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자장대덕 (慈藏大德)
(1) 부처님께 빌어서 낳은 아이
자장대덕(慈藏大德)은 김씨로 본디 진한의 진골인 소판(蘇判)-3급의 작명-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에 삼보에 귀심(歸心)하여 천부관음보살(千部觀音菩薩)에게 나아가서 한 자식 낳게 해주기를 축원했다.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로 말미암아 태기가 있었다. 낳으니 석가세존과 생일이 같았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정신과 마음이 슬기로우며 문장의 구상이 날로 풍부해졌으나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양친을 일찍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꺼려 처자식을 버리고 전원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만들었다. 홀로 깊숙하고 험준한 곳에 있으면서 이리나 범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는데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작은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 막고 그속에 알몸으로 앉아 움직이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고,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혼미한 정신을 없앴다.
(2) 재상 자리를 사양한 자장
때마침 조정에서 재상자리가 비어 자장이 문별(門閥)로서 물망에 올라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명령하였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더라도, 백 년 동안을 계율을 어기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이 위에 들리니 왕은 그의 출가함을 허락했다.
이에 여러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 사니 아무도 양식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실을 물어다가 바쳤으므로 손으로 받아 먹었다. 갑자기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므로 그제야 비로소 산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의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3) 자장이 당나라에 가다
자장은 변방인 신라에서 자란 것을 스스로 탄식하여, 중국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敎化)를 구했다. 인평(仁平)3년 병신 -곧 정관 10년이다 -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인 중 실(實)등 10여명과 함께 서쪽 당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을 찾아갔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이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장(工匠)을 데리고 와서 조각한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니, 꿈에 소상이 이마를 만지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는데 깨어나서 궁리해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중이 와서 해석해주면서 -이미「황룡사탑」에 나왔다 -말했다.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하더라도 이 글보다 나은 것은 없소"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그에게 주고 사라졌다-자장공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庸增傳)」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자장은 이미 만수대성의 기별(記莂)을 받았음을 알고 이에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다다랐다.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은 칙사를 보내어 위무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있게 했으며 은총으로 내리신 물건도 매우 많았다.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글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낭떠러지에 들어가서 바위를 건너질러 방을 만들었다. 3년을 살았는데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았고 영검이 날로 많아졌는데, 말이 번거로워 기록하지 않는다. 조금 후에 다시 서울에 들어가니 또 칙사의 위로를 받고 명주 2백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4)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오다
정관 17년 계묘(643)에 신라의 선덕여왕이 글을 올려 돌려보내 줄 것을 청했다. 당나라 황제는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명주 한 벌과 여러 가지 비단 5백 단(端)을 내려주었으며, 동궁(東宮)도 2백 단을 내려주고 또 예물도 주는 것이 많았다. 자장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대장경」 한 부와 모든 번당(幡幢) . 화개(花蓋)에 이르기까지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이것을 모두 실었다.
그가 돌아오자 온 나라가 환영했다.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 -「당전」에는 왕분사(王芬寺)라 씌어 있다-에 살게 했는데 급여와 시위(恃衛)는 많고 극진했다. 어느 해 여름에 궁중으로 청해와서「대승론(大乘論)」을 강의하게하고, 또 황룡사에서 이레 동안 밤낮으로「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연하게 했더니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끼어 강당을 덮었으므로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에 탄복했다.
