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균여(均如) 대사
-화엄교학을 선양한 고려초의 고승-
(1) 시대적 배경
균여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게 좋다. 정치사회적 배경과 불교 사상사적 배경이다. 정치적으로는 신라천년의 사직이 붕괴되고 새로운 고려왕조가 탄생, 정착되어 가던 과도기에 균여가 살았으며, 단지 그런 시대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간접으로 상당히 깊게 왕실과 결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 사상사적으로는 지금까지 불교교리에 대한 연구와 실천이 유행하던 신라사회에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창하는 선법이 새로 전래되어 교와 선이 대립 내지 융합되던 사상적 과도기였기 때문이다.
균여가 태어난 것은 고려 태조 2년(923)인데 이보다 2년 후에 고려 4대 임금 광종이 태어나며 973년에 균여가 입적하자 2년 후인 975년에 광종도 죽는다.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출가승려로서 또 한 사람은 국왕으로서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각자 자기 분야에서 뚜fut한 하나의 업적을 남겼으며 때로는 신앙적으로 깊게 귀의하고 정치적으로 크게 협력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라 개국 이래 불변의 진리같이 계속되어 오던 골품제도 체제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일개 무장인 왕건이 고려왕조를 창업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林春吉 등의 반란 외척인 王規 등의 역모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혼란을 목격해 온 태조의 三子 광종에게는 어떻게 하면 호족세력을 제거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그는 즉위 7년에 노비안검법을 단행했다. 노비안검법이란 원래 양민이었는데 전쟁 중 포로가 되어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본래대로 자유인이 되게 해주는 법을 말한다. 이 조치로 많은 노비들이 자유인이 되었다. 노비들이 자유민이 되자 호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수는 자연히 줄게 되었다. 그만큼 호족의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무인 세력을 제거하고 문인을 등용하기 위한 또 하나의 조치로 광종은 과거제도를 실시했는데 이와 아울러 승과제도를 시행해서 균여로 하여금 승과제도 시행을 관장하게 했다. 이와 같은 행정조치는 모두 광종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균여가 살았던 고려 초기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이상과 같이 혼란한 시대였지만 불교 교단사적으로도 또한 교와 선이 대립 내지 혼융되는 그런 시대였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일관되게 연구 실천되어 온 것은 華嚴 · 唯識 · 戒律 · 淨土 · 天台 등의 여러 교학이었다. 그런데 신라 말기에 이르러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교의로 하는 선법이 전래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교학불교에서 선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새로 등장한 선종은 자연히 사상적으로는 교학불교에 대해 도전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즉,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하는 사상은 누구나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절대왕권을 부정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상은 절대왕권에 도전하려는 지방 호족들에게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의 관심이 교학불교에서 선법으로 쏠렸던 단적인 예는 소위 9산선문의 개산조 또는 제 2조들의 사상체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9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성주사의 개산조 무렴(800-888)은 선문에 들어가기 전에 화엄을 수학했으며 그 제자 麗嚴도 무량사의 住宗法師에게서 화엄을 배우는 도중에 선문에 들어갔다. 또 獅子山의 개산조로 불리는 道允(800-868)도 18세 때 鬼神寺에서 화엄을 배웠음을 <祖堂集>에 의해 알 수 있으며 그 제자 折中도 부석사에서 화엄을 수학한 후 선문에 들어갔다.
그런가 하면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 그리고 제자 도선, 또 실상산파의 제2조인 秀徵도 선문에 들어가기 전에 화엄을 배우는 등 많은 사람들이 교학사상을 연구하다 선문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정치 사회적으로 크게 혼란되고 불교 사상사적으로도 선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전래로 크게 대립, 혼융되던 시대에 태어났던 균여는 시종일관하게 화엄사상만을 연구했고 화엄에 관한 저술만 남기고 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행적은 매우 특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2) 略傳
한 사람의 인간을, 특히 종교가를 연구하고자 할 때 그 전기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커다란 잘못을 범하기 쉽다. 대개의 전기에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하나의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인물이 위대하면 할수록, 그 사상적 영향이 크면 클수록, 전기가 성립된 연대가 멀면 멀수록 전기를 작성한 사람의 주관이나 과장이 개입되기 쉽고 실상보다는 허상이 더 크게 부각되기 쉬운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입장에서 전기가 작성되었는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주요한 일이다.
균여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그렇게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의천의 <대각국사문집>과 균여 저술의 말미에 있는 刊記에 의해 단편적인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극히 부분적인 것이고 편견에 의해서 기술된 듯하여 큰 참고가 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균여의 전기를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으니 赫連挺이 쓴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 均如傳>이 그것이다.
