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27. 대혜 (大慧) 선사

slowdream 2008. 1. 4. 04:27
 

27. 대혜 (大慧) 선사



 禪師는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의 사람이니 성(姓)은 해(奚)씨였다. 어머니의 꿈에 신인(神人)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얼굴은 검고 코는 오뚝하였다. 침실에 이르렀기에 그 스님의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하였다. 잠을 깨고 보니 태기가 있어,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 찬란한 빛이 방을 비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기이하게 여기었다. 이 해[年]가 곧 南宋의 哲宗 원우사년(元祐四年) 기사십일월십일사시(己巳十一月 十一巳시)에 태어났다.


스님[師]의 휘(諱)는 종고(宗杲)이니 나이 십이세에 향교(鄕校)에 입학하여 같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벼루를 던지고 놀면서 잘못 선생의 모자를 맞히고 일금(一金) 三百으로 보상(補償)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세간의 서적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궁구(窮究)하는 것과 같겠는가? 라고 하였다


十六세에 동산혜운원혜제대사(東山惠雲院惠齊大師)를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十七세에 머리를 깎아 具足戒를 받고 十九세에 諸方으로 行脚하다가 태평주의 은적암(隱寂庵)에 이르러니 암주(庵主)가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가람(伽藍)을 보살피는 신장(神將)이 부촉(咐囑)하여 이르되 ‘다음날 운봉열선사(雲峰悅禪師)께서 이 절에 오신다’고 하더니, 그대가 맞지!" 하고는 곧 열선사의 語錄을 그에게 보였더니, 스님이 한번 보고는 암송(暗誦)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운봉스님의 後身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조동(曺洞)의 스님들을 뵈옵고 그 종지(宗旨)를 얻었으나 스님께서는 오히려 만족하지 않고, 휘종(徽宗) 대관삼년기축(大觀三年己丑)에 잠당무준(湛堂無準) 화상을 뵈옵고 七年 동안 시봉하고는 큰 깨우침이 있었으나, 잠당이 臨終할 때에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를 지시하면서 대사(大事)를 꼭 성취하라”고 하였으므로, 스님께서 선화사년임인(宣和四年壬寅)에 원오선사를 뵙고자 하였으나, 때에 선사께서 멀리 장산(蔣山)에 계시었기 때문에 잠시 太平寺의 평보융(平普融)스님의 회하(會下)에 의지하였다.


 선화칠년을사(宣和七年乙巳)에 원오극근선사를 변경(汴京)의 天寧寺에서 뵈옵고 겨우 사십일이 지났는데, 하루는  원오선사께서 개당(開堂)하여, 이르시되

「어떤 승이 雲門에게 묻기를 “어느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신 곳입니까? 운문이 대답하기를 동산(東山)이 물 위를 감이니라”고 하였지만, 천녕(天寧:원오의 자칭)은 곧 그렇지 아니함이니 오직 그를 향하여 말하되 “따뜻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처마 끝에 시원한 바람이 생하느니라"」고 하니,

스님께서 그 법문을 듣고는 홀연히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거늘, 원오선사께서 택목당(擇木堂)에 머물게 하여 侍者 소임도 맡기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保任케 하더니 후에 원오선사의 방[室] 가운데에서 어떤 승이 묻기를

“있다는 글귀와 없다는 글귀가 마치 덩굴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께서 드디어 묻기를

“듣자오니 和尙께서 당시에 오조(五祖:法演禪師)와 함께 있을 때에 일찍이 이 말을 질문했었다고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원오선사가 웃으시면서 대답하지 않거늘, 스님께서 이르되

“화상께서는 이미 대중들의 물음에 대답하셨거늘, 지금 다시 말씀한들 무슨 방해로움이있겠습니까?"

원오선사가 마지못하여 이르시되

“내가 오조에게 묻되 ‘있다는 글귀와  없다는 글귀가 마치 덩굴이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뜻이 어떠함이닛고?’하였더니, 오조(五祖)가 이르시되 ‘그림으로 그리려하나 또한 그려서 이룰 수 없고 채색하려 해도 채색해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묻되‘나무가 쓰러지고 덩굴이 마를 때에는 어떻습니까? 하니, 오조께서 이르되 ‘서로 따라서 오도다’고 하였다"고 하시니,

