 하나 실제로는 참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유하면 큰 병이 났을 때 병의 성품이 온전히 空한 것이라면 무엇하러 의사를 부르고 온갖 약을 복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말과 행실이 서로 어기면 그 虛實됨을 스스로가 증험할 것이니, 다만 스스로의 根力을 헤아려서 부디 교만하지 말며 생각을 살펴 그릇됨을 막아 마땅히 간절하고 자세하게 힘써야 할 것이다.
▶규봉선사가 정말 知解宗師라면, 천하의 正眼종사요 《宗鏡錄》의 저자인 영명연수 스님이 왜 규봉선사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했을까?
●圓悟心要 上 -장경각-
p119(원문 P118). 湧道者에게 주는 글. (이하 괄호안은 원문 페이지 수)
……前略……
그러므로 趙州스님은 “내가 남방에 삼십년 동안 있으면서 죽먹고 밥먹는 두 때는 제외하니, 두 때는 마음을 잡되게 쓴 곳이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曹山스님은 이 일 保任하는 것을 납자들에게 지도하기를 “독충이 사는 곳을 지나듯 물 한 방울조차 적시지 않아야만 한다”고 하였다.
(曹山指人 保任此事經蠱毒之鄕水也 不得沾他一滴始得)
p123(123) 實禪老에게 주는 글
……前略……
이미 종지를 체득한 뒤엔 면면히 지니고 계속 끊임이 없게 하여 聖胎를 길러야 한다. (旣得旨之後綿綿相續管帶令無間斷長養聖胎)
설사 나쁜 인연이나 경계를 만난다 해도 바른 지견에서 나오는 禪定의 힘으로 이를 원융하게 섭수하여 한덩어리[打成一片]를 이룬다면 생사의 큰 변고라 할지라도 움직이기엔 부족하다. 자기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길러가다 보면 함이 없고 하릴없는 큰 해탈인이 되는 것이니, 이 어찌 할 일을 끝내고 수행하는 일을 모두 마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깨달은 뒤에 聖胎를 길러야 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깨달으면 즉시 대해탈인이 되는 것인데, 왜 오래도록 聖胎를 길러야 나중에 대해탈인이 된다고 했는지…
p138(140) 昇禪人에게 주는 글
참선의 요점은 한결같은 데 있으니,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다만 본분을 지켜야 한다. 모름지기 발밑에 투철하게 깨달을 곳이 있으니 本來面目을 분명하게 보아서 本地風光을 밟아야만 한다. 애초부터 일상 행리처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속과 겉이 한결같아 자유롭게 생활한다. 특별난 짓을 하지 않고 보통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두고 배울 것이 끊겨 함이 없는 한가하고 고요한 도인이라 부른다.
이리하여 자신이 처한 곳에서 마음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니 설사 모든 하늘들이 꽃을 바치려 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엿보려 해도 보이질 않는다. 이것이 바로 소박 진실하며 착실한 자리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르다보면 세간법과 불법이 한덩어리 되어 구별없이 뒤섞여, 힘과 작용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養來養去日久歲深世法佛法打成一片混融無際力用現成透脫生死)
이 어찌 어려운 일이리오. 다만 깨달아 들어가는 곳이 진실로 합당하지 못할까만을 염려해야 한다.
p140(142) 民上人에게 주는 글
……前略……
요행히도 지금 나이가 있으니 잘 노력하여 생각생각에 목적을 향하고 마음마음에 변하지 않아 근본을 포착해내서, 한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앞뒤가 끊긴 경지에 도달하면 홀연히 깨달아, 마치 물통밑이 빠져버린 듯하여 그 기쁨이 생기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윽하고 깊숙함을 지극히 하여 本地風光을 밟고 本來面目을 분명하게 보아[蹋著本地風光 明見本來面目] 천하 老和尙들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는다.
눌러 앉아 꽉 붙들어 두고 無心, 無爲, 無事로 길러 나간다면 하루종일 결코 부질없이 보낸 공부가 되지는 않는다. 항상 마음이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걸음마다 일정한 처소가 없는 바로 이것이 일을 모두 마쳐버린 衲僧인 것이다. (坐得斷把得住以無心無爲無事養之二六時中 更無虛過底工夫 心心不觸物步步無處所 便是箇了事衲僧也)
명예를 도모하지 않고 이익에 구애받지 않으며 만 길 절벽에 서서 자유롭게 자기를 결판하고 생사문제를 투철하게 벗어난다. 그 나머지는 관계하지 않으며 聲色에 흔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 문득 홀로 벗어나니, 六塵을 진실로 벗어난 아라한이다. 간절히 믿고 실천해야 한다.
