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난 과연 신선한가

slowdream 2007. 12. 25. 00:43
 

[경향포럼]난 과연 신선한가


권혁란 / 전 이프편집장


 


 

새 노래를 발표한 가수에게, 새 영화에 출연한 배우에게, 새 소설을 써낸 작가에게 우리를 대신해 누군가가 질문한다. 소위 인터뷰란 것인데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진지한 것이든 우스갯소리로 끝날 질문이든 서로가 서로의 질문과 답변의 신선도를 체크한다는 것. 체크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질문의 신선도가 떨어지면 응답자는 답변을 거부하거나 비웃고, 또한 답변이 판에 박은 듯 진부하거나 솔직하지 않으면 질문자가 가차 없이 재답변을 요구한다.


-“지겹다” 남탓하며 보낸 한해-


신선하지 못한 것을 대놓고 비웃을 수 있다는 것, ‘내 알고 지 알고 하늘, 땅이 다 아는 것’을 감춘 포장을 확 벗겨버리면 피차 한 순간에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좀 두려운 느낌도 든다. 그래서 자문자답 해보게 된다. 반성을 겸해. 나란 존재는 과연 새롭고 신선한가. 똑같은 질문과 대답만을 무한재생반복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오래 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라는 소설 제목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세상에,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라고 또박또박 이를 갈 듯 대상을 향해 말할 수 있다니.


한해 동안 “아, 진부해. 전혀 신선하지 않아”와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지겨워”란 말을 셀 수 없이 내뱉으며 살았다는 것을 세밑에 깨달았다. 새로 나오는 영화도, 책도, 노래들도 그 밥에 그 나물 같았고 관계에서의 소통불능도 새롭지 않았고 날마다 부딪치는 사람도 한량없이 지겨웠다. 참으로 지치지도 않고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서만 그 말을 내뱉었다는 자각의 와중에 드는 오랜만의 신선한 자각 하나. 제일 신선하지 않고 가장 진부하고 참을 수 없이 지겨운 것은 딱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어느 책에선가 “우리는 하나도 새롭지 않은 똑같은 얼굴로, 더럽고 냄새나는 입을 벌려 떠들면서 타인에게 새롭게 달라진 나를 보아달라고 천연덕스럽게 들이민다”는 무안한 글을 읽었었다. 아, 정녕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니가 지겹다”고 말하는 ‘나’에게 하품이 나온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너에게 그러지 않았잖아? 그 동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보답을 이따위로 할 수 있는 거지? 난 잘못한 거 없어. 모두 다 너의 탓이야”라고 지치지도 않고 남 탓을 하는 나.


“너의 나르시시즘과 너의 몰인정함, 너의 이기주의적인 태도, 그 안하무인의 가치관에는 아주 신물이 나. 단 한 번만이라도 남의 입장에 먼저 서보지 그래? 더 이상 너를 견뎌줄 의향이 없어”라며 다그치는 나. 이런 ‘나’의 행태를 보고 겪은 사람들은 얼마나 지겨웠을까.


-달라진 것 없는 나를 반성하다-


게다가 ‘나’는 매번 이런 글들에 꼭 밑줄을 긋고 홈페이지에 써서 올리고 술자리에서 소리 높여 감동을 과시하며 말했었다. 배수아의 ‘독학자’에 나오는 글이다(책을 다 읽지도 않았다).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개인의 자유라는 문제에서 좀처럼 놓여나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지키려고 하다니. 너는 네 자유를 지키려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채 사방을 노려보는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느라 지하 감옥의 죄수보다 조금도 더 자유롭지 못하는구나.”

 

이제는 내 주제를 알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린지도 몇 해나 지났는데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나에게, 나는 질린다.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