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12 도선국사
“최고의 명당은 마음자리 밝힌 바로 그곳”
한국 지리학과 풍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도선(道詵, 827~898) 스님은 속성이 김 씨로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태종의 서손(庶孫)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고, 다만 그의 어머니가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한 개를 주어 그걸 삼킨 뒤 임신이 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유별났던 그는 15세에 출가해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읽고 익혔는데 그 깊은 이해에 모두가 놀라 감탄해 신동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스님은 화엄의 세계에 만족하며 머무르지는 않았다. ‘문자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그는 때마침 당나라에서 돌아온 동리산의파의 개조 혜철 선사의 문하에 귀의했고, 결국 그곳에서 확철대오를 이뤘다. 그 후 스님은 15년간 전국을 바람 같이 떠돌며 산천과 민심을 느끼고 풍수를 익혀나갔다.
스님의 나이 37세 되던 해, 드디어 백계산 옥룡사에 바랑을 내려놓고 그곳에서의 상주를 시작했다. 혜철 선사의 뒤를 이어 동리산문의 제2조가 된 그는 후학을 제접하며 그들을 이끌었는데 당시 스님들이 수천이요 신도는 구름 같았다고 전한다.
격동의 세월, 수많은 세속의 손짓에도 아랑곳 않고 35년간 산중을 지켰던 스님은 898년 3월 10일 세수 72세로 입적했다. 그 뒤 신라 효공왕은 스님에게 요공(了空)선사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 때는 대선사, 숙종 때는 왕사, 인종 때는 선각국사로 추봉했다.
▶국사께서는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라는 선의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하셨고, 훗날 35년 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분께 말로써 답변을 듣고자 하니 먼저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우레와 같은 침묵이 있고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내도 공허한 외침이 있을 수 있지.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 아니겠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스님은 실존인물이신 것은 맞지요?
“허~어, 그게 무슨 말인가?”
▶스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복잡해집니다. 모친께서 오이를 먹고 스님을 잉태했다고도 하고, 아버지가 왕손이나 반대로 장사꾼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 중국 천자가 묘 자리를 잡기 위해 스님을 데려갔다거나 중국은 근처에도 못 가봤다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 국사께서는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는 설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솔직히 실존했던 건 맞지만 엄청난 각색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서의 기록과 설화들이 상당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점도요.
“그럴 수 있지. 역사란 밀가루 반죽과 비슷해서 빚어내는 사람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니까.”
▶그렇더라도 이것만은 꼭 여쭤봐야겠습니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를 보면 제2조에서 사찰을 지을 때는 도선국사의 말에 따르라고 했고, 이를 근거로 제8조에서는 전라도는 풍수상 반역의 땅이니 그곳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그 논리가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호남 사람들을 배제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을 아시죠. 그 일차적인 책임이 태조 왕건과 그에게 『도선비기』를 전수했다는 스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나에게 책임이 있지. 그러나 훈요십조를 만드는데 나와 태조가 깊이 개입돼있다고 성급히 단정 짓지는 말게나.”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훈요십조가 세상에 나온 것은 태조가 승하하신지 60여 년이 지나서네. 그것도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옹립했던 최항이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네. 그것이 나중에 역사서에 사실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내용인즉 태조의 유훈과 나의 권위를 빙자한 경주 최 씨 집안의 협박문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지.”
▶그래요? 사실 훈요십조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특히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 나주, 영암, 곡성, 광양, 구례 등 지역 토호들이 적극 도왔고 특히 태조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개국일등공신 신숭겸 장군도 곡성이 고향이었으니까요.
“그렇네. 내 고향도 전남 영암이라네.”
▶그럼 스님과 왕건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일설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고 또 직접 가르치기도 하셨다는데요.