▶본래면목을 분명히 본 후에도 無心, 無爲, 無事로 聖胎를 길러나가면 헛된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돈오돈수의 견해로는 본래면목을 분명히 본 것이 究竟覺일 텐데, 무슨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p143(145) 心道者에게 주는 글
……前略……
그대로 앉은자리에서 천길 절벽에 선 듯하여 범부에 매이지 않고 성인에 끄달리지도 말아야만 비로소 일을 마친 납승이라 하리라. 몸과 마음이 썩은 기둥 같고, 불꺼진 차가운 재 같아야만 참으로 쉬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예로부터 생각을 잊고 홀로 체득함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다. 체득하고 난 뒤엔[旣得之後] 我見을 세우지 않고 자신을 뽐내지 않으면서 종횡으로 任運騰騰하여 바보같이 우두커니 앉은 사람 같아야만 비로소 함이 없고 하릴없는 道人의 행리처라 할 만하다. 설사 30년, 50년이 지난다 해도 변하지 않으며, 천생만겁에 이른다 해도 그저 如如할 뿐이다.
p160(165) 胡尙書에게 본성 깨치기를 권선하는 글
……前略……
그러므로 응당 허물을 살펴서 눈과 발이 서로 의지하듯 닦아나가야 합니다. 만약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뭇 착한 일을 알뜰하게 닦으면 5계 십선만 잘 지킨 사람일지라도 생사 윤회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먼저 밝고 묘한 眞心의 견고한 정체를 깨닫고 나서 힘에 따라 수행하는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하면서 남들도 인과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여 지옥과 천당의 원인이 모두 본래의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도록 해 줍니다. 꼭 이마음을 평등하게 지녀서 나와 남의 구별도 없고 사랑도 미움도 없으면 좋고 싫음도 없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아 차츰차츰 20년, 30년을 길러나가면 맞고 거슬리는 경계를 만나도 더 이상 물러남이 없게 됩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자연스럽고 태연하여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치(理)는 단박에 깨달으나 사실(事)은 점진적으로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所謂理須頓悟事要漸修)
▶앞에 나온 법안스님의 <종문십규론>의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세속에 사는 處士를 상대로 한 법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으나, 편견을 버리고 잘 살펴보면 이 구절의 뜻이 명백해질 것이다.
●圓悟心要 下
p33(24) 文德거사에게 주는 글
……前略……
그러나 본성을 보아 이치를 깨달으면 망정과 생각을 모두 버리고 가슴이 툭 트여서, 일체의 모습을 여의고 원융하게 사무쳐 텅 비게 통합니다.(然見性悟理情念俱捐胸廓然離一切相)
그런 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여 物我가 일여하여 삶과 죽음이 똑같고 부처와 중생이 평등합니다. 어묵동정에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서나 근원을 만나, 한 털 한 티끌이 모두 거두어들임이 됩니다. 그런 뒤에 매일 생활하는 가운데서 땅에 떡 버티고 앉은 사자와도 같은데 누구라서 감히 목전에 어리댈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하나의 모습[一相], 하나의 행동[一行]에서 徧行三昧를 얻으며, 근기와 기연을 이미 벗어버리고 나니 단번에 無心경계가 나타납니다.
실오라기 만한 생각이라도 나기만 하면 다 끊어야 비로소 향상인의 살림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옛날 큰스님들께서는 현묘한 도를 참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오묘한 마음을 먼저 깨닫고 나서 수행할 것 없는 수행을 하여, 깨달을 것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古老貴參玄之士 先悟妙心行無修之修 無證之證)
밖으로 달려 구할 것이 없고 그저 스스로 광채를 돌이켜 그대로 알아야 할 따름입니다.
▶‘닦는 바 없이 닦는다’는 것이 보조스님의 말씀이 아니라 正眼宗師들의 한결같은 말씀임은 자명한 일이다.
p40(31) 魏學士에게 드리는 글
……前略……
일생동안 있는 힘을 다해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려 해야 합니다. 만약 한 생각 뚜렷하게 깨치기만 하면 생각 생각에 수행하되 닦음없이 닦고 지음없이 지음으로써 연마하여 갑니다.