(5)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불교를 주관하다
조정에서 의논했다. “불교가 동방에 들어와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그 주지(住持) 수봉(修奉)하는 규범이 없으니 통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이 의논을 위에 아뢰니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승니(增尼)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했다-살펴보면 이렇다. 북제(北齊)의 천보 연간에는 전국에 10통을 두었는데 유사가 ”마땅히 직위를 분별해야 될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이에 문선제(文宣帝)는 법상법상(法上法師)를 대통(大統)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통통(通統)으로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增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같은 명칭이 있었는데,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속해 있었으니 소현소는 곧 승니를 거느리는 관명이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이 나올 만큼 성했고, 신라 진흥왕 11년 경오에는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한 사람뿐이었고 또 소서성(小書省)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었다. 이듬해 신미년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으로 삼았는데 또한 사주(寺主)라고도 했고 보량법사(寶良法師)를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았는데 한 사람이었으며 주통 아홉 명과 군통(那統) 열여덟 명 등을 두었다. 자장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 한 명을 두었는데, 이는 상시로 두는 관직은 아니었다. 마치 부례랑(夫禮郞)이 대각선이 되고, 김유신 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이름하고 대사(大舍)한명과 사(史) 두 명을 사(司)로 삼아 중 가운데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시에는 바꾸었는데, 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는 또한 율종을 구별한 것이다.「향전(獅傳)」에 자장이 당나라에 갔는데 태종이 율사를 맞이하여 식건전(式乾殿)에 와서『화엄경』 을 강하게 했더니 하늘에서 단이슬이 내렸으므로 비로소 국사(國師)로 삼았다 함은 그릇된 말이다.「당전」 과 「국사(國師)」 에 모두 그 명문이 없다.
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아가서 불법을 널리 퍼뜨렸다. 승니의 5부에 각기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반 달마다 계율을 풀이했으며, 겨울과 봄에는 모아 시험해서 지계(持械)와 범계(犯械)를 알게 했으며, 관원을 두어 이를 유지하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지방의 사찰을 차례로 검사하여 승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히 정비하여 일정한 법식으로 삼았으므로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함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마치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아 아(雅)와 송(頌)이 각기 그 마땅함을 얻음과 같았다.
(6) 통도사를 짓고 불교를 크게 바로잡다.
이 때에 나라 안의 사람들로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집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중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불어갔다.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세우고 계단(械檀)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을 받아들였다-계단의 사실은 이미 위에 나왔다. 또 자기가 태어난 집을 원녕사로 고치고 낙성회를 베풀어 「잡화(雜花)」만 게송을 강(講)하니 52류의 여인이 감동하여 현신(現身)하여 들었다. 문인(門人)에게 나무를 그 수효만큼 심게 하여 그 이상스런 자취를 나타내게 하고 그 나무 이름을 지식수(知識樹)라 했다.
자장은 일찍이 우리나라의 복식이 중국과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했더니 윤허하여 좋다고 했다. 이에 진덕여왕 3년 기유(649)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을 입게 되고 다음해 경술(650)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중국에 조빙(朝聘)할 때마다 그 반열(班列)이 번국(蕃國)의 윗자리에 있었으니 이는 자장의 공로이다.
(7) 신비에 찬 자장의 만년
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부-지금의 명주(溟州)다-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다. 다시 이상한 중을 꿈꾸었는데 그 모습이 북대에서 본 중과 같았다. 그가 와서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만나겠다."
놀라 일어나 일찍 나가서 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와 있음을 감응하여 법요(法要)를 물으니 답했다.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
마침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송정에는 지금도 가시 나무가 나지 않고 매와 새매 등속이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이 태백산에서 그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待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이른바 갈반지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문수대성 文珠大聖이 내려오시기를 기다렸다. 이에 어떤 늙은 거사가 남루한 방포(方袍)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시자는 말했다.
“내가 좌우에서 시종(待從)한 후로 아직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미친 말을 하느냐?"
“다만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
시자가 들어가서 아뢰니 자장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아마 미친사람인가?"
문인이 가서 꾸짖어 내쫓으니 거사는 말했다.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삼태기를 거꾸로 터니 개가 변하여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었는데 거기에 올라앉자 빛을 나타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은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그 빛을 찾아 서둘러서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벌써 까마득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시체는 화장하여 유골을 굴속에 안치했다.
무릇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이나 되는데 하나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한 상서(祥瑞)가 나타나고 우바새들이 많이 모여 일을 하므로 며칠 안 되어 낙성되었다. 자장의 도구 포말(布襪)과태화지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가여래의 가사들은 모두 통도사에 있다. 또 헌양현-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가 있었는데 목압침의 오리가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압유사라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으로 유학했다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를 널리 폈다 한다. 찬탄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청량산에서 꿈을 깨어 돌아오니
칠중삼취(七衆三聚)가 일시에 열리었다.
승속(僧俗)의 옷을 모양 있게 하려고
동국의 관을 중국처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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