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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은 시대착오인가?

slowdream 2007. 12. 17. 20:12
 

금욕은 시대착오인가?


일제강점기 불교 세속화에 대한 한국의 논쟁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함형석 옮김 punk98@korea.ac.kr / 고려대학교일반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1. 들어가면서


한국을 포함한 현대 불교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통스러운 논의들 중, 아마 그 어떤 것도 불교 수행에서의 성(性, sexuality)에 대한 논의보다 논란이 무성한 것은 없을 것이다. 불교는 항상 재가신도들이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인정해 왔던 반면, 대부분의 아시아 불교전통 속에서 전문 수행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금욕은 비구(比丘, bhik?u) 그리고 비구니(比丘尼, bhik?un?) 모두에게 첫 번째 바라이(波羅夷, p?r?jika)이며, 그것을 위반한 자는 적어도 승가로부터 격리(영원히 추방되지 않는다면)된다.


그러므로 금욕은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를 재가신자와 구분해 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나 불교가 제도화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는 부처가 비구와 비구니의 삶의 방식에 대해 제시한 - 금욕을 포함해서 - 규정들을 얼마나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고심하기 시작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를 들어 빨리(P?li)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parinibb?nasuttanta)에서 부처는 임종직전에, 승려들이 ‘중요하지 않고 부차적인 규율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그의 시종 아난(阿難, ?nanda)에게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러한 규율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라한(阿羅漢, arhat)들의 제 1차 결집에 촉매가 된 것은 부처의 입멸 이후 바로 몇몇 승단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느슨함(permissiveness)이었다.


이러한 느슨함은 부처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바드라(Subhadra)가 안도하는 말에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할 수 있게 되었어.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은 하지 않아도 돼.” - 여기서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것’이란 명확히 성교를 의미하고 있다. 부처의 사망 이후 한 세기 쯤 지나서 발생한 승가 조직의 첫 번째 분열 또한, 규율에 대한 엄격하지 않은 해석, 특히 발기족(跋耆族, V?jiputrika) 승려들이 금· 은을 받는 행위로부터 파생되었다.


승가의 규율에 대한 보수적인 독해와 좀 더 자유로운 해석 간의 긴장관계는 현대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논의가 ‘적합성(relevancy)’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어떻게 현대 세속 사회에서 불교와 같은 승가 기반의 종교를 매력적으로 만들까 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몇몇 개혁론자들은 심지어 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승려들의 혼인이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승려의 혼인을 찬성하는 불교도의 주장은 금욕적인 성직자의 사회적인 적합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려 노력하는 현대의 서구 몇몇 가톨릭(Catholic) 교도의 주장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불교의 사회적 적합성에 대한 관심과 금욕 생활을 버리는 것에 찬성하는 주장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불교 역사에서 급속한 근대화가 적극적으로 지지를 받았고, 그러한 근대화와 더불어, 불교 전통 내에서 승려의 혼인의 적합성이 검토되었던 시기를 다루고자 한다. 이는 1910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로 분류되는 시기이다. 당시 한국은 외부 세계로부터 문호 개방을 강요당하고 있었으며 처음으로 서양의 자유주의와 같은 비-중국적인 것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은 한국에 강한 충격을 주었고 불교계 내부로부터 상당한 자기반성(soul-searching)을 이끌어 내었다.(만약, ‘soul-searching’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불교적인 맥락에서 적절하다면 말이다.) 한국의 불교 승단 내 많은 지식인은, 불교가 급변하는 근대 산업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를 유지라도 하려면 이 새로운 영향에 자신들의 종교가 적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 금욕생활의 제도화를 포함한 - 불교의 여러 근본적인 요소들을 의문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에 대한 논쟁은 그 시대 불교 개혁 운동의 한 부분, 한 조각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큰 맥락 안에서 그 논쟁을 고찰할 때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운동을 어느 정도 자세히 탐구하는 것은 아시아의 승가 사회 중 하나가 금욕에 대한 가능한 대안들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정치적 위급상황이 결국 현대의 한국 사회로 하여금 승려의 혼인 가능성을 거부하게 만들었지만 금욕의 적합성 여부는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금욕의 문제는 또한 더욱 광범위한 의문을 제기한다: 승려와 재가신자 사이에는 과연 어떤 식의 관계가 적절한 것인가? 어떠한 가치가 승려의 삶과 재가신자의 삶을 구분하는 것인가? 재가신자가 승려들의 높은 종교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에는 어떠한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한국의 금욕에 대한 논쟁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 또한 언급될 것이다.


2. 불교는 전근대적인 한국에 속한다


불교는 고대와 중세에 걸쳐 오랫동안 한국에 국가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사실상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부터 불교는 사회적 · 기술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불교를 전파했던 자들은, 그들의 종교와 함께 중국의 문자 체계, 역법(曆法), 건축술 등을 포함한 전반적인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소개하였다. 불교의 정신적인 기술(technology) 또한 토착적인 샤머니즘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인해 불교는 중세 한국에서 종교-정치적 집단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통일 신라(668-935)와 고려(937-1392)시대 동안 불교는 실질적인 국가종교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불교는 왕실로부터 아낌없는 물적·정치적 지원을 받았으며, 그 대신에 부처와 보살들에게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산 속의 승가와 도시 지역의 절들로 이루어진 조직망을 가지고 국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불교는 전국 방방곡곡에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는, 불교 전통의 주요한 두 개의 분파-교학 중심의 교종(敎宗)과 수행 중심의 선종(禪宗)-의 본원은 모두 수도인 개성에 있었고, 수천 명의 승려들이 이 도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승단은 엄청난 넓이의 논과 산림을 하사받았고 이 지역은 승단에게 주어진 노예들에 의해 경작되었다. 또한 승단은 국수를 만들고 차를 재배하고 술을 제조하는 등의 상업적인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승단의 경제력은 매우 거대하여 고려의 경제를 심각하게 옥죄었고, 이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립되는데 한 몫 하였다.


