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29 허응 보우 스님
“이 몸 바쳐 법등 밝힐 수 있다면 무얼 주저하랴”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은 욕망의 충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때로는 무소유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허응당 보우(虛應 普雨, 1507?~1509) 스님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보우 스님은 어느 원로학자의 말처럼 ‘몰상식하고 문화의식이 결여된 유신(儒臣)과 유생(儒生)의 만행과 역사적인 범죄가 극에 달했던’ 비운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유생들은 사찰을 불태웠고 사찰의 재물과 보물을 약탈해 갔다. 스님들은 사대부들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고 사찰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예의가 없다는 구실로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해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국가권력은 한 술 더 떴다. 똑같은 하늘 아래 백성이건만 도첩이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키고 승과를 폐지함으로써 승려가 되는 길을 차단했다. 특히 연산군은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와 교종의 본산인 흥덕사를 연회소로 만들고, 원각사는 기방으로 만들기도 했다.
보우 스님은 이런 법란의 시대에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던 고승이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용문사로 입산한 스님은 1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에서 본격적인 사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금강산에서의 정진으로 큰 깨침을 얻은 스님은 그후 주머니 속 송곳이 드러나듯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다.
1551년 6월, 흥법을 발원했던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봉은사 주지 및 선종판사에 임명된 스님은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다. 특히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이끌고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배출에 힘썼다. 서산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이었다.
유생들의 끊이질 않는 질시와 모함. 그 속에서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불교중흥에 헌신했던 보우 스님. 하지만 1565년 6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6월 스님은 제주도로 귀향가야 했고 그해 10월 경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됐다.
▷스님의 삶은 명종 임금의 어머니이신 문정왕후의 삶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 같은데 문정왕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연산군과 중종 임금을 거치며 불교는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게 됐고, 승려들은 도둑으로 절은 이단의 소굴로 취급 받게 됐지요. 대신과 유생들의 극렬한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후께서는 거센 반대여론을 친히 감수하시면서까지 매번 용기와 결단으로 불교 부흥을 위해 헌신하셨다오. 그 분은 보살의 화신이십니다.”
▷문정왕후께서 사신을 통해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셨을 때 스님은 ‘왕후의 조서에 처음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고 귀를 씻고 못들은 것으로 하려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직책을 맡으셨나요?
“나는 지병으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오. 또 법랍으로 보더라도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도 많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이 병든 산승일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요. 그 길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그건 내 바람일 뿐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고 불보살님과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아는데 어찌 피할 수 있겠소이까.”
▷스님이 선종판사가 되기도 전에 스님에 대한 비난과 함께 처벌하라는 상소가 조정에 수북이 쌓였습니다. 이를 조사한 어느 논문에 따르면 ‘그 무렵에 무려 446건의 상소문이 폭탄처럼 올라왔다’고 하니 이를 지켜보는 스님의 심정이 참담하셨겠습니다. 그런데 왜 유학자들은 스님을 그토록 미워한 걸까요?
“나에 대한 것보다도 불교에 대한 미움이 더 컸겠지요. 허나 불교와 유교 사이를 서로 구분해 배척하는 건 편견이고 망상일 뿐이란 걸 모르지요. 공자, 노자, 부처님이 말씀한 근원이 둘이 아님에도 우열을 두어 배척하는 것은 이기심에도 비롯된 것이라오.”
▷제가 보기에도 스님께서는 참으로 맑고 고결하게 사셨던 것 같습니다.
“요승이다 괴승이다 소리를 죽을 때까지 들었는데 그건 어인 말이오?”
▷당시 교종판사였던 수진 스님도 주변의 일로 2년도 못돼 중도하차하셨습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음에도 이들의 상소 내용은 서울에 흰 무지개가 떴다느니 함흥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으니 그것이 요망한 스님 때문이라고 하는 치졸한 수준이니까 말입니다.
“이 한 몸 바쳐 불교가 일어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남들이 옳다 그르다 하든 그게 무슨 관심거리겠으며 어떤 다른 욕심을 내겠소. 더욱이 임금을 위해 불교 배척함이 진정한 선비의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난 부처님 받들고 그 선비마저 존경함이 바로 불가의 가풍이라 본다오. 다만 내가 크게 상심한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몇몇 스님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내가 허물이 있다고 성균관에 가서 얘기하고 거짓 잘못을 만들어 임금께 상소를 올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마음 아프다오.”
▷그렇겠군요.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래도 스님께서 불교부흥을 위해 진력하신 후 불교계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같은데 어땠습니까?
“처음에 텅텅 빈 사찰이 많았는데 도승제와 승과제 영향으로 주지가 있는 절이 99개에서 395개로 크게 늘었지요. 그간 침체됐던 교학과 선풍이 구름처럼 일어나 각 사찰에는 승과를 준비하기 위한 경전공부도 대단했다오. 하지만 무엇보다 승과제도로 탁월한 인재들에게 승려로서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점이겠지요.”