이 균여전은 균여가 입적한 후 이백 년이 지난 1074년에 씌어진 것으로, 분량은 겨우 21자 33행의 목판 10매로 되어 있다. 이 균여전에 의하면 균여의 속성은 邊氏이며 균여는 그의 휘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煥性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占命이었다. 어느날 밤 하늘에서 황금빛 봉황이 품에 드는 꿈을 꾼 점명은 나이 60세에 임신을 했고 7개월 후 균여를 낳으니 때는 서기 923년이었다. 갓 태어난 균여의 용모가 심히 추악해서 키울 생각을 않고 길거리에 버렸는데 두 마리의 새가 갑자기 날아와 두 날개로 아가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고 한다. 그것을 본 부모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이를 집으로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아버지가 입으로 들려주는 화엄경의 게송을 줄줄 외웠으며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았다고 한다. 나이 15세 때 형 善均을 따라 부흥사의 識賢화상을 찾아가 출가했다. 균여를 지도해 본 식현화상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당시 화엄종의 대찰이었던 영통사로 보냈다. 균여의 일생에서 큰 전기를 맞게 된 것은 그곳에서 義順의 지도를 받게 된 것 때문이다. 의순화상은 당시 영통사의 이름높은 화엄대가로서 그 문하에는 학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었다고 한다.
균여는 의순화상 밑에서 화엄을 익히며 후일 수많은 화엄전적을 남길 수 있는 자질을 닦았음에 틀림없다. 균여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향가 11수의 제작이다. 그는 화엄사상을 단지 이론적인 연구로만 해설한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누구나 쉽게 접해서 실천할 수 있도록 11수의 <普賢行願歌>를 지었다. 균여전을 쓴 혁련정이 밝혔듯이 이 <보현행원가>의 제작 목적은 우둔한 근기의 사람들에게 깊은 진리의 종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얄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신라시대 원효, 혜숙이 신라의 위대한 대중불교운동의 실천자였다면 균여는 고려가 낳은 위대한 실천불교 운동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11수의 <보현행원가>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의 향가와 더불어 고대 국문학 연구에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균여는 불교의 대중화에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교단의 화합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 말 화엄교단은 觀惠를 중심으로 하는 남악파와 希朗을 중심으로 하는 북악의 양파로 나뉘어서 그 대립이 물과 불의 관계와 같았다. 균여는 이 두 파를 화합시켜 하나로 만드는 뛰어난 외교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균여는 중생구제의 방편으로 신기한 법력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다.
균여전에 의하면 광종의 부인인 大穆皇后의 玉門에 창질이 생겼는데 백약이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환부를 의원에게 보일 수도 없어서 균여의 스승인 의순화상을 청해 法樂으로 치유하려 했으나 의순화상까지 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약관 27세의 균여가 향을 올리고 발원을 하자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祈晴祭를 주관해 송나라 사신을 감동시킨 일도 있다. 즉, 광종의 즉위식을 거행하려 하는데 연일 비가 그치지 않자 송나라 사신이 東國에 필히 성인이 있을 텐데 어찌 그 성인으로 하여금 祈晴하게 하지 않는가라고 광종을 공격했다. 깊은 근심에 빠져 있던 광종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균여로 하여금 기청제를 주관하게 하니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개었다고 한다. 황주성 내의 변괴를 물리치기도 하고 밤에 眼光으로 광종을 감동시키는 등 큰 신이를 보여 광종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던 균여는 광종이 세운 歸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저술에 몰두하기 도 하다가 귀법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51세 법랍 36세 때는 973년 6월 17일이었다.
(3) 균여의 화엄사상
<화엄경>은 양적으로도 여타의 경전에 비해 훨씬 방대하고 내용적으로도 깊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경 중의 경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정리하면 性起사상, 一心사상, 十地 및 보살도사상, 그리고 重重無盡한 法界緣起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相卽相入하고 相依相存하는 법계연기를 균여는 의상의 ‘法界圖’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지면관계상 ‘법계도’에 대한 균여의 해석을 통해 균여 사상의 일단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법계도’는 흰 종이와 검은 글자와 붉은 선으로 되어 있다. 이를 器世間 衆生世間 智正覺世間으로 부르기도 한다. 백지 위에 흑자를 쓰고 적화를 그려야 ‘법계도’는 완성된다. 이 셋은 상의상존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만일 적화를 지워버리면 백지의 개념도 흑자의 의미도 없어져 버린다. 법계도에서 백지의 개념 흑자의 개념은 赤印의 개념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한다. 이 논리는 백지와 흑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일 ‘법계도’에서 흑자를 지워버리면 적화도 백지도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법계도’에서 흑자는 적화와 백지를 떠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백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일 종이를 없애버리면 흑자와 적화도 없어진다. 즉, 흑자와 적화는 종이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종이(白紙)는 종이 자체 속에 흑자와 적화를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된다.
이 논리는 器世間 衆生世間 智正覺世間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세간이 없으면 그곳에 살 중생도 없게 되며 중생을 제도할 부처도 없게 된다. 중생이 없으면 중생이 사는 기세간도 없어지며 부처도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 사는 기세간이 있고 중생을 구제할 부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그 중생신 속에 기세간과 부처를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풀이한 균여는 이를 설명함에 다음과 같은 경구를 인용하고있다.“보살은 보살 身中에 여래의 지혜를 具有하고 있음을 스스로 안다"
중중무진한 법계에서 ‘個’의 개념은 ‘地’와 관계상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이 연기법에 의해서 법계는 성립될 수 있는데 개개물물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면서도 혼융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특성을 잃지 않는다. 균여는 이 법계연기의 이론을 ‘법계도’를 가지고 잘 설명하고 있다. 즉, 백지와 흑자와 적인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의상존 관계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고 뚜렷이 갖고 있으며, 이것이 화엄철학의 극치라는 것이다.