 스님 (대혜)이 바로 그 자리에서 활연(豁然)히 크게 깨닫고 이르되

“제가 알았습니다”하자,

원오선사께서 몇 가지 인연을 들어서 그를 시험하여 물었으나, 모두 대답하여 막힘이 없거늘, 원오선사가 기뻐하면서 이르되

“내가 너를 속이지 않았다”고 하시며,

이에 임제(臨濟)의 정종기(正宗記)를 지어주면서 記室을 맡기거늘 스님께서 이에 원오(圓悟)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오선사께서 촉(蜀)으로 돌아가거늘 스님께서 곧 자취를 감추고 토굴에 기거하면서 결제(結制)하시었다. 뒤에 여름을 虎丘寺에서 보내면서 화엄경(華嚴經)을 열람(閱覽)하다가 제칠지보살(第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곳에 이르러 홀연히 잠당(湛堂)이 보인 바의 앙굴마라(央掘摩羅)가 바루를 지니고 산부(産歸)를 구했다고하는 인연을 명확하게 밝히었다.


 소흥칠년(紹興七年)에 천자의 부탁으로 雙徑寺에 거주하였는데, 하루는 원오선사의 부음(計音)이 이르렀거늘, 스님께서 몸소 글을 지으시고 제(祭)에 나아가니, 곧 저녁의 소참(小叅) 법문에

「어떤 스님이 장사(長沙)에게 묻되“ 南泉이 천화(遷化)함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갔습니까?" 長沙선사가 이르되 “동쪽 마을에서 나귀가 되고 서쪽 마을에서 말이 되도다” 승이 말하기를 “무슨 뜻입니까?" 하니, 장사선사가 이르되 “말을 타려면 곧장 타고 내리려면 바로 내려라”고 하였지만, 만약 경산(徑山:대혜의 별칭)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 어떤 승이 묻되 “원오선사께서 천화(遷化)함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갔습니까?"하면, 곧 그를 향하여 말하되 “대아비지옥을 향하였느니라”“어떤 뜻입니까”하면, 말하기를 “배고프면 구릿물[洋鋼]을 먹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시니라”고 하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구제할 수 없습니까?" 하면, 대답하여 말하되 “구(救)할 사람이 없도다. 무엇 때문에 구하고자 하나 구할 수 없는가?   이 늙은이가 평상시에 차(茶) 마시고 밥 먹는 도리이니라." 」


십일년 오월에 간사(奸邪)한 재상 진회(奏檜)가 스님을 장구성(張九城)과 무리[牌黨]를 짓는다고 모함하여 진회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의복과 계첩(戒牒)을 빼앗고 형주(衡州)에 십오년 동안 귀양보내니, 이십육년 십월에 칙명에 의하여 매양(梅陽)으로 옮겼다가 얼마 있지 않아 그 형복(形服)을 회복하고 석방되어 십일월(十一月)에 阿育王寺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십팔년에 임금이 스님으로 하여금 徑山寺에 머물면서 원오선사의 종지(宗旨)를 크게 펼쳐주었으면 하는 뜻을 보이므로 그로 인하여 도법(道法)의 번창함이 그 당시에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또한 대중들도 이 천(二千)명이 넘었다.

신사(辛巳)년 봄에 주지의 소임을 놓고 明月堂에 기거(寄居)함이러니, 이듬해 임오(壬午:高宗三十二年)에 임금이 大慧禪師라고 직접 號를 하사하셨다. 효종(孝宗)의 융흥원년계미(隆興元年癸未)에 명월당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한 별똥이 아주 밝은 빛을 내면서 경산사의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대중들이 보았다. 스님께서 그로 인하여 몸이 조금 불편함을 보이다가 팔월 구일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튿날 가겠다”하더니, 그날 저녁 네다섯 시쯤[五鼓]에 유표(遺表)를 손수 쓰시고 아울러 뒷일을 부탁하니, 요현(了賢)이라고 하는 승이 게(偈)를 청한데 스님께서 특별히 쓰시어 말씀하시되 “삶 또한 그렇고 죽음 또한 그렇거늘 게가 있고 게가 없는 것이 이 무슨 뜨거운 열기인가?"하시고 태연하게 입적하시니, 세상의 나이는 칠십 다섯이요, 법랍[坐夏]은 오십 여덟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익호(謚號)를 普覺이라 하고 탑호(塔號)를 普光이라고 하사하시었다. 지금은 살아 계실 때의 호와 입적하선 후의 시호(諡號)를 들어서 大慧普覺이라고 한 것은, 남악양화상(南岳讓和尙)의 호가 또한 대혜이기 때문에 그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팔십 권의 어록(語錄)이 대장경을 따라서 유행(流行)하고, 그의 법을 이은 사람들이 팔십삼 인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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