(所有一生力量正要透脫生死 若一念圓證 念念修行以無修而修 無作而作 煉磨將去)
▶보조스님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p124(129) 嚴, 殊 두 도인에게 주는 글
……前略……
옛 사람들은 생사문제를 크게 여겼다.
그래서 도를 찾고 스승을 찾아 결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말이나 배워 古人의 公案을 이해한 것으로 3백이고 5백이고 禪門答을 하면서 그것을 깨달음으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총명하고 교활한 지혜는 모두가 도를 장애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가만히 공적함을 두드려 심신을 놓아버려서 土木이나 기왓조각 같이 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업의 뿌리가 되는 씨[業根種子]를 번뜩 뒤집어 잘못임을 알고, 불법을 투철히 벗어나면 이것이 본분의 일을 체득한 것이다. 이는 작은 인연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구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놓아버리고, 걸머지지 않아야만 경솔하게 다치지 않는다. 상류(上流)들은 투철하면 투철할수록 더욱 낮추어 세밀하고, 高明하면 고명할수록 더욱 감추어서,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데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움직여도 먼지조차 일지 않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을 놀래키지 않아서 담담히 편안하고 한가로히 항상 恭敬을 행하야만 비로소 保任을 할 수 있으며, 맞고 안 맞는 모든 경계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뜻이 바뀌지 않는다. 달마스님은 이를 <一相삼매, 一行삼매>라고 하였다.
부디 푹 익도록 실천하라. 그리하여 古今의 作用과 機緣에 종횡으로 통달하여도 그것을 가슴에 남겨두지 말아야한다. 그저 無心하여 부딪치면 바로 변전(變轉)하고 누르면 바로 움직여, 얽매이지 않으면 수천만 사람 속에 있더라도 한사람도 없는 것과 같으리라. 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다시 마지막 한마디를 알아야 한다. 참구하라.
p125(130) 道明에게 주는 글
이 도는 지극히 현묘하고 깊다. 때문에 佛祖께서는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곧장 알아차려 見聞聲色의 표면을 뛰쳐나와 오롯이 계합하고 가만히 알 것을 요하셨으니, 그래서 이를 ‘敎外別傳’이라 한다. 그러나 깊이 체득하고 철저히 작용하며 알음알이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잘 단련하여 깨끗이 다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해도, 반드시 완전히 통달하여 잘 결택해 주는 선지식을 만나 깎이고 뽑히며 맹렬히 물어 뜯겨 실오라기를 끊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의 소굴을 없앨 수가 있는 것이다.
(然得之奧用之徹脫去理障 烹煆淨盡到極則之地 須遇大達善決擇之士 剔撥猛咬斷 糸戔 索 始能無佛無祖窠屈)
p151(159) 張持滿朝奉에게 드리는 글
……前略……
巖頭는 말하기를, “저들 체득한 사람들은 한가한 경지만을 지킬 뿐이니, 하루종일 욕구도 의지함도 없이 자연히 모든 삼매를 초월한다” 하였고, 덕산도 말하기를, “그대는 마음에 일삼을 바가 없도록만 하라. 마음에 일이 없으면 텅 비어 신령하고 고요하면서 관조한다. 가령 털끝만큼이라도 본말을 말하는 자는 모두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미 자명하다면 이제는 반드시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저 물러나기만 하면 되니, 물러날수록 더욱 밝아지며, 모를수록 더욱 역량이 생깁니다. 딴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 헤아리는 마음이 생기니, 매섭게 스스로 끊어버려 이어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관조가 환하여 걸음마다 실제를 밟게 되니, 거기에 어찌 높고 낮음, 사랑과 미움, 맞고 안 맞고가 있어서 가리고 택하고 하겠습니까.
무명의 습기가 일어나는 대로 녹여서 오래오래되면 저절로 사람을 시끄럽게 할 능력이 없어집니다. (無明習氣旋起旋消悠久間自無力能擾人也)
옛사람은 이를 소치는 일에 비유하였는데 참으로 그렇다 하겠습니다.