멸망한 고려의 통치자들과 불교의 유착관계로 인해 불교는 조선왕조(1392-1910) 동안 유학자들의 박해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신-유학자(The Neo-Confucian) 출신인 조선의 통치자들은 불교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낡은 사상적인 분위기를 뒤엎었다. 고려시대에도 승단의 임무와 활동에 대해 상당한 제제가 이루어졌으나, 조선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엄격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승려들의 숫자를 엄격히 제한하였고(때때로 수계授戒가 완전히 금지되었다), 승려들은 대도시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수백 개의 사찰이 파괴되었고(태종의 통치기간(1401-1418)에는 사찰의 수가 242개까지 줄었다), 도시와 마을에 새로 절을 짓는 것이 금지되었다.


승가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절에 소속된 노예들은 정부에 의해 1406년에 몰수되었고 이는 많은 승단의 경제적인 생존능력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불교도가 휘두르던 막대한 힘을 이제는 유학자들이 행사하고 있었다. 불교는 실질적으로 시골에 격리되었고, 당시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지성적인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불교신도는 과거와 같이 교양 있는 도시의 남성 지식층이 아니라, 보통 무식한 시골의 농부들이나 여자들이었다. 산 속의 승가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승원의 교육을 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불교는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3.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불교에 가해진 억압


후기 조선 왕실에 대한 외국의 압박은 처음으로 이러한 상황에 실제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1897년 조선 국왕에게 일본인 고문이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910년 공식적으로 한국을 합병하여 정식화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 행사는 처음엔 불교에 이롭게 작용하였다. 일본은 무엇보다도 불교국가였으며 일본인 관리들은 소멸 직전인 한국 왕실에서 불교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일본인이 개입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수세기간 지속되던 승려들의 도성 출입에 대한 금지를 철폐한 것이다. 15세기부터 승려들은 도성을 출입하는 것이 주기적으로 제한되었으며, 1623년부터는 영구히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불교를 시골에 고립시켜 정치적인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최후에 이른 1895년에 와서야 이러한 조치가 철폐된 것이다. 고종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일본 니치렌쇼슈(日蓮正宗) 승려인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중재가 있었다. 사노는 한국불교가 극도로 약한데다가 승려들이 무식하고, 종교적인 사상 혹은 명상 기술에 대한 신념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무력한 상황을 고려할 때 사노는 한국의 승려들을 일본 불교 특히, 니치렌쇼슈로 개종 시키고 더 나아가 한국의 불교도들을 일본 불교의 이름으로 통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선의를 보여주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의 승려들이 승려의 도성 출입 제한조치를 철회하기 위한 사노의 노력을-비록 니치렌쇼슈를 받아들일 정도 까지는 아니었지만-열렬이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사노에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인지 계속 망설였고, 1904년이 되어서야 불교에 대한 모든 왕실의 통제를 멈추고 조선의 억불정책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사노의 경우가 보여주듯, 한국불교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호의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20세기 초반 일본의 한국 지배는 전통적인 한국의 세계관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의 불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일본불교 포교사들이 한국에 밀려들었고 그들은 한국 불교계의 상당부분을 잠식하였다. 몇몇 성공적인 일본 불교의 종파들의 경우 - 가령, 니치렌쇼슈, 조도신슈(淨土眞宗), 그리고 일본 정토진종의 오타니파(大谷派)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 그들 종파에 해당하는 한국의 종파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 불교 전통이 지닌 많은 근본적인 가르침과 수행을 의문시하였다.


아시아 역사상(중세 동남아시아의 경우를 제외하면) 고유의 뿌리 깊은 전통이 있는 불교국가가 다른 나라에 의해 식민화된 적은 거의 없었다. 정복한 나라가 피정복국에게 자신의 전통을 강요한 경우는 더욱 드물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대의 한국 승려들은 여전히 일제강점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영향들과 싸우고 있다.


