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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

slowdream 2007. 10. 20. 04:29
 

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다른 길, 같은 목적


김재성

metta@sutra.re.kr


서울대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동양철학 전공). 동경대 인도철학 불교학 석·박사 과정 수료. 현재 경전연구소 소장. 논문으로 <일본의 초기불교 및 남방 상좌부 불교 연구의 역사와 현황><청정도론의 찰나정 근행정〉<순관(純觀, suddha-vipassan )에 대하여-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역서로 《지금 이 순간 누가 깨어 있는가-우빤디다 스님의 가르침》《위빠사나 수행》등이 있다.



1. 들어가는 말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명상 또는 수행의 열풍이 불고 있다. 물질적 가치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삶의 질을 높여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살기(well-being)' 위한 현대인의 구도의 열기이리라. 이 글은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실제적인 수행과 그에 대한 교리적 근거를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현재 우리들이 접하는 대표적인 불교의 명상 수행법은 '간화선' '염불선' '위빠사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법들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에 의거하고 있다. 먼저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위빠사나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미얀마로부터 수입된 수행법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1904~1982)의 수행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인도의 고엔카 지(1924~ )의 수행법도 점차 알려지고 있다.


필자는 1991년 여름 안거를 미얀마의 판디타라마라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보낸 이후,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으며, 초기불전 및 부파불교의 논서를 연구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위빠사나의 교리적 근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마하시 방식이든 고엔카 방식이든, 위빠사나 수행의 교리적인 근거는 초기경전 가운데 《대념처경》(長部 22경)에서 제시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 자세하게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여러 가지 현상(法)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마음챙겨서(be mindful), 알아차리고(be aware) 관찰하는(observe) 것이다.


경험되는 모든 현상의 생멸을 마음챙겨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법이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이는 이론적인 이해(聞慧)나 사유해서 얻는 이해(思慧)가 아니라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서 얻는 이해(修慧)라고 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챙김(sati 또는 satipatthana) 수행이라고도 한다.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는 물질적/육체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의 진정한 본질인 끊임없이 변하고(無常),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苦),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無我)는 진리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이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의 원인인 탐진치 근본 번뇌를 지혜로 끊어버려,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을 이루는 것, 즉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 이는 초기불교와 그 해석으로 전개된 부파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는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단계의 선정(第四禪)이 있어야만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법의 한 방법이다. 위빠사나 수행(慧)은 선정 수행(定)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다시 말하면, 마음집중(定)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해하는 지혜(慧)는 생기지 않지만, 그 선정이 반드시 사선(四禪)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조준호 선생이 말하는 사선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에 대한 주장은 일부 초기경전을 이론적으로만 파악한 결과이며, 오히려 풍부한 위빠사나 수행의 길을 협소하게 만들어버리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2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


19세기 후반까지 미얀마 상좌불교의 전통에서 수행이란 일부의 수행승들에게 국한된 일이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승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은 민돈 왕(Mindon, 1814-1878, 재위 1853-1878)에 의해 왕궁에서 실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10년대를 지나면서 전문적인 수행센터가 설립되고,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에게까지 위빠사나 수행이 널리 실천되기 시작했다. 일반 승려는 물론 재가자들에게까지 위빠사나 수행의 보급된 것은 미얀마의 초대 수상 우 누의 역할이 컸다. 그의 주도하에 1940년대에서 50년대에 걸쳐 위빠사나 보급이 추진되었다.


우 누 수상은 우 트윈에 의해 설립된 불교협회(Buddha S sana Nuggaha Organization)의 창설 멤버이며, 특히 마하시 사야도를 초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얀마에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는 정부의 지원도 있었지만 반드시 정치적인 배경만으로 마하시 수행 센터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 센터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제자들의 힘에 의해서도 수행의 전통은 널리 보급되기 때문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교학과 수행의 덕이 마하시 수행법의 확산에 결정적인 요인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적어도 24 가지 이상의 유명한 위빠사나 수행법이 수많은 수행지도자에 의해서 수백 곳의 수행센터와 사원에서 지도되고 있다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이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는 세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로 과거에는 전문적인 소수의 수행승들이 숲 속의 수행처에서 수행을 했는데 비해, 현대의 위빠사나는 많은 수행자들이 잘 정비된 수행처에서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세기까지는 수행은 교학연구에 밝고 충분한 연령에 이른 승려들만의 특권이었는데 비해, 현대의 위빠사나 운동은 재가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이전에는 위빠사나 수행이 조직화되어 수행된 적이 없었는데 비해, 현대에는 모든 연령의 재가자, 승려 그리고 여성 출가 수행자(thila-shin)로 구성된 큰 그룹들을 대상으로 가르침이 행해지고 이들이 수행센터에 머물면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의 바탕에는 세 가지 불전(佛典)이 있다. 중도로서의 팔정도의 가르침이 설해진 《초전법륜경》, 구체적인 위빠사나 수행의 주제가 설해져 있는 《대념처경》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남방상좌불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주석문헌인 5세기 붓다고사가 지은 《청정도론》이었다. 이들 세 불전을 바탕으로 하여 위빠사나 수행은 경전에 근거를 두고 실천되었다.