▶소치는 일이란 즉 牧牛行인데, 이것은‘체득한 사람들의 일’이라 하였다.
p155(163) 吳敎授에게 드리는 글
……前略……
一念이 萬念이며 萬念이 一念이어서, 삶을 찾아도 끝내 찾을 수 없는데, 어찌 죽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옛 큰스님들이 앉아 죽고, 서서 죽고, 가다 죽고, 거꾸로 서서 죽으면서 용맹 건장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평소에 덜고 또 덜어서 맑고 깨끗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香林은 사십년만에 한 덩어리를 이루었고, 湧泉은 사십년을 했어도 오히려 달아났습니다. 石霜은 사람들에게 옛사당의 향로처럼 푹 쉬라고 하였습니다. 또 永嘉는 말하기를 “體達한 즉 生이 없고, 근본을 了達한 즉 無常함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대개가 전전긍긍 오로지 이 생각만을 했기에 무애자재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생을 버리고 난 뒤에는 意生身을 얻어 자기가 가고자 마음먹는대로 가며, 후세의 과보를 모조리 이치로 떨어버려 業識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생사를 투철히 벗어났다> 하는 것입니다.
*意生身 : 업에 끄달려 태어난 業生身이 아니라, 자기 마음먹은 대로 태어나 몸을 받은 것.
●몽산법어(몽상화상시 총상인)
……前略……
일 마친 사람은 생사 언덕에서 머트러운 것을 바꾸어 미세하게 하며, 능히 짧은 것을 바꾸어 긴 것이 되게 하며, 지혜 광명 해탈로써 일체법을 낼 삼매왕을 얻으리니, 이 삼매를 쓰는 고로 意生身을 얻어서 향후에 능히 妙應身信身을 얻으리니, 도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깊으리라.
▶몽산스님은 고려불교와도 관계가 깊은 스님이다. 혹자는 몽산스님은 本分宗師가 아니라고 말하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이다.
● 山房夜話 -중봉-
p80
객승이 말했다.
--깨달은 뒤에도 실천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까?[悟心之後有履實踐否]
--이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대는 마음을 깨닫는다고 했는데,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찌 마음을 깨닫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깨달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니 마음이라 할 때에도 정작 마음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라 할 그 무엇이 없으므로, 有情, 無情을 모두 관찰한다 해도 관찰하는 주체가 그것들과 혼용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털끝만큼이라도 自他와 彼此의 구별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속박도 해탈도 없으며,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됩니다. 허망과 진실에서도 떠나고, 미혹과 깨달음 어느 것도 아닙니다. 일념이 평등하여 만 가지 법이 如如한데, 또 무슨 실천 수행할 일이 있겠습니까?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에 쌓인 無明의 미세한 染習이 아직 남아 있는데,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모두 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실천 수행이 없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情習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하면, 반드시 뚜렷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평생을 바쳐서라도 廓徹大悟하도록 해야 합니다. 혹 누가 다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실천 수행을 더 하여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마치 불쏘시게로 불을 끄려다 불길을 더 일어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부처님의 知見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부처님의 지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릴 수 있는 문제라면, 다스린다는 말부터 벌써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실천 수행할 것이 없다는 말씀인지요?
--이것은 미리부터 실천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스스로 미혹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니, 정신 차려 들으십시오.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여 깨달음이 밑바닥까지 도달하고, 그렇게 해서 번뇌를 훌쩍 벗어나야만 실천 수행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절로 알 수 있습니다.
●나옹집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p125
-----前略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정진하는 중에도 더욱 정진을 더하여 용맹하는 곳에서도 더욱 용맹을 가하면 갑자기 탁 터지어 백천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오.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20년이고 30년이고를 묻지 말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聖胎를 기르면 天龍이 그를 밀어내어 그는 누구 앞에서나 용감하게 큰 입을 열어 큰 말을 할 수 있고 금강권을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 하며, 가시덤불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며, 한 생각 사이에 시방세계를 삼키고 삼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오.
▶“갑자기 탁 터지어 백천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오.”
이것은 명백히 깨달음을 얘기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 이후 왜 20년, 30년간을 聖胎를 길러야만 한다는 것일까? 돈오돈수의 견해에서는 이 聖胎를 기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白雲화상집 -한글대장경- <백운화상 : 중국 임제종의 하무산 石屋淸共선사의 법제자>
P546
대중에게 훈시하시기를,
--옛날 사람들은 뜻을 얻은 뒤에는 깊은 산과 그윽한 골짜기로 가서 바위 위에 살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인간 세상을 모두 잊고 할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아주 쉬어, 바다가 변해 뽕밭이 되거나 토끼가 달리고 까마귀가 날거나 모두 그대로 맡겨두고, 그 해의 윤달이 든 것이나 그 달의 크고 작은 것도 알지 못하며 사철도 알지 못하는데, 8절후를 어찌 알겠는가.