일본이 자신들의 고유한 불교를 한국에 소개하려 했던 동기가 한국 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항상 사악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정부가 종교, 특히 불교를 일본의 메이지유신 당시 군부가 불교를 이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 정책의 도구로 간주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니치렌쇼슈 그리고 조도신슈와 같은 일본 불교 종파들의 포교사들은 한국에서의 개종활동을 허락받기 위해 로비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일본에서 추방된 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는데, 일본 식민정부는 민중들에게 사상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써 포교사들이 점차 그들의 포교 대상을 한국 사람들로 넓혀가는 것을 장려하였다. 한국의 고유한 승단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던, 한국불교를 어느 한 일본불교의 종파와 합병시키려는 시도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도들 중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악명이 높은 시도는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돈오’사상(subitism)과 가장 거리가 먼 ‘점오’ 사상(gradualist ideology)을 가진 선불교 종파인 일본 소토슈(曺洞宗)와 한국불교를 통합하려 했던 새로운 원종(圓宗)의 이회광(1840-1925)이 1910년 10월 체결한 협정이다. 이 합병은 곧 철회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는 일본불교가 한국불교에 행사한 새로운 정치적인 압박의 심각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시대 동안 지배적이었던 신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한 장기간의 억압 이후, 불교의 재건을 진지하게 걱정하였던 몇몇 일본 포교사들의 이타적인 행동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식민정부 역시 한국불교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간섭은 한일합방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는 1906년 11월, 메이지 유신 기간에 일본불교에 가해졌던 것과 비슷한 규제를 한국불교에 가하기 시작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공포하였다. 결국, 1911년 6월 3일 발령된 사찰령은 식민정부의 불교 사원에 대한 직접적인 감독을 제도화하였고, 1912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인가받은 30개(후일에는 31개)의 큰 사찰(本山) 주지들이 많은 소규모 절(末寺)을 관리하는 새로운 정부 규제의 중앙집권적인 방식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불교 전통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는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지속되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였다. 본산과 말사의 분류는 종종 작위적이었고 순전히 행정적인 편의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말사는 때때로 본산과는 다른 계통에 속해있었고, 어떤 경우 본사와 적대적인 경쟁관계에 놓여있었다. 또한 이러한 중앙집권적인 구조는 조직 내에서 권위주의와 부패를 양산하였다.


조선 왕조의 후반부에는 개개의 사찰이 그들의 주지와 소임들을 고르는 데 있어, 그들의 수행 일정을 정하는 데 있어, 그리고 재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거의 완전한 독립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결정권들이 이제 국가적인 차원에서 거부되게 되었으니 중앙집권화된 불교 행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가 생겨났다. 또한 이 시스템은 주지의 권력을 엄청나게 신장시켰는데, 어떤 경우에는 거의 독재자의 수준에 이르렀다. 유사한 중앙집권적인 행정 구조가 오늘날의 조계종 체제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유사한 종류의 긴장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4. 불교 근대화 운동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압력은 한국, 그리고 한국의 불교인들로 하여금 결국 더욱 외부의 힘에 대해 인식하게 해주었고 이는 한일합방으로 특징지어지는 몇 십 년간, 종교계 내부에 근대화 운동을 싹트게 하였다. 한국의 불교인들은 오랜 고립된 침체기에서 갑자기 깨어나 고통스러운 자기반성의 과정을 시작할 것을 강요받았다. 어떻게 그들의 전통이 지금의 절박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전의 영광을 되찾을 것인가? 세속화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거세어졌다. 만약 한국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방편(up?ya)이라는 불교의 교리를 적용하여 변화하는 현대의 상황에 맞추어 적응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 한국 불교인들의 개혁 운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좀 더 보수적인 운동으로 한국불교의 사상과 수행의 전통적인 형태를 복원하려 했다. 두 번째는 좀 더 진보적인 운동으로 현대적인 삶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 혁신적인 것들을 도입하려 했다.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들의 많은 부분, 특히 승려들의 혼인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일본불교와의 접촉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본식민정부가 그것과 유사한 개혁을 한국불교에 강요하려 했던 승려들에 대한 법령이 제정되자, 민족주의적인 자존심으로 인해 대부분의 그러한 조치들은 거부되었고 개혁안들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대신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완전히 보수적으로 돌아서서 승단 내 모든 진보적인 요소들을 뿌리 뽑으려 하였다. 일제와 동일시되어 버린 ‘세속적인’ 불교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고자 한국인들은 불교의 황금 시기라고 알려진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의 오래된 전통을 되살리려 했다.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몇몇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결국 삼일운동 이후 지배 세력이 되는 보수주의적 진영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 ‘자유주의적인’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toadyism)와 ‘보수주의적인’ 한국의 국가주의(nationalism) 사이의 균열은 현대까지 지속되는 심각한 긴장상태를 낳으면서 좁히기 어려워졌다.


5. 보수주의적인 개혁 운동


보수주의적인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승려 중 몇몇이 포함되어 있다. 경허(鏡虛, 1849~1912)는 간화선(혹은 공안선)의 수행 방식을 한국불교 수행에서 최고의 위치에 복원함으로써 고려 말 임제(臨濟) 스타일의 선(禪) 수행을 재창조하려 하였다. 백학명(白鶴鳴, 1867~1929)은 선(禪) 수행을 농사일과 더불어 행하여 시골 그리고 농업에 기반을 둔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백학명의 사상은 “일 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원시 선(禪)의 경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아마도 몰락한 유학자들의 학파인 실학(實學)파가 꿈꿨던 전원적인 유토피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적인 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히 가장 전통적인 인물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다. 해인사에서 화월(華月)선사의 지도하에 19세에 수계한 백용성은 선불교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세기 전환기의 한국 불교에서 우상파괴적인 인물들이었던 혜월(慧月), 만공(滿空)과 함께 수행하였다. 백용성은 나중에 살펴볼 한용운과 함께 1919년 삼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교도소에 있었던 일년 반 동안, 그는 많은 경전들(방대한 화엄경과 같은)을 대중들이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국의 고유한 글자인 한글로 번역하였다.