3. 순간적인 마음집중에 의해서도 위빠사나 가능


마하시 수행법에서는 순간적으로 관찰대상에 마음이 집중된 상태(刹那定)에서도 마음의 다섯 가지 번뇌(五蓋; 욕망, 분노, 혼침, 들뜸, 의심)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에 깊은 단계의 선정을 이룰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마하시 스님의 주장이 아니라 상좌불교의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입장이며, 이는 북방의 설일체유부에서도 공통된 입장으로 확인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초선정에 이르지 못한 선정(未至定)에서 수다원의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대비파사론》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리불 존자와 목련 존자의 예를 들어 이 분들이 마승(馬勝, 부처님의 초전법륜의 대상이 된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의 간단한 게송만을 듣고 미지정에 의지해서 법의 눈이 열려 수다원의 깨달음(正性離生)을 이룰 수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대정장 27권, 485하21행 이하.}} 따라서 초기불교의 사상을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파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초선의 포함하는 사선을 미리 닦지 않아도 대상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할 때 깨달음의 체험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순수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가 의지하는 선정인 순간적인 마음집중은 《청정도론》과 주석문헌에서 나오는 찰나삼매(刹那三昧, kha ika-sam dhi)를 말한다.{{ 찰나삼매에 대해서는 [순관(純觀, suddha-vipassan )에 대하여- 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불교학연구》 4호, 255-281쪽)에 자세히 다루었고, 특히 273쪽 이하에서 이 개념이 팔리 주석문헌 전반에서 널리 사용된 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이 용어는 팔리 주석문헌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개념이지만,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은 초기불교시대부터 있었다고 위 논문에서 필자는 밝히고자 했다.}} 찰나 삼매에 대한 가장 많은 논의는 불교협회(Buddha S sana Nuggaha Organization)에서 편집한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 : 비판과 해답(Satipa h na Vipassan Meditation : Criticisms and Repli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하시 수행법(修行法)에 대한 비판과 응답으로 구성된 이 책은 스리랑카의 학승들의 비판과 미얀마 측의 답변이 제시되어 있어 찰나삼매에 근거한 마하시 수행법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집이다. 이 책에서 마음챙김을 통한 위빠사나 수행에 전념하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의 선정은 오직 찰나정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다.(32쪽) 그리고 《청정도론》과 그 주석서를 인용하면서 찰나삼매와 순수 위빠사나의 관계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법념처에 제시된 다섯 가지 덮개[五蓋]가 극복되어야 하는데, 근접삼매의 역할을 하는 찰나삼매{{ 근접삼매 가운데는 위빠사나 수행시 찰나삼매로 이용되는 것도 있음을 밝힌 논문으로 김재성 [《淸淨道論》における刹那定と近行定-Samathay naとVipassan y naの接點-] (《インド哲學佛敎學硏究》 3, 東京大學文學部インド哲學佛敎學硏究室, pp.3-16, 1995) 참조.}}에 의해서도 다섯 가지 덮개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바탕에는 찰나삼매가 있다는 이론적인 주장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청정의 단계를 통한 위빠사나 지혜의 향상([1965] The Progress of Insight through the Stages of Purification)》에서 선정을 의미하는 마음의 청정[心淸淨]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에게는 찰나삼매라고 정의하고 있다.{{ Mahasi [1965] The Progress of Insight through the Stages of Purification,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3rd. ed. p. 6.}} 《대념처경》 주석서{{ DN-a III, 773. tattha n p napabba , pa ik lamanasik rapabbanti im neva dve appan kamma h n ni, sivathik na pana d nav nupassan vasena vuttatt ses ni dv das pi upac rakamma h n n'ev ti. }}에서도 14 가지 신념처 가운데, (1)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入出息念]과 (4)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의 두 가지만이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는) 몰입정의 수행주제(appan kamma hanani)라고 하였고, 나머지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행동하는 것,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 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의) 12가지는 근접정의 수행주제(upac rakamma hanani)라고 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대념처경》의 신념처 가운데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행동하는 것,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을 수행주제로 하는 수행자의 선정은 찰나정이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찰나정에 의해서도 근접정과 마찬가지로 오개(五蓋)룰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주석서에서는 찰나정을 근접정으로 불렀으며, 찰나정을 이루게 하는 수행주제를 근접정의 수행주제(upac rakamma hanani)라고부른 것이라고 하며, 오개를 누를 수 있는 찰나정은 근접정과 마음의 청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한다.{{ Mahasi [1965] The Progress of Insight through the Stages of Purification,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3rdt. ed. p. 8.}}



