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31 사명 유정 스님
“가사 한 벌, 주장자 하나로 천하를 구하리라”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한 한국은 오랜 세월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전란을 꼽는다면 단연 임진왜란이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의 정예병을 앞세워 침범한 이 전쟁으로 조선은 초토화되고 수백만 명이 죽는 대참사를 초래한 까닭이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나듯 임진왜란은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양대 산맥이라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 스님이다. 유정 스님은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은 선사이자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승군의 지휘자, 전략과 외교에 있어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기도 했다.
살아서는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입적 후에는 전설인 된 다면불(多面佛) 유정 스님. 그가 태어난 곳은 밀양 외곽의 한 오지마을이었다. 양반가문 출신의 그는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사서와 사략 등을 익혔으나 조실부모하고 형마저 세상을 달리했다. 이후 유촌 황여헌에게 사사받던 그는 “세속의 학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의 인연에 얽매여 있으나 어찌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만 하겠는가!”하고 이내 직지사 신묵 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그의 나이 15세였다.
이후 스님은 18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했고, 유생들과 교류하면서 교학과 시로도 명성을 드날렸다. 특히 32세 때 스님은 봉선사 주지 소임을 거절하고 묘향산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가 10여 년간 유명산천에서 정진하던 중 대오(大悟)하고 사법제자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스님의 나이 49세 때였다. 스님은 스승 서산대사의 명을 따라 의승군을 모집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로부터 스님은 적과 싸우고, 적군의 군영에 들어가 정세를 파악했으며, 휴전 시에는 성벽을 쌓았다. 또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라의 부름에 따라 강화사로 일본에 들어가는 등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헌신했다.
하지만 스님은 노환과 잦은 출장, 그리고 극도의 긴장에서 이루어진 각종 국가사업으로 인해 큰 병을 얻었다. 그리고 1610년 8월 26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자연의 큰 변화에 순응하련다”는 말을 남긴 채 입적했다.
▷스님의 생애를 보면 어떻게 인간으로서 저토록 담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적장을 향해 ‘그대의 머리가 보배다’라고 하시거나 홀홀단신으로 적진에 나가는 것도 모자라 일본 땅에 가서 온갖 역경 속에서도 왜인들과 담판을 짓는 모습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죽을 곳에 나가더라도 이 몸을 생각하지 않고 칼이 산더미 같고 나무와 같이 빽빽이 서 있는 곳을 평지와 같이 보는 것이 선정(禪定) 아니겠는가. 불교가 생사를 넘어서는 공부인데 두려울 것이 그 무엔가.”
▷최근 스님들이 군대를 가는 대신 사회복무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습니다.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스님이 어떻게 총칼을 잡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전란이지만 스님께서도 승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심정은 그리 편치 않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혜(定慧)로서 한 마음을 다스리고 만물을 구제하라고 하셨네. 산속에 앉아 조용히 수행하는 것만이 불사가 아니라 난국에 생령(生靈)을 구하고 널리 중생을 구하는 것이 보살정신이라는 게지. 한 벌의 가사, 한 자루 주장자로 천하를 구제하자는데 어떤 주저함이 있겠나.”
▷그래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스님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적장인데도 스님에 대한 그들의 존경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전란 중에 그들에게 수계를 하실 정도였다니까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살육하는 자 또한 적이기에 앞서 사바의 중생이지. 나는 한 순간도 원한과 분노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싸우지도 않았네. 부처님의 무량한 자비와 보살행을 따르려 했을 뿐.”
▷스님께서는 ‘출세’의 길을 여러 번 마다하셨습니다. 선종수사찰 봉은사 주지도 고사하고 특히 나중에 선조께서는 스님이 환속하면 백리 지방의 직책을 맡기고 삼군의 장수로 삼을 것이라는 말씀도 정중히 거절한 것으로 압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했고, 그 출가자의 본문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 왔네. 나는 그저 산승일 뿐이야.”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참으로 통탄할 기록들이 나옵니다. 승군을 먹을 것도 주지 않아도 되는 전쟁의 소모품으로 여기고 거기에다 스님은 물론 서산대사에 대해서도 온갖 험담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달려간 것은 그들을 위함이 아니었네. 오직 신음하는 백성들과 이 땅의 미래를 위해서였지. 자기의 양식을 스스로 준비하고 진영으로 달려왔던 숱한 스님들은 타고난 불심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충정 어린 이 땅의 백성이자 구도자였다네.”
▷그래도 원망이나 분노심이 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남의 허물을 찾거나 말하지 말게나. 무익할 뿐 아니라 스스로 원망하는 대상을 닮아갈 뿐이네. 우리는 싸움이 있을 때면 나서서 싸우고 없을 때는 무너진 성을 쌓았지. 또 잠시 한가할 때면 근처의 버려진 땅을 갈고 보리를 심었네. 그게 우리가 중생에게 또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었네.”