백용성은 아래에서 살펴 볼, 사찰을 도시로 옮기는 것과 같은 진보적인 인사들이 제안한 제도적인 개혁안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는 불교의 행정적인 측면을 개선하는 것은 불교의 제도를 강화시키는 데는 유용하겠지만, 그것이 불교 전반의 번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수행 전통(백용성에게는 간화선을 의미)을 되살리는 것만이 불교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종교 세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유일한 방법이며, 하나의 종교 세력으로써 불교를 재건해내지 못한다면 불교는 한국사회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용성은 승려들의 전통적인 금욕 생활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였다. 1926년 그는 조선총독부에 “범계생활금지(犯戒生活禁止)”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비구와 비구니의 전통을 계속 지켜나가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많은 수계의 강령을 정해 수차례 구족계(具足戒)를 전해주었다. 그의 이상적인 생활방식은 백학명의 경우와 같이, 선(禪) 수행과 농업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백운산에서 은거하며 이러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였는데 그곳에서 그와 그를 따르는 승려들은 10,000여 그루의 감나무와 밤나무를 재배하였다.


백용성은 불교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고 새로 유입된 서양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우위를 논증하는 수많은 소책자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백용성은 그가 서울에 거주할 당시 불교 포교당은 텅텅 비어 있었던 반면 기독교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개종시키는데 엄청난 성공을 이루어 낸 것을 목격하였다고 적고 있다. 불교의 목표와 기독교의 목표를 구분하는 수단으로 백용성은 불교를 ‘대각교(大覺敎)’로 개명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종교적인 깨달음이 불교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용성의 『귀원정종(歸源正宗)』은 불교를 유교, 도교, 그리고 기독교와 비교한 소책자였고, 중세 동아시아철학의 오래된 ‘세 가지 가르침’을 융합하는 현대적인 방식이었다. 유교는 완전한 도덕적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초월적인 가르침을 결여하고 있다고 백용성은 주장하였다. 도교는 도덕적인 가르침은 결여되었지만 초월적인 가르침을 절반 정도 이해하였다. 기독교는 천국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선한 행위들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불교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초월적인 가르침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 백용성은 오직 불교만이 도덕적인 가르침과 초월적인 가르침,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제시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보수적인 진영과 진보적인 진영을 이어 주었던 인물은, 개혁 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이다. 박한영은 한국에서 선(禪)만을 중시하는 태도, 즉, 대다수의 보수적인 지도자가 주장하던 태도를 비판하고 대신 고려시대부터 한국불교의 상징적인 접근방식인 선(禪)이라는 명상 수행과 교(敎)라는 교리의 학습, 이 두 가지 모두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전통적인 불교의 요소들을 통합한 것에 기반을 두어 불교도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서구의 문화적 가치를 도입하여 불교를 현대화시키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한영은 그 시대의 불교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삼국 시대는 팽창의 시기였으며, 고려 시대는 번영의 시기였고, 조선 시대는 쇠퇴의 시기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는 현대에 재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쇄신이 발생하려면 불교도의 개인적인 성품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1) 자만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로 광범위하게 공부할 것; 2) 게으름을 버리고 열정적으로 수행할 것; 3) 이기적인 행동을 버리고 남들에게 이득이 되는 행위를 할 것; 4) 인색함을 버리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자선활동을 할 것; 5) 자기만족을 버리고 항상 묻고 배우는 심성을 계발할 것.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다년간 불교중앙학림에서 강사로 근무하며 청년 불교인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6. 한용운과 진보적인 개혁가들


하지만 이후의 한국불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진보적인 개혁가들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과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4~1943)이다. 이들 두 사람의 작품에는 조선왕조의 쇠퇴에 따른 정치적인 소요로 말미암아 폭발한 에너지가 드러나 있다: 첫 번째는 1896~97에 발생한 동학(東學)운동이며 다음은 일본의 한국 강점이다.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 아래에서는 한용운을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한용운은 승려, 사회·종교 개혁가였으며, 유명한 시인(그는 한글로 된 최초의 근대시들 가운데 하나인 <님의 침묵>을 지었다)이었고, 영향력 있는 잡지 편집장 그리고 번역가였으며, 1919년에 발생한 독립운동인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십대 시절, 한용운은 19세기의 마지막 십 년간 서양의 영향을 한국사회로부터 몰아내고 한국 고유의 가치들을 복원하려 했던 동학운동에 참가하였다.


조선 고유의 전통에 대한 탐구는 한용운을 불교로 이끌었고, 1905년 그는 27살의 나이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수계(受戒)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개혁가 양계초(梁啓超)가 서양에 관해 쓴 저작들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1905~06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가서 시베리아와 유럽을 통해 미국을 여행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1908년 일본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불교가 현대의 기술문명과 조화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외국에서의 경험에 깊은 영향을 받아, 그는 조국의 불교전통이 타락한 상태라고 생각하였고-배우지 못하고,명상수행도 거의 하지 않고, 느슨하게 계율을 지키는-그 모습에 고민하던 그는 아시아가 지닌 정신적인 문명에 기초하면서 ‘현대적’·‘과학적’이라고 불리는 노선을 따라 발전해나갈 것을 한국불교에 호소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현대적인 모습의 불교를 표현해 내고자 한용운은 1910년,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불교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을 썼다. 한용운의 독창적인 저작,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서양의 자유주의가 한국적인 맥락 속에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시도들 중 하나이다. 한용운은 세상이 개선되고 있다고 보았는데, 꾸준한 발전 상황은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문명을 낳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개혁의 물결은 과학, 정치 그리고 종교분야를 휩쓸 것이고, 이러한 변화들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한국, 특히 한국불교는 뒤처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적인 전통에 묶여 있는 조국을 이러한 흐름의 최전방에 있는 역동적인 사회로 바꾸어야하는 것이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한용운은, 후일 노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는 나이 많은 승려들은 산속에 은둔하고 있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의식하지 못해도 젊은 승려들은 이를 자각하고 있으니 개혁을 시작하여 이루어 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승단의 감독을 받지 않는 젊은 불교도의 운동은, 그들의 연장자들을 경직시켰던 것과 같은 관습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 시기 한용운과 다른 개혁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비슷비슷한 젊은이들의 조직이 일제강점기에 창설되었다: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Buddhist Youth Association), 1922년 불교유신회(Buddhist Reformation Association), 그리고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General League of Buddhist Youth). 한용운의 분석으로 인해 보수적인 선배 승려들과 자유주의적인 후배 승려들 사이에 세대차이가 생겨났고, 이러한 차이는 현대 조계종 체제 내에서 다시 나타난다.


