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30 청허 휴정 스님
“정진이 석가모니요 밝은 마음이 문수보살”
고려불교의 찬란함을 뒤로 한 채 탄압과 굴욕으로 점철된 조선불교 500년. 서산대사로 더 유명한 청허당 휴정(1520~1604) 스님은 칠흑 같은 밤을 환히 밝힌 횃불이었다. 조선불교는 서산의 바다에 모였다가 다시 서산으로 퍼져나갔다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스님 중 그의 제자 아닌 이가 없고 서산의 법손이 아닌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서산대사로 하여 조선의 불교는 숨통이 트였으며 그의 선사상은 지금까지도 간화선수행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한국불교사의 거대한 산맥 휴정 스님. 평안남도 안주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다음 해에 아버지를 잃는 등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열두 살 되던 해 안주 목사 이사증이 어린 그의 시 짓는 탁월한 능력을 아껴 양자로 받아들였고, 곧 당시 최고 명문 관학인 성균관에 보내 본격적인 유학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운명일까. 과거에 실패한 그가 마음을 달래려 내려갔던 지리산에서 “나 자신의 주인인 내 마음의 정체를 깨달은 자라야 참다운 장부라 할 수 있다”는 지리산 고승의 말을 듣고 불법에 귀의 했다. 약관의 나이에 출가한 휴정 스님은 부지런히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보우 스님에 의해 부활된 첫 승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후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길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판단한 스님은 이후 금강산, 오대산 등을 행각하며 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았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자 수많은 스님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40대 후반부터는 묘향산에 석장을 내려놓은 뒤 후학 지도에 혼신을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대는 스님을 그냥 두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스님은 선조의 간곡한 요청으로 주장자 대신 칼을 손에 쥐어야 했다. 그 때가 스님의 나이 73세.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고, 특히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해 평양을 탈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뒤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진영을 꺼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는 시를 적어 유정 등 제자에게 전하도록 하고 앉은 채 입적했다. 스님의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고 전한다.
▷성균관에 입학하고 후원자가 든든하면 사실 앞길이 보장된 건데 굳이 출가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혹 과거에 낙방한 충격은 아니겠지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찰나를 살다 가는 존재임을 뒤늦게 안 게지. 꿈 같고 물거품 같은 세상에서 최상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거라네.”
▷27세 때 한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으셨다는데 왜 하필 낮닭이었는지 의아합니다.
“그 닭 울음소리는 은산철벽을 깨부수는 천지개벽의 소리였네. 깨달음의 기연이 내겐 닭 울음소리였네만 남들이 주고받는 하찮은 잡담이나 도끼질 하는 소리도 때에 따라 오도(悟道)의 순간이 될 수 있네.”
▷33세 때 승과에 합격하고 불과 3년 뒤 선교 양종판사가 되셨습니다. 스님의 능력도 출중하셨겠지만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 스님이 적극 지지도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불과 2년만에 사임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당시 관리와 유생들 때문인가요?
“보우 스님께서는 소나기처럼 퍼붓는 상소와 모함 속에서도 의연히 그 직책을 수행하셨다네. 내가 맡았을 때도 그런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나는 지쳐갔네. 그리고 결국 그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지.”
▷그래도 불교중흥을 위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스님이 그만두시니 보우 스님께서 다시 그 직책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순교까지 했던 것 아닐까요?
“그렇겠지. 허나 보우 스님께선 내 선택을 기꺼이 인정해주었고 내가 다른 방법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어주셨지. 내가 갔던 길이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 조선불교를 짊어진 또 다른 길이었네.”
▷스님께서는 불교와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세를 얘기하는 종교와 억겁을 윤회를 말하는 불교는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불교와 기독교도 다른 게 없는 거 아닌가요?
“당시는 유학을 으뜸으로 보았고 다른 사상이 같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지. 내 주장이 숭유억불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모두 ‘마음’으로 일관돼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네.”
▷그렇게 3교의 회통을 강조하셨는데 선과 교는 차이를 둬 ‘교학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가볍게 여기면 아무리 많은 세월을 수행해도 천마(天魔)나 외도(外道)가 될 뿐이다’라고 하셨나요? 그 때문에 제자들 중에는 반발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교(敎) 안에도 선(禪)이 있지 않습니까?
“불교에는 철저히 깨달음이 있을 따름이네. 경에만 의지해 매달리고 앵무새처럼 읊조린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없지. 아무리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그것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닌 게지.”