▷전란의 시기를 온 몸으로 겪으셨는데 가장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글쎄…. 왜에 붙들려간 우리 백성 3000여 명과 함께 돌아올 때라고 할까. 허나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일이지.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스승 서산대사께서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강화사로 급히 왜에 가라는 나라의 명을 듣고 발길을 돌릴 때였다네. 내게 베푸신 은혜가 수미산과 같건만 임제선을 선양하라는 간절한 부촉도 받들지 못하고….”
▷현대의 한 학자는 스님을 일컬어 ‘불교 박해와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수행에만 몰두할 수 없었던 불행한 시대의 지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스님께서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었으면서도 이후 스님은 방계로 전락하고 지금까지도 스님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서만 남아있는 측면이 많으니까요.
“그렇던가.”
▷서산대사께서 스님을 위해 직접 『선교결』을 지으셨고, 당대의 부휴 선수 스님 등을 비롯해 한결같이 서산대사의 법을 스님께서 이으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었다고 평가받는 편양언기 스님조차 ‘휴정대사의 법이 사명에게 전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딴판으로 흐르지 않았습니까.
“편양 스님은 훌륭한 선승이네. 그 스님으로 하여 선이 꽃 피웠다면 무엇이 문제겠나. 다만 한 사람만이 법통을 이었다는 사법전등(嗣法傳燈)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네. 한 스승의 법이 한 제자에게만 이어진다는 것은 모순이지. 부처님이나 보조국사,또 내 후대이기는 하지만 경허 스님도 특별한 스승 없이 깨우쳤지 않았나. 사법전승이 유교적인 질서 안에서야 필요했겠지만 말이야.”
▷국문학계 연구에 따르면 현재 확인되는 설화 중 스님을 소재로 한 설화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실제 서산대사와 신통력 대결을 한다든지 일본에 건너가 신통력으로 그들을 제압한다는 얘기 등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화에서뿐 아니라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스님께서는 실제로도 도술이나 신통력이 대단하셨나요?
“새가 하늘을 날고 잡초가 꽃을 피우는 것보다 더한 기적이란 세상에 없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맺힌 한을 나라는 인물을 통해 풀고자 했던 민중들의 마음이지 않겠나. 내가 그들에게 영웅이었다면 내게 백성은 늘 부처님이었다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사명당기념사업회 『사명당 유정』, 배규범 『사명당』, 이진오 「사명당 유정의 재인식」, 이철헌 「사명당 유정의 선사상」, 김천학 「사명당 설화의 종교적 해석」, 김승호 「사명당 설화의 발생 환경과 수용 양상」 등
찬탄과 공경
“사문(유정)의 일척안 밝은 빛 팔방을 비추네. 빼어남은 법왕이 칼 잡은 듯하고 텅 비기는 거울 속 누대와 같구나. 구름 밖으로 용 잡으러 나갔다 허공에서 봉황 치며 돌아온다네. 방편에 능통해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니 하늘과 땅 또한 티끌이로구나.” (서산대사)
“그는 의분이 폭발하여 손바닥을 맞대며 이해를 따질 때에는 옛사람의 절개와 호협한 기상이 있었고, 말안장을 어루만지며 눈을 돌이키니, 그 뜻은 요사스런 기운을 쓸어버리는데 있었으므로 마치 늙은 장군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었다.” (조선 허균)
“사명당에 대한 우리 민족의 숭경(崇敬)의 뜻은 일종의 신앙에 비길만하다.” (월탄 박종화)
사명 대사 어록
“대체로 맑은 거울과 흐린 금은 원래 각각 다른 물건이 아니다. 무릇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의 성질도 이와 같다. 다만 미혹하고 깨달은 데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어리석고 지혜로운 것이 씨가 있다고 하겠는가.” (『사명대사집』 권6)
“옛 역에서 중양절 맞아 칼을 안고 슬퍼하노라니/ 병든 몸에 오직 달만이 서로 따르누나/ 형봉(衡峯)에서 토란 굽기가 참으로 내 소원인데/ 벼슬길과 살진 말타기가 어찌 내게 맞으리/ 독물 바다에 십년토록 헛되이 먼 변방 지키니/ 향성(香城)에 돌아갈 날 언제일까/ 맑은 하늘 한 마리 기러기 강동이 멀구나/ 가물거리는 등불 앞에서 해진 옷 집어드네.” (『사명대사집』 권3)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원래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왜적들이 저렇게 잔인하니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일까 두렵다. 내가 마땅히 가서 저 광포한 왜적들을 타일러 흉한 무기를 못 쓰게 하는 것이 부처님게서 말씀하신 자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석장비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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