『조선불교유신론』의 「논불교지주의(論佛敎之主義)」에서 한용운은 모든 불교의 다양한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가 그것이다. 불교는 평등주의 이상에 기초하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불평등함은 실제로는 평등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평등에 대한 해석은, 그 안에 있는 각각의 사물이 다른 모든 사물을 생성하고 또한 반대로 그것들에 의해 생성된다는, 우주 내의 모든 현상 간의 방해받지 않은 관통(事事無碍)이라는 화엄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공생(共生)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망은 세계 평화와 개인·인종·국가·대륙 간의 전 우주적인 평등에 대한 불교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불교적인 평등의 개념은 자유와 보편주의(universialism)에 대한 현대 정치이론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한 개인이나 한 국가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국가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의지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주독립(self-determination)의 개념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평등주의는 진리의 요체인 반면, 이러한 진리는 “세상을 구제하겠다”라는 의도 하에서 작용한다. 한용운에 따르면 불교 사상의 두 번째 주요 범주인 이러한 구세주의는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해탈(Soteriology)이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는 반대로 모든 존재들 간의 상호의존 그리고 상호협력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불교의 커다란 자비심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불교의 현대화가 이 두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진행되는 한, 불교는 한국 고유의 문화에 기반을 두면서도 민주화와 같은 서양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원칙들이 불교와 한국 사회의 개혁에 유용하려면, 불교는 산에서 나와 도시와 마을에서 생활하는 일반 한국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강제로 산 속에 격리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세속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해 무지했고, 새로운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승려들은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았고, 무의식적으로 소심해져 있었다. 이러한 소심함은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경쟁적인 정신력을 무너뜨렸고 불교를 쇠퇴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러한 쇠퇴로 말미암아 승려들의 교학과 수행은 퇴보하였고, 이는 승가의 교육과 포교에서 승가의 유기적인 구성과 재정 관리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쳤다.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재가사회와의 유대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일체 중생의 구제를 향해 새로이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불교의 원리에 근거한 이와 같은 거대한 움직임은 사회를 민주화하는데 이바지할 것이고, 따라서 정부, 교육 그리고 종교와 같은 사회제도들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한용운은 불교의 오래된, 그리고 강요된 격리(isolation)의 악영향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불교사찰을 산 속에서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세 가지 다른 계획을 제안하였다. 첫 번째 계획은 몇몇 가장 중요한 산 중의 사찰들은 성지순례를 위한 장소로 남겨두고 나머지 사찰들은 지방의 도시와 마을들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계획은 규모가 큰 모든 사찰들은 그들이 본래 있던 장소에 있어도 되지만 규모가 작은 절들은 도시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계획은 조그만 암자, 혹은 절들은 없애고 근처의 사찰에 통합해야 하며, 통합된 사찰들은 근처의 마을에 포교당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승려와 재가신자 사이의 더욱 직접적인 접촉을 위해서는 한국의 불교 관습에도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였다. 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사회 요구의 대응에 무능력해졌지만 이러한 사실이 불교가 일반적인 한국인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목표는 개개인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불교가 포교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어야 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적합성(relevancy)에 대한 욕구는 두 가지 활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사람들이 더 쉽게 불교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불교의 예절과 경전들을 대중화하기. 둘째, 사찰의 의식들과 경제적인 자산 운용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기. 이 두 분야 모두 간소화(simplification)가 기준이었다. 아라한(阿羅漢, arhat), 연각(緣覺, pratyeka-buddha), 칠성(七星), 그리고 사천왕(四天王) 등을 포함한 한국의 절에서 숭배되고 있는 수 없이 나열된 신과 신격화된 존재들은 하나로, 석가모니 부처(the Buddha ??kyamuni)로 통일되어야 했다. 공식적인 행사들은 재가신자들이 더욱 쉽게 다가설 수 있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간소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대의 시장중심 경제체제에서 불교의 적합성에 대한 주요 장애는 재정적인 것이었다. 승려와 사찰이 재가신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국가자원의 낭비였던 것이다. 승려들은 과일이나 (비단을 만들기 위한) 뽕나무, 차 그리고 밤 등의 재배를 위한 사찰의 농업 조합을 형성하여 경제에도 일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만약 사찰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 두 가지 이득이 따를 것이다: 첫째, 임업 생산물과 다른 자연 자원들을 더 잘 사용하게 될 것이다; 둘째, 승려들의 생산성을 높여 궁극적으로는 전체 노동인구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또한 한용운은 사찰의 사업에서 나오는 수입을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해주는 기구를 제안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자선 사업이 승려들로 하여금,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그래 왔던 것처럼 사회의 기생충으로 남아 있게 하지 않으며 불교의 자비를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은 움직임이 도시지역에 유익한 불교도를 출현하게 하더라도 승려가 재가신자와 소통할 수 없다면 불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한용운은 한국에서 거둔 기독교 선교사의 성공을 보았고, 승려들 또한 포교에서 기독교와 같은 성공을 거두고 싶다면 현대문명에 친숙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승려들의 교육에 대한 방대한 개선이 필요하였다. 한문 공부를 강조하는 승단의 교육은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한용운은 교리 학습을 위해 새로운 교재들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교수 방법을 개선하였다. 그는 15세에서 40세 사이에 있는 승려들은 통일된, 그리고 전국적으로 공인된 교과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우선 승려들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지식에 통달하도록 과학, 기술, 그리고 국민윤리 등의 세속적인 주제들에 대해 배워야 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에 통달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불교와 관련된 학문들을 익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외국의 문물을 이해하고 지적인 한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유학을 가야한다. 이와 같이 넓은 범위의 지식을 가진 승려만이 현대적인, 즉, 본질적으로 불교적인 시각을 표현해낼 수 있는 진정으로 유능한 포교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교리 교육의 개혁과 더불어 선(禪) 수행에 대한 접근 역시 승려와 재가신자가 더욱 쉽게 배울 수 있고, 그들을 더욱 쉽게 가르칠 수 있도록, 표준화하고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선 수행 센터들은 너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들이 가르치는 수행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한용운은 가장 뛰어난 선사들이 지도하는 한 두 개의 큰 수행 장소를 개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승려들은 아직 행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루에 한 두 시간은 꼭 앉아서 명상을 해야 한다. 명상을 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절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떨어져 지내야하므로 전통적인 사찰의 수행과 많이 다른 이와 같은 방식을 시행하면, 승가 조직 내부의 행자와 구족계를 받은 승려 사이의 구분을 없앨 수 있어서 승가 내에서 평등주의적인 태도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용운은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는데 쓰인 염불당을 폐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염불당이 바로 무지하고 무식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그곳에서 고려시대부터 일상화 되었던 선 기반의 염불수행, 즉, 정토(淨土)가 그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한용운은, 마지막으로 전국에 걸쳐 두 부문으로 나뉜 불교 교육을 표준화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본부에서 강의를 위한 건물들과 선(禪) 센터들을 책임지고 관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용운의 재가와 출가 불교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명상 수행 중심의 선(禪)과 교리 학습 중심의 교(敎)를 조화시키려 했던 고려 중기의 사례를 이용하여 정당화되었다. 조선왕조 후기 선(禪)과 교(敎)는 관계가 소원해 졌고 한국불교 대부분의 보수적인 개혁가들은 선 쪽의 대표자들이었다. 오히려 한용운은 둘 다를 수행할 것을 강조하였고, 고려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불교 수행 두 분파 간의 공생 관계를 강조하였다. 한용운은 선(禪)은 수행자가 삶의 어려움들을 견뎌내게 해주며 궁극적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안정된, 집중하는,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계발해주며, 교(敎)는 다른 존재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자비심을 행동으로 내보이는데 필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며 지혜를 계발시킨다고 설명하였다. 한용운은 원효와 지눌이 사용했던 전통적인 비유를 인용하며, 선(禪)과 교(敎)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며 불교의 운명은 그 둘의 존재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7. 한용운의 ‘승려의 대처帶妻’ 요구