다만 산이 푸르고 누래지는 것을 보고 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잠자며 추울때는 불쬐고 더울때는 서늘함을 찾으면서, 오늘도 하는 일 없이 자연에 맡기고 내일도 자연에 맡겨 하는 일이 없이 백천가지 추하고 졸렬한 그대로 세월을 보내면서, 그런 경계를 道의 마음이라 일컫고 또 기회를 잊어버리는 근본이라 하오.
▶“옛날 사람들은 뜻을 얻은 뒤에는… ”이 구절이‘깨달은 후에는’이란 뜻인 것은 명백하다. 나옹스님의 글과 같은 뜻이다.
p 547
대중에게 훈시하시기를,
--옛날 노장님네는 마음이 눈이 밝지 못하면 빨리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에게 나아가, 그것을 고치고 한번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그것을 보림(保任)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마치 三家의 촌사람 같아서, 완악하고 어리석게 오뚝이 앉아 이름을 잊고 세상을 버려 산속에 자취를 감추오. 혹은 20년이나 30년 동안 쌓인 분별을 없애고, 心識을 갈아 깨끗이 하되, 털끝만한 知見의 허물과 道는 해치는 일체의 좋지 못한 業을 없애오.
그리하여 고요한 곳에서 枯淡을 수행하여 이 마음과 이 몸이 견고한 法身이 된 뒤에는 경계와 반연을 만나더라도 빛깔이나 소리나 일체의 활동이나 동작을 모두 자기에게로 돌려 도를 깨친 과거 사람들의 행동과 둘도 없고 다르지도 않소.
▶“한번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이구절도 ‘깨닫는다’는 뜻이 명백하다. 白雲景閑 스님은, 임제종의 정맥인 석옥청공선사의 법을 이어 받은 분이다. 또 백운스님보다 약간 앞서 태고보우스님도 석옥청공선사에게 법을 받았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直指心體要節』의 저자이기도 하다.
3. 결론 - 나의 생각
《禪門正路》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頓悟頓修를 하지 않은 분들의 깨달음은 알음알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돈점문제는 결국 修證의 문제인데, 이 문제는 《아함경》에 나타난 修證문제의 구조와 같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즉 소위 말하는 소승四果의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를 증득해 가는 과정과 같지 않을까 한다. 물론 선종이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의 아라한과를 究竟이라고 절대 생각지 않지만, 필자는 그 修證의 구조만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려면 三法印, 四聖諦, 十二因緣法 등을 깨쳐야 한다. 有漏智가 아닌 無漏智에 의해 그 이치가 확연히 드러나야 한다. 無漏智란 물러서지 않는 지혜이므로, 한 번 수다원과를 증득하면 절대로 퇴타하지 않는다. 허나 수다원은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는 차등이 있다.
法을 깨닫는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은 번뇌, 남은 습기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즉 理致에 미혹해 생기는 번뇌인 有身見ㆍ常見ㆍ斷見 등은 단 번에 끊지만 오랜 동안 습기로 인해 생기는 煩惱障, 즉 색계나 무색계의 미세한 탐 진 치 같은 것은 단번에 끊지 못한다. (물론 거친 탐진치는 끊어지지만...)
이것은 아라한과를 증득해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끊어져서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 모두 끊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번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고, 수다원과나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했다 해서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이 알음알이로 깨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果位라고 하지도 못하고 不退轉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다.
선종의 돈점문제도 이와 같은 구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승四果에도 한번에, 즉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경우도 있고, 순차적으로 果位를 거치는 경우도 있다.
소승四果의 예에 비추어 《禪門正路》의 견해를 대비해 보자. 돈오돈수가 아니면 모두 알음알이라고 보는 것은, 아라한과가 아니면 모두 有漏智(알음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크게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돈점문제에 대한 淸凉국사, 규봉종밀선사, 보조스님, 서산스님, 경허스님의 견해가 선종의 전통적인 견해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돈오돈수의 이론이, 날카로운 知解를 가진 자가 禪旨가 어렴풋이 드러난 정도를 참된 깨달음이라고 확신하고 조실, 방장 노릇을 하는 세태에 대한 훌륭한 경책이 될 수는 있고, 또 일정부분 그런 공을 인정받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이 선종의 전통적인 견해가 아님과 동시에 바른 견해가 아님은 앞서 예로든 조사어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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