▷스님께서는 선종판사로 6년간 소임을 맡으신 뒤 청평으로 물러나신 몇 년 뒤 다시 복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스님께서 ‘떨어진 가사 한 평생이 참다운 삶의 길이라. 짧은 지팡이로 천릿길 어정거림이 좋다네’라는 스님의 싯구처럼 살면서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면 훗날 귀양 가 죽임을 당하는 그런 비극은 없었을 거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왜 돌아오셨나요?
“젊은 휴정 스님이 교종과 선종판사를 맡은 지 두 해만에 그만뒀습니다. 상상키 어려운 질시와 모함 속에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그렇다고 그에게 더 맡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문정왕후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리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았으니까 말이오. 유능하고 사려 깊은 젊은 인재가 희생양이 되느니 살 만큼 산 내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소. 그 마지막 길이 무엇이든.”
▷『이조불교』를 저술한 다카하시 도오루(1878~1967)라는 일본의 학자조차 스님을 일컬어 ‘신라 고려 조선 삼대를 통해 가장 뛰어난 고승의 한 분으로 스님이 한 일은 실로 표표하여 조선불교사에 불멸의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스님이 계셨기에 조선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성품이 느리고 또 병약할뿐더러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선종판사직을 맡은 동안에도 종종 번민과 갈등에 빠지곤 했소. 그러나 매번 선택에서 나는 ‘옳음’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지요. 그게 뒷날 행인이 밟고 건널 나룻배가 됐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요.”
▷조선의 사관들은 스님의 입적했다는 소식에 ‘모든 백성이 구름을 헤치고 밝은 태양을 보는 것 같으니 그 쾌락이 어떠하랴’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모진 편견과 핍박 속에서도 스님께서는 참다운 수행자의 상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한 개인이나 종교가 흥하고 성하는 것은 상대의 성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됐다고 말씀하셨소.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인욕과 자비를 의지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불교의 힘이고 위대함입니다.”
박영기 『순교자 보우선사』, 이종익 「보우대사의 중흥불사」, 김영태 「보우 순교의 역사성과 그 의의」, 강석근 「화쟁적 관점에서 바라본 두 승려의 행적과 시문학-충지와 보우를 중심으로」, 김기령 「허응당 보우의 유불관계론 고찰」, 서규태 「보우의 문예사상」 등
보우 스님 어록
“병 앓은 뒤 겨우 머리 들기를 배우고 있는데/ 왕후의 조서 구름 깊은 언덕에 온 소식 놀라며 들었노라/ 담장을 넘어 도망치자니 공손한 도리가 아니고/ 귀를 씻고 못 들은 것으로 하자니 세상을 피해 사는 허물이라/ 멀리서 온 사신은 오경에 범 같은 석장으로 재촉하여/ 북풍 불고 잔설 덮인 양주땅을 지나왔네/ 석양에 얼음 위 청담의 물 건너서 선원에 들어오니/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께 부끄럽기만 하여라.” (허응당집 중)
“불교가 쇠하고 박함이 올해보다 심한 적 없어/ 몰래 흘리는 피눈물 수건에 가득 적시네/ 구름 속에 산 있지만 어느 곳에 자취를 의탁하며/ 속세에도 이 몸뚱이 용납할 만한 땅이 없네/ 참담하고 부끄럽게 사는 우리 무리만이 복이 없어 태평한 세월에 오히려 불평 많은 사람이 되었네.” (허응당집 중)
“도란 본래 자주 옮겨지는 것/ 내 어찌 자연을 어기겠는가/ 강 흐름 깊으면 깊게 물을 건너고/ 개울물 얕으면 옷자락 걷고 건너지/ 외로운 지팡이는 여기보다 알맞은 곳 없으니/ 오고감은 인연에 맡겨 두네.” (허응당집 중)
“허깨비가 허깨비의 고을에 와서/ 오십년이 넘도록 미친 장난쳤구나/ 사람의 세상 영욕의 일 다 치르고/ 이 허깨비 승려 몸 벗어나 넓고 푸른 하늘로 오르리라.” (허응당집 중)
찬탄과 공경
“보우 스님께서는 눈에는 색(色)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가 있고 귀에는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가 있다. 그러므로 스님은 항상 말과 행동과 용모가 한결 같았다.” (휴정 스님)
“우리 (보우) 대사께서는 동방의 외지고 좁은 땅에 태어나 백세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다. 이를 상고하여 논하건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신 분이라 하겠다.” (유정 스님)
“이미 국가로부터 몰수 당하여 없어져 버린 선·교 양종을 다시금 되살리기 위해 헌신한 보우 스님의 업적은 조선왕조 반천년의 불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스스로의 모든 것을 교단중흥을 위해 바친 성사(聖師)였다.” (김영태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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