그러나 아마도 이 승려들과 재가신자들 간의 명확한 분열에 대해 한용운이 제시한 가장 급진적 해결책은 비구와 비구니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해주어야만 한다는 요구일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당연시 되던 승가의 금욕이라는 도덕적인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몇몇의 파격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한국 불교 승단은 항상 금욕의 실천을 기반에 두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도 승려들은 대부분 계속하여 금욕을 실천하였다. 승가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점차 느슨해진 것은 조선조의 후반기가 되어서야 발생한 일이다. 한국에 포교하러 왔던 일본의 승려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물질문명이 발달한 아시아의 불교국가들은 대부분 승려가 아내를 갖는 것을 허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처음으로 한국 승려들의 광범위한 혼인 사례가 보고되었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여전히 승려들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많은 승려들이 몰래 결혼하는 것은 한국인에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1912년 12월호에는 당시의 많은 승려가 승복을 입지도 않고 계율을 지키지도 않는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둘 다 승려의 혼인에 대한 조심스런 표현이다. 한용운은 나날이 증가하는 이러한 일상적인 사건들은 공개적으로 인정되어야만 하며 공식적으로 승단에서 혼인을 허용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된다면 결혼하고 싶은 승려들은 더 이상 금욕적인 체 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의 본업인 배우고 명상하고 가르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잠재적인 수모의 위험 없이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3월과 10월, 한용운은 중추원(中樞院) 그리고 통감부(統監府) 각각에 비구와 비구니가 배우자를 갖는 것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고 그 둘 모두에게 결혼할 자유(의무는 아님)를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승려들의 결혼을 지지하는 한용운의 주장은 상식, 불교의 교리, 그리고 결혼한 승려들이 사회·종교·정부에 가져올 이로운 점들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교 내부에서 금욕적인 승려와 결혼한 재가신자 사이에 사회적인 계층화가 일어나는 것은, 종교가 변화하는 현대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현대 가톨릭 개혁가들이 제안한 의견과 놀랄 만큼 유사한 이 논의에서 그는, 급격한 사회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요즘 시대에 금욕은 적당하지 않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여전히 계율을 정해놓고 있으므로 승단이 결혼을 허락하기만 한다면 많은 승려들은 환속하지 않고 승가에 남아 있을 것이며 이 시대에 뒤떨어진 제약이 철폐되지 않는 한, 5~6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승려의 인구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금욕에 대한 계율을 무시하면서 결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불필요한 죄의식만 야기하는 꼴이다.