4. 위빠사나는 교(敎)에 바탕을 둔 관찰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


실제로 많은 이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찾는 데에는 그 수행을 통해서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짧게는 7일에서 길게는 3달 혹은 1-2년을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마음의 안정과 지혜를 경험하고 실생활에서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행은 인경 스님이 선의 전통을 근거로 해서 말하는 전통적인 용어로 교(敎)라고 하기에는{{ 불교신문, 2014호, 2004년 3월 16일, 5면.}}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교(敎)라는 용어는 실천 수행의 전단계로 일차적으로 교리에 대한 이해를 말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위빠사나는 이론적인 교(敎)라기 보다는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智慧)이다. 즉, 모든 현상(諸行)이 무상과 고이며 무아임을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알고 보는 지혜이다.


이와 대비시켜 말하면 간화선은 일차적으로 화두라고 하는 의심을 일으키는 '언어적 개념'에 집중하는 '선(禪)'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와 간화선은 지혜와 선정으로 대비시켜 보는 것이 위빠사나와 간화선을 이해하는 데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간화선이 단지 화두에 집중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화두를 들고, 성성(星星)히 깨어있는 마음은 바로 지혜가 드러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혜는 깨어있는 마음을 회광반조하는 지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간화선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수행의 측면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 또는 心念處)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인도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에 대한 집중과 관찰을 부각시킨 수행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이해는 간화선과 여러 전통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초기불교 등의 교학에도 밝으신 홍원사(대방동)의 성오 스님이 지적하신 말씀이며, 필자도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성오 스님은 미얀마의 쉐우민 사야도의 말씀,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위빠사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간화선이 마음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법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하셨다.



5.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


간단히 말해서 불교 수행의 이익 또는 목적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인 열반의 성취에 있다. 고(苦)와 고(苦)의 멸(滅)만을 설한다고 하신 붓다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모습과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말씀이며,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은 《대념처경》에 ① 마음의 청정 - 번뇌의 제거, ② 슬픔과 근심의 극복, ③ 비탄의 극복, ④ 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⑤ 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⑥ 네 가지의 도(道)와 과(果)의 성취, ⑦ 열반의 성취라는 일곱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마지막 열반의 성취가 궁극적인 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익을 얻는데는 길게는 7년 내지는 짧게는 7일이 걸린다고 경전의 말미에 제시되어 있으며, 번뇌가 남아 있으면 불환(不還)의 깨달음을, 번뇌가 없으면 아라한의 완전한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대념처경》에는 마음챙김 수행을 닦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선정수행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산란하고, 졸음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상태에서 곧 바로 관찰과 마음챙김 수행을 닦아 마지막으로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는 이 수행법은 사색계선(四色界禪) 이나 사무색계선(四無色界禪)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을 거치지 않는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선정수행을 닦지 않고서 아라한이 되는 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팔리 주석문헌을 통해서 순관(純觀: suddha-vipassan )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탐진치의 소멸이라는 목적에 이르는 다양한 길


부처님이 지도하신 수행의 기법은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하다. 《중간길이의 가르침(中部)》 경전의 32경 <고싱가 대경>을 보면,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각자 이상적인 수행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씩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리불, 목련, 아누롯다, 레와타, 마하가섭, 아난 존자가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말하는데 모두 자신들이 걸어온 수행의 길을 근거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모두의 이야기를 인정해주고 부처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수행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경전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수행의 방법은 다양하며, 그 모든 방법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에 있다.


위빠사나가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전통 안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법이라면,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바탕 위에서 중국에서 피어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적으로 한 수행법이다. 견성성불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자성청정심의 의미, 대승불교의 불타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탐진치라는 번뇌가 소멸한 경지라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며 필자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는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법과 중국불교의 간화선이라고 하는 두 수행법을 통해서 우리는 탐진치라는 근본적인 번뇌의 소멸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통점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질곡인 탐진치라는 번뇌에서 벗어나, 최상의 행복인 열반의 경지라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수행법을 이해한다면, 문제는 우리 각자의 성향과 능력에 가장 적절한 길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방법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어느 것이 더 적합한가가 우선이 된다.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