▷세수 70에 스님께서는 정여립 역모사건에 휘말려 강릉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아는데 어찌된 일인가요?
“한 스님이 권선문을 청해 써줬더니 그가 나를 궁지에 밀어 넣을 줄 어이 알았나. 허나 그걸 계기로 임금과 인연이 되고 얼마 후 난리를 당해 미비하나마 나라에 보탬이 됐으니 다 불은(佛恩)일 따름이지.”
▷스님께서는 선을 강조하면서도 ‘계율의 그릇이 튼튼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빛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도 계율을 구속처럼 여기고 이에 얽매이지 않아야 참다운 선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비루병에 걸린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하네. 하물며 어찌 청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한다면 항상 부처께서 곁에 계시는 것과 다름 없네. 허나 근본법에는 계율을 가진다거나 범한다는 것이 없지. 계율을 지녀 지키는 것은 소승계의 견해요,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막행막식하는 중생의 견해네.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음이 없어 분별을 내지 않는 것이 참다운 대승의 계율이네.”
▷그러면 임진왜란 때 ‘이 늙은 스승을 믿고 따르라. 서산이 앞장설 것이다’라며 전국의 스님들이 전투에 참가토록 종용하신 까닭은 무엇인지요?
“계율의 으뜸은 심계(心戒)일세. 자신의 파계를 무릅쓰더라도 기필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대승계율의 정신이요, 진정한 부처님 제자다운 길이네.”
▷그래도 남을 죽이는 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요?
“『열반경』에도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교단을 지키고 수행자를 수호해야 한다’고 했지. 왜인의 총칼 앞에 무수한 생명이 스러지는 하에서 내 목숨 버려 중생을 구하는 게 부처님 가르침 아니고 무엇이겠나. 비록 나라는 불교를 버렸지만 불법은 나라를 버릴 수 없다네.”
▷마지막으로 이 시대 사람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리 마음속에 청정무구하게 광명으로 빛나는 여의보주가 하나 있네. 이 보주를 잘 사용해 비추면 어두운 세상도 환한 세상이 되고 괴로움도 즐거움이 되지. 불자여, 모름지기 쉼 없이 한 물건을 찾으라.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구하고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그리듯이 하라. 삶도 세상도 무상하다. 끊임없이 노력하라. 정진이 곧 석가모니이며, 밝은 마음과 지혜가 곧 문수보살이니라.”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김형중 『시로 읽는 서산대사』, 최명익 『서산대사』, 신법인 「휴정의 사교입선관」, 신일문 「휴정의 대승적 실천행 고찰」, 서규태 「휴정의 사상과 문학관」 등
서산 대사 어록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 같고/ 천추의 호걸들은 초파리 같구나./ 밝은 달 아래 맑은 허공을 베개 삼으니/ 한없는 솔바람의 곡조가 아름답도다.” (『청허당집』 중)
“만약에 불성을 보고자 하거든 마음이 바로 불성임을 알라. 만약에 삼악도를 면하려 한다면 마음이 바로 삼악도인 줄을 알라. 정진이 석가모니요, 곧은 마음이 아미타불이다. 밝은 마음이 문수보살이요, 원만한 실천행이 바로 보현보살이다. 자비로운 마음이 관세음보살이요,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는 희사(喜捨)가 대세지보살이다. 성내는 마음이 지옥이요, 탐욕스런 마음이 바로 아귀니라.” (『청허당집』 중)
“음란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새는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고, 거짓말을 하면서 참선을 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 참선하여 비록 많은 지혜를 얻었더라도 모두 마구니의 길에 이를 뿐이다.” (『선가귀감』 중)
찬탄과 공경
“잎사귀는 붓끝에서 나왔는데 그 뿌리는 땅에서 나지 않았네. 달이 와도 그림자 볼 수 없고 바람이 불어도 소리는 들리지 않네.” (선조가 서산대사에게 준 묵죽시)
“큰스님의 공로와 어리석음을 깨쳐주신 은혜는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설사 천만 번 몸을 가루가 되도록 목숨을 바친들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그 큰 은혜를 갚을 수 있으랴.” (사명당 유정 대사)
“공명과 욕심에는 조금도 뜻이 없고 도를 닦는 데만 전념하셨네. 위급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섭이 되어 산에서 내려오셨네.” (명나라 장수 이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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