승려들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계율을 지키도록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줄어드는 승려의 영향력은 사회와 종교계에서 더욱 약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불교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승려들이 혼인할 수 있게 되고, 태어날 때부터 불교도가 될 자녀들을 낳을 수 있다면, 불교는 타 종교와 더욱 잘 경쟁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의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것이다. 승려들의 혼인을 둘러싼 불교 내부의 갈등이 확대되어 정부의 심기도 불편해졌다. 만약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게 된다면 불교계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고, 새롭게 활기를 찾은 불교계의 영향을 받아 사회와 정부가 더욱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승려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이득 이외에도, ‘사사무애(事事無碍, the unimpeded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와 같은 한국불교의 기본적인 교의는 결혼과 같은 일상적인 인간의 행위가 해로운 것이며 따라서 금지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용운이 생각하기에 승려들이 금욕을 지켜야만 하는 주요 이유는 율(律, Vinaya)이 성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융(圓融)이라는 화엄의 중요한 교리는 이러한 제한에 대해 훌륭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었다: 참과 거짓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선과 악에는 그들만의 자성(自性)이 없기에 그러한 모든 극단들은 실제로 서로 뒤섞여 있다. 따라서 금욕과 결혼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며 그 중 어떤 하나가 승려의 수행에 꼭 최선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실질적으로 결혼은 승가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은 승려가 세속의 삶을 상세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오는 잠재적인 이득이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결혼은 반드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처는 본래 근기가 낮은 자들(한용운은 이러한 자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여전히 성적인 욕구에 집착하거나 사사무애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의 수준에 맞는 수행의 방편으로 결혼을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금지조항은 불교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던 신성한 특징은 아닌 것이다. 율(律, Vinaya)은 이 규칙이 20여년이 지나서야 제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매우 오래된 승단의 율이었기 때문에 승려들이 제멋대로 그것을 무시하고 결혼하기 시작할 수는 없었다. 정부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선언이 필요했다. 그러나 중추원(中樞院)과 통감부(統監府) 모두 한용운의 청원서에 응답하지 않았다.


식민정부에 거부당한 한용운은 그 대신 한국불교 승단의 지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변화를 받아들여 줄 것을 설득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내의 「불교의 장래와 승니의 결혼문제」라는 장에서 한용운은 승려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밝히고 왜 그러한 이유들이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지를 검토하여 그의 논점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되풀이하였다. 그는 승려의 혼인을 금지하는 것에 찬성하는 네 가지 주요 논의를 제시하고는 각각을 반박하였다.


1) 승려의 혼인은 윤리에 어긋난다(害於倫理). 한용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효성(孝誠)이 없는 것을 가장 큰 윤리적 죄악으로 여긴다. 금욕적인 승려는 가족의 대를 잇지 않음으로써 수백, 수천 세대의 조상들과 잠재적인 후손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은 이 부분에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불교를 반대하는데 종종 사용되었던 “금욕은 불효”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를 진보적인 불교도가 승단 내의 보수적인 집단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아닐 수 없다.


2) 승려의 혼인은 국가에 해가 된다(害於國家). 이에 대한 한용운의 입장은 조금 빈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느끼고 있었던 문화적·사회적 열등감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진 국가들(서양의 국가들을 말한다)은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또한 이는 빠른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서양의 자유주의적인 정치가들이 불교의 승려들은 결혼이 금지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놀라워하며 슬퍼하였다고 그는 말했다. 이러한 한용운의 입장은 특히, 1880년대 이후 서구와 같이 근대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한국사회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3) 승려의 혼인은 포교에 방해가 된다(害於布敎). 비록 불교도가 자신들의 종교를 전 세계에 포교하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결혼을 금지하고 잠재적인 개종자들이 가족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누가 불교로 개종하는데 관심이나 갖겠는가? 한용운은 설령 그들이 몇몇 사람들을 개종하는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개종한 자들은 결국 마지막에는 환속할 것이라고 하였다.


