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slowdream 2008. 3. 5. 14:34
 

[벗님 글방 / 원철 스님]


대유학자 고승 문호들에 숱한 ‘상징’으로 만개

퇴계선생은 죽어가며 유언으로 “매화에 물 줘라”


내 전생에는 밝은 달이었지(前身應是明月)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幾生修到梅花)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한다. 매화를 주제로 한 시가 백 여편에 이르며,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기생 두향(杜香)이 연모의 증표로 준 청매화를 21년동안 애지중지 키울 정도였다. 물론 둘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리고 좌탈(坐脫)하면서 마지막 유언은 “매화에 물 주어라” 고 하였다니 수행자로서뿐만 아니라 가이 매화 매니아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몇 생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 매화로 환생하길 발원했던 것이다.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수세기 걸쳐 두고두고 좌우명으로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申欽1566~1628)은 그의 저서 《야언(野言)》에서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명언을 남겼다. 많은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이 말에 힘을 얻어 기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좌우명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교보문고 창립자인 신용호 회장과 수필가 피천득 선생도 항상 이 구절을 곁에 써놓고서 애송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황벽선사는 여기에 더하여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 없이(不是一翻寒徹骨)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없다(爭得梅花撲鼻香)”고 한 바 있다.


남송의 유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권6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니의 오도송이 기록되어 있다. 여성수행자 특유의 섬세함은 이 시 속에서도 충분히 느껴질만큼 아름다운 시이기도 하다. 물론 매화는 깨달음의 매개체인 동시에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봄(깨달음)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오니 집안의 핀 뜰안의 매화를 보고서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매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 이름 모를 비구니 오도송에 아름다운 시로 ‘환생’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盡日尋春不見春)

짚신이 닳도록 산 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네(芒鞵踏遍隴頭雲)

지쳐서 돌아오니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歸來笑拈梅花嗅)

봄은 여기 매화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春在枝頭已十分)



혜능 행자가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전해받고 도망칠 때 등장하는 대유령 역시 중원에서 매화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은 강서성과 광동성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이다. 당나라 현종은 장구령(張九齡)을 보내 대유령 길을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대문호인 그는 길을 만드는 토목공사에 그치지 않고 인근에 많은 매화를 심어 서정적인 분위기까지 함께 만들었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여수(旅愁)를 달래게 하였고 아름다운 매화꽃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고개이름을 매령(梅嶺)이라고 했다. 뒤에 송나라 문종은 채정(蔡挺)을 보내 그 길을 다시 손보도록 하였고 매관(梅關)이란 표석을 세웠다. 하지만 육조단경 속에는 대유령을 통과할 때 매화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쫓기느라고 매화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매화 피는 시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화두인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화두의 무대로서 선종사에 길이 빛나는 성지가 되었다.


눈이 먼저일까 매화가 먼저일까, 아니면…


매화는 눈과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로 친다. 그래서 설중매(雪中梅)라고 했다. 누구는 눈 속에서 매화가 피었다고 하고, 누구는 매화가 이미 피어 있는데 그 위로 눈이 내렸다고도 한다. 선후관계야 어찌 되었건 태고보우(1301~1382)선사의 ‘설매헌(雪梅軒)’ 선시는 설중매의 눈과 꽃이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섣달 눈이 허공에 가득 내리는데(臘雪滿空來)

추위에도 매화꽃이 활짝 피었네(寒梅花正開)

흰 눈송이 조각조각 흩어져 날리니(片片片片片片)

눈인지 매화인지 분간하기 어렵네(散入梅花眞不辨)



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