“나는 스승 혜철 선사께 깨달음을 인가받고 15년 동안 전국 산천을 유람하고 다녔지. 그 때 신라의 기운이 쇠했고 민심도 이미 등을 돌렸음을 알았네. 또 전국 각처에서 지방의 호족세력이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송악(개성)은 한반도의 중심으로 왕 씨 일가가 한강 일대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네. 그렇기에 훗날 이 집안에서 큰 역할을 할 인물이 날 것을 예상했을 뿐이라네. 그런데 태조께서 17세가 되던 해 내가 송악에 가서 군대를 지휘하고 지리, 천시를 아는 방법과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거나 『도선비기』를 전했다는 허황된 얘기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그럼 실제로 왕건과 가까워진 것은 스님께서 입적하신 이후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내 제자 경보(慶甫)와 윤다(允多) 스님이 훗날 태조의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 영향도 수월찮었을테고.”
▶그런데 흥미로운 건 스님의 이름을 빌어 새 왕조의 당위성과 왕도의 터임을 강조했던 고려나 조선왕조가 다 같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도선비기』라는 스스로의 덫에 걸려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죠.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 도참이나 풍수사상은 본질적으로 민심이 향하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네.”
▶그렇다하더라도 스님께서 풍수사상을 정립시키고 널리 확산시킨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풍수를 ‘정법(正法)’이라 할 수 있습니까?
“우리 풍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판단하는 지리학이 바로 풍수네. 태풍이 한 번 몰아치면 피해가 속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네. 물과 바람으로 안전한 곳을 찾는 것 또한 풍수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지. 땅과 사람의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 그게 풍수라는 게지. 그게 어디 부처의 뜻과 둘이겠나.”
▶그래도 풍수가 정권의 정당화 명분과 반란의 도구로 이용돼왔고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조상 묫자리 잡고 이삿날 잡는 것쯤으로 치부되는 게 현실 아닙니까?
“사자는 돌멩이를 던진 사람을 물지만 개는 돌멩이를 쫓아간다네. 스스로 사자가 될 것인지 개가 될 것인지는 각자 선택의 몫이지. 특정한 사람과 지역을 넘어 이 땅에 발을 딛고 선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그곳이 명당일 수 있고, 자기가 곧 세상과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토록 하는 것, 그게 불타의 가르침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때문에 스님을 신승(神僧)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요승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습니까?
“‘입니입수(入泥入水)’라. 연꽃을 따려면 어찌 손과 발에 진흙을 안 묻힐 수 있으며 옷이 물에 젖지 않을 수 있으리오. 풍수를 익히게 된 것도, 그것을 새롭게 뿌리 내린 것도, 그로 인해 칭송과 비난을 받는 것도 모두 시절인연일 따름이지.”
▶스님께서는 달마대사의 면벽 9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긴 세월을 옥룡사에서 ‘홀로 앉아 말을 잊었다(宴坐忘言三十五年)’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산중에 머무른 이유가 있으신지요?
“나는 산승일세.”
▶후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했네.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 모두가 진실이고 명당이라는 말이지. 복이든 뭐든 바라는 마음은 늘 스스로를 옭아매고 노예로 만드네. 참다운 명당, 그것은 마음자리를 밝히는 바로 그곳에 있다네. 그럴 때 온 세상이 절로 불국토 만다라가 될 것이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도선국사 어록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따라 고요히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 문자에나 종사할 것인가.”「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
“나는 장차 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타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이 이치의 떳떳함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도선국사실록』
찬탄과 공경
“계행을 연마하신 그 덕은 사람과 하늘을 감동시켰고 음양에 통달하신 그 공은 온 나라에 퍼졌도다.” (고려 이규보)
“15년간 강산을 두루 행각한 도선이 37세 때 옥룡사에 주석하여 입적할 때까지 35년 간 상주도량(常住道場)하여 호지지법(護持止法)하며 영중전법(領衆傳法)했던 사실은 달리 유래를 볼 수 없는 진실한 사문, 즉 선승 도선상이 아닐 수 없다.”(김지견·전 전통불교문화연구원장)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의 도선풍수는 우리의 긍정적 지리 지혜의 집대성인 셈이다.”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당시 신라 국토의 자연환경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했다. 도선이 사망하고 고려에 들어와 왕건태조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또 그 후 고려왕실이나 다른 정치세력들에 의해 이용되는 과정에서 윤색되거나 여러 가지의 전설이 붙어서 미신적인 풍수도참설로 변했던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최병헌·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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