4) 승려의 혼인은 도덕적인 발전을 가로막는다(害於風化). 인간은 강한 식욕과 성욕을 가지고 있다. 사실, 물질적인 신체를 갖고 있는데도 그러한 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허풍쟁이이거나 거짓말쟁이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율을 지키느라 그들의 욕구를 억지로 억누르려고 노력한다면, 그 욕구들은 점점 강해지기만 할 것이고, 그들에게 엄청난 슬픔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행복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한용운이 말하기를, “고려왕조 이후 불교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승려들의 청정함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불교 전체를 망쳐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유학의 박해에 대응해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보수적인 불교도들의 대응방식이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낳았다고 진단하였다. 승려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지고 적합하지도 않은 계율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보다, 그들의 혼인을 허용할 때 도덕적인 개혁은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승려의 결혼을 지지하면서 모든 비구와 비구니가 배우자를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금욕에 헌신적인 자들에게는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혼이 자신의 종교생활을 발전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승려들 또한 허용되어야 한다. 결혼을 선택하는 승려들은 단순히 세속에 살면서 불교를 실천해온 여타의 보살들 그리고 정신적인 스승들의 전례를 따르는 것뿐이다. 한용운은 더 나아가 승려들이 자신의 종교에 열정적인 이상, 그들이 율에 있는 수많은 규칙들을 지키는 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은 중요한 결정들을 승려 스스로 내리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불교도들은 ‘개인적인 선택의 자유’라는 민주주의를 향한 길에 이르는 필수적인 자질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한용운의 청원서와 대처 요구는 처음에 승단 내부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1913년 3월, 삼십 본사(本寺) 주지들의 회의에서는 승려의 부인이 절에서 생활하는 것을 금하고 여성이 사찰에서 묵는 것을 금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의는 몇몇 승단 내 개혁가들의 세속화 요구와 대처승에 대한 식민정부의 지원으로 지켜지기 힘들었다. 십 년 사이에 독신 생활을 하는 승려는 소수가 되었다. 결국 주지들은 1926년 10월 식민정부의 압력에 못 이겨 결혼을 금지하는 제한을 철회하였다. 그 때부터 승려들은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있게 되었고(帶妻),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食肉). 그 후 삼년 사이에 80% 정도의 사찰에서 공식적으로 승려의 부인이 절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금지안을 철폐하였고, 이는 당시 전통적인 한국불교 시대의 끝 그리고 결혼한 승려(帶妻僧)와 독신 승려(比丘僧) 간의 새로운 분열의 시작이었다.


대처승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승가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가족이 있는 승려들은 확실한 수입원이 있어야만 했고, 이러한 현실은 승려들로 하여금 사적인 재산을 모으게 하거나 때로는 소득이 있는 직장을 구하게끔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승가의 공동재산을 줄이고, 직업 갖기를 거부했던 승려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이 전통적인 승가의 일, 즉, 교리 학습, 선 수행, 포교 등을 하는 데 쓰는 시간을 줄여 버렸다. 이는 일제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도 편리하였는데, 결혼한 승려는 그들의 식구와 직장에 얽매여 있어서, 독신 승려와 같이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선동하거나 스파이 활동을 할 위험이 적었기 때문이다.


8. 현대 한국 승단에 주는 의미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한국불교에 일으킨 명백한 문제들이 무엇이던 간에, 일제는 수세기 동안 조선조 유학자들의 학대를 받았던 불교전통에 자극을 주었던 것이 확실하다. 일본은 분명히 한국불교를 동정하였고 특히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일제의 도움은 불교가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자존심이라는 감정을 되살렸으며 불교에 자부심을 갖는데 일조하였다. 일본 승려들과의 접촉은 한국인들에게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고, 불교를 변화하는 현대의 삶에 어떻게 적합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한 창조적인 생각들을 불교전통 내에 일으켜 주었다. 적어도 활발한 일본불교의 전통에 노출되었던 것은 한국인들에게 불교와 현대적인 것은 같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한일합방 이후 한국불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함으로써 일제는 한용운과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 막 시작된 개혁 운동을 점차 쇠퇴시켰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단의 진보 세력이 제시하는 개혁안은 대개 메이지 시기 일어났던 일본의 발전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안들은 일제 식민정부의 뒤이은 종교 정책들과 매우 흡사하였다. 따라서 승려들의 결혼에 대한 것과 같은 진보적인 개혁안들은 교묘한 일제의 정책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한국불교는 승단 내 보수주의적인 세력이 장악함에 따라 자율적인 진보적 개혁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 때부터 변화의 초점은 불교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총독에 의해 시행되는 개혁들은 전통을 뿌리 뽑으려는 일제의 핑계로 비춰졌다. 많은 승려들이 느끼기에 한국불교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고유한 전통 - 과거의 저명한 한국의 고승, 그리고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고려의 교리 학습과 선 수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내에서 새롭게 활력을 얻은 한국불교를 전개하기 위한 자료들을 찾는 것이었다. 승단 내 보수주의적인 세력의 승리는 확실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정화운동은 한국불교에서, 가장 심각한 사례라고 생각되는 대처승을 포함한 모든 일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조계종은 독신 승려들로 구성된 보수적인 단체였고 이는, 실패한 일제 식민정책의 유물이라고 간주된 훨씬 규모가 작은 대처승들로 구성된 태고종과 대비되었다. 태고종을 누르고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조계종의 지도자들은 근래 승단 내 자유주의적인 젊은 세력의, 세속화에 대한 요구를 포함한 발언들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다.


최근 조계종은 점점 커져가는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의 불화로 인해 분열되었고, 이와 같은 불화는 현대 승단 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남아 있다. 나이가 많이 든 종단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혁들이 가져온 상당한 아픔을 기억하고 있으며, 수십 년간 그 개혁 조치들과 싸워왔다. 이들은 결국 일제의 잔재를 몰아내는데, 그리고 대처승들로부터 승단의 권력을 되찾는데 성공하였고, 이들 원로 승려들은 출가한지 얼마 안 되어 역사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생각되는 젊은 승려들이 제기하는 진보적인 의견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우리는 일제 강점의 잔재가 현대 한국불교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승려의 결혼은 결국 한국의 불교인 자신이 독립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 식민정부가 그들에게 강요한 정책이었고, 따라서 민족주의적인 한국불교도의 거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물러가고 나서, 금욕적인 생활은 다시 대부분의 한국 승가에 복원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에는 한용운과, 다른 진보적인 개혁가들이 처음 승려들의 결혼을 주장하면서 제시한 많은 원인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불교 관습의 적합성이 계속 의문시 되는 한, 우리는 금욕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한국불교 승단 내에서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