(4) 저술의 史的 의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엄사상가로서는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을 들 수 있는데 아깝게도 원효의 <華嚴經宗要>는 현존하지 않는다. 의상은 철저한 계행과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도제양성에 몰두했던 때문인지 저술은 많지 않으나 다행스럽게도 <화엄일승법계도> 1권은 현존하고 있다. 一然이 말했듯이 바닷물의 맛은 한 숟가락만 마셔봐도 전체 맛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상의‘법계도’는 문장이 아주 간단하고 저술의 분량은 대단히 적지만의상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책이다. 그러므로 신라시대 이래 최근세까지 끊임없이 연구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法界圖記叢髓錄> 4권이 저술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균여의 <華嚴一乘法界圖圓通記> 2권이 씌여졌다. 또 조선시대에는 김시습의 <法界圖注幷序> 1권 및 道峰有聞의 <法性界科註> 1권이 저술되었다.
이는 신라 화엄사상의 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상기 저술 중 균여의 저술을 제외하면 <법계도기총수록>은 신라시대에 씌어진 여러 주석서를 모아 편집한 것이므로 중간중간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아 법성게 30구를 이해하는데 아쉬움이 적지 않다. 김시습의 <법계도주>는 너무 간결하며 禪的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이론 전개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문의 <법성게과주> 역시 제목 그대로 <법계도>를 알기 쉽게 과목으로 나눈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에 비해 균여의 <법계도원통기>는 의상의 30구를 한 구 한 구 주석하고 있으므로 의상사상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 안 될 중요한 자료다. 의상은 緣生의 법에는 주인될 것이 없다는 이유로 <법성게>를 지은 다음 그 작자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法藏의 작이다, 智儼의 작이다, 珍崇의 작이다라는 등 이론이 분분했다. 이 저자 문제에 대해 균여가 <元常緣>과 <崔致遠所述傳>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법계도>가 의상의 저술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균여는 10부 65권이라는 다작을 남겼는데 아깝게도 많은 부분이 산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5부 18권뿐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 중에는 중국의 지엄 법장의 저술은 물론 신라인의 章流도 상당히 인용되고 있어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균여 저술이 가지는 의의로서 빼놓을 수 없는 특기할 것은 향가 11수의 저작이다. 현존하는 25수의 향가 중 <삼국유사>에 실린 14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균여의 작이다. 이 11수의 향가는 우리의 고대 국문학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균여가 <화엄경>의 ‘入法界品’에 나오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普賢十願歌)에 마지막으로 總結無盡願을 하나 더 붙여 11수의 향가를 지은 것은 균여가 보현행원의 실천가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방대하고 어려운 화엄의 진리를 일반인 누구나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불교를 전문인만의 것이 아닌 일반 대중화하기 위한 원력으로 봐야 한다.
신라시대 이래 고려 초까지 왕실 내지 귀족 불교화되어 있던 불교를 일반민중 속에 뿌리내리고 꽃피게 하려 했던 균여의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균여전에 의하여 균여의 이 11수 향가는 실제로 여기저기 마을의 담장에 씌어지기도 하고 이 노래를 불러서 3년간이나 고생하던 난치병이 씻은 듯 낫기도 했다고 한다.
균여 저술의 사적 의의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신라 화엄사상, 특히 의상의 화엄사상이 끊이지 않고 연구 전승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양적으로 가장 많이 현존하고 있는 균여의 화엄 저술을 통해서 중국 및 신라의 화엄사상 내지 산실된 화엄장소의 내용까지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균여작 11수를 통해서 우리의 고대문학을 연구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향가를 통해서 화엄의 이론을 일반 서민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균여의 실천불교 정신은 더욱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5) 맺는말
불교만큼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는 종교도 드물 것이다. 실천불교를 대표하는 것이 禪이라면 모든 불교의 이론을 한 마디로 표현해서 敎라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 있어, 신라 · 고려· 조선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학 불교를 대표해 온 것이 화엄사상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상을 주석하고 분석한 저술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게 또한 사실이다. 이같은 실정에서 5부 18권이나 되는 균여의 저술이 현존하고 그로 인해 산실된 신라 시대의 화염장소의 내용을 다소나마 살펴볼 수 있으며, 11수의 향가를 통해서 신라인의 언어 문자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그 가치를 아무리 평가해도 부족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균여의 위치는 한국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참으로 큰 의의를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균여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을 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국문학 연구의 일부분으로서 어느 정도 연구성과가 나와 있다. 또 사학도들에 의해서도 불교사적인 연구가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화엄사상사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연구분석은 아직도 상당히 미흡한 상태에 있는 게 사실이다. 앞으로 불교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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