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옛스님 이야기

가상 인터뷰 ⑬ 균여대사

slowdream 2008. 1. 9. 15:41
 

가상 인터뷰 ⑬ 균여대사


중생계 다하도록 보현보살의 행원 따르리라



균여(均如, 923~973) 스님의 속성은 변 씨로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다. 혁련정 거사가 1074년에 쓴 『균여전』에 따르면 어느날 밤하늘에서 황금빛 봉황이 품에 드는 꿈을 꾼 후 어머니 점명이 나이 60세에 임신을 했고 7개월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균여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이의 얼굴이 지독히도 못생겨 키울 생각을 않고 길거리에 버렸는데 두 마리의 새가 날아와 두 날개로 아기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 그것을 전해들은 늙은 부모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이를 집으로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아버지가 입으로 들려주는 화엄경의 게송을 줄줄 외웠으며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았다고 한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균여는 15세 때 사촌 형 선균(善均) 스님을 따라 부흥사로 출가했다. 하지만 그 절의 스님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당시 화엄종의 대찰인 영통사로 균여 스님을 보냈다. 그것을 계기로 균여 스님은 당시 화엄의 대가였던 의순(義順) 스님 문하에서 화엄을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스님은 일반 서민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보현행원가’ 11수를 비롯해 수많은 화엄관련 전적을 저술했으며 교단의 화합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스님은 중생구제의 방편으로 신이한 법력을 보인 일이 자주 있었다. 『균여전』에 따르면 광종의 부인인 대목황후가 창질이 생겨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고 있을 때 27세의 젊은 균여 스님이 향을 올리고 발원을 하자 병이 씻은 듯 나았다. 또 광종의 즉위식 때 연일 비가 그치지 않자 광종의 요청으로 스님이 기청제를 올리자 곧바로 비가 멈췄다고 한다. 이밖에도 황주성 내의 변괴를 물리치기도 하고 밤에는 안광(眼光)으로 광종을 감동시키는 등 수많은 이적을 보여 광종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기도 했다.


스님은 광종이 세운 귀법사의 주지로 오랫동안 머물며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다가 973년 6월 17일 귀법사에서 51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학교 다닐 때 스님의 시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요즘 다시 읽어보니 참 감동적으로 와 닿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노래가 너무 좋아 책장이나 담벼락에 써놓기도 하고 송나라 어떤 이는 한역된 이 글을 보고 부처님의 글이라며 눈물을 흘렀다고 전하는데 정말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기야 최근에도 오세은이라는 분이 스님의 향가에 곡을 붙여 ‘보현십원가’라는 음반을 펴내기도 했으니까요.

“좋다고 생각하니 다행이오.”


▷스님께서 고려를 대표하는 화엄학자이신데 굳이 보현행원가라는 노래를 만드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불법이 쉽다면 쉽지만 심오하다면 한없이 심오한 것 아니겠소. 허나 많은 사람들이 즐거이 노래를 부르면서 불법의 이치를 알아가고 실천해나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보현행원가 뿐만 아니라 방대한 화엄의 주석서까지 여느 한문이 아니라 이두(吏讀)로 표현하고 계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군요.

“‘사람들을 위해 이 좋은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洪法爲人)’는 것이 내 평생의 과제였소.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다면 꿰지 않은 구슬과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렇기에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쉽게 그리고 우리말로 풀어 쓰려 했던 거요.”


▷그렇군요. 하지만 1000년이 지난 오늘날 불교계에서조차 한문으로 된 의식과 경전을 여전히 선호한다는 것을 스님께서 아신다면 실망이 크시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스님께서는 평생 화엄의 길을 걸으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아버님께서 화엄에 관심이 많으셔서 어릴 때부터 화엄경을 읽어주셨고 친누님과 사촌 형님 또한 스님이셔서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소. 그러나 무엇보다 출가해서 인연을 맺은 의순대사의 덕분이라 할 수 있겠소.”


▷스님께서는 50권이 넘는 방대한 화엄 주석서를 쓰셨습니다. 또 그 주석서를 살펴보면 대부분 지엄 스님, 법장 스님, 의상 스님의 저술을 풀이하고 있을 뿐 당시 사상적인 조류였던 선(禪)과 결부지어 남기신 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징관 스님이나 종밀 스님이 그렇듯이 당시 화엄교단에 주어졌던 시대적 과제는 화엄과 선의 조화가 아니었나요?

“부끄럽지만 당시 화엄종은 신라말 후삼국의 영향으로 남악파와 북악파로 갈려 극단적인 대립이 심했소. 그렇기에 내 역할은 화엄종단 내의 분열을 통합하는 것이라 느꼈고, 또 선과의 어설픈 융합보다는 근본으로 돌아가 화엄대가들의 저작을 자세히 분석해 화엄의 참다운 교리를 알리고 재정립 하려는데 있었소.”


▷그렇더라도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스님의 저술이 중국 화엄종에서 교학의 확립기에 해당하는 지엄과 법장 스님으로의 단순한 회귀나 복고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군요.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성인들의 가르침이 어디 가겠소. 해석 그 자체로도 시대의 정신을 충실히 담아낼 수 있는 일이라오.”


▷스님께서 남악과 북악으로부터 모두 존경받고 이들의 화해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 알겠습니다. 하지만 손제자벌 되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 스님이 신랄하게 스님을 비판한 것을 아십니까? ‘성교(聖敎)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구구이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폐케 하고 있다’고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의천 스님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스님의 저술을 몽땅 뺐습니다. 혹시 스님께서 이두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의천 스님께서는 동아시아라는 보편성을 늘 염두에 두셨고 한문학에도 대단히 조예가 깊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오. 내가 화엄종단의 통합과 아울러 화엄교학의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수행법으로서의 ‘관(觀)’을 상대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가 클 것이오.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했던 의천 스님에게 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오.”


▷스님의 주석서에는 징관 스님의 이론이 많이 엿보이는데 왜 정말 수행법은 강조하지 않으셨나요?

“수행이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 부처를 이뤄가는 것 아니겠소.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면 실천과 수행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소. 그러나 수행에 대한 이론이 복잡해지면 오히려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소.”


▷그럼 대각국사께서 스님을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내 시대의 과제는 화엄교학의 재정립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고 하더라도 의천 스님 시대에는 정교한 수행이론의 정립이 요구됐을 거요. 그렇기에 비판받을 게 있다면 받아야지요. 하지만 내가 이두를 사용해 글을 쓰고 민중들을 위해 보현행원가를 지은 것도 화엄의 한 실천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소.”


▷그렇지요. 하기야 의천 스님께서 불교학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화엄의 실천을 대단히 강조한 것과는 달리 실제 민중에게 화엄을 알리려고 노력한 것 같지는 않더군요. 스님 요즘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보현보살의 10가지 원은 그분의 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원은 화엄사상의 결론일 뿐 아니라 실제 행으로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동체대비 화엄사상의 최고 목표입니다. 내 옆의 사람이 부처님임을 알아 늘 공경하고 베풀고 칭찬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균여대사 어록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 앞에 절하옵는 이 내 몸아 법계의 끝까지 이르러라. 티끌마다 부처님의 절이요, 절마다 모시옵는 법계에 가득 찬 부처님 구세가 다하도록 예경하고 싶어라. 아! 이 몸과 말과 뜻은 쉼 없이 오로지 부처님을 사모하고 싶습니다.” (예경제불가)


“잘못되어 깨달음을 향한 길을 잃고 지은 죄업은 법계에 넘치옵니다. 나쁜 버릇에 떨어진 삼업은 계율로 깨끗이 하리니 오늘 저희들의 모든 참회를 시방세계의 부처님은 아옵소서. 아, 중생계가 다하도록 나의 참회도 다하여 내세에 길이 죄업을 버리고저” (참회업장가)


찬탄과 비판


“화엄경의 10만 게송이 인도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오로지 용수보살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불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의상대사의 덕분이요, 고려에서 비로소 널리 불려지게 된 것은 오로지 균여대사의 덕분이다.” (고려 혁련정)


“(균여 스님의)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폐케 하고 후생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고려 의천 스님)


“보현행원가는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는, 또한 너무 깊지도 않고 멀지도 않는 중생의 적당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원(大願)이었다. 이것은 균여의 마음이 곧 보현의 마음이요 이 보현의 마음이 곧 중생의 마음, 즉 대중의 마음의 경지에서 노래한 격조있는 시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전 동국대 교수 운학 스님)


“관행을 강조한 의천의 불교가 균여의 그것보다 더 실천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또 의천에게서는 균여만큼 서민사회 속에 화엄을 유포시키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은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최병헌 교수)

참고자료

김운학 「균여의 화엄사상과 문학적 위치」, 김두진 「균여 화엄사상의 역사적 의의」, 황패강 「균여의 보현십원가 연구」, 도업 스님 「균여대사」, 최병헌 「의천이 균여를 비판한 이유」, 최원식「균여의 성상융회적 화엄사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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