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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김정희 150주기전을 다녀와서

slowdream 2008. 3. 5. 15:56

 

[천천히 사유하기]김정희 150주기전을 다녀와서


-정격과 파격 사이 ‘秋史의 울림’-



                                                  

                                            추사의 말년 자화상


대도시에 살면서도 시내 나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소음도 번잡함도 부담된다. 나갔다 오면 어지러워 세수부터 하게 된다. 그래도 나가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다. 보고 싶은 전시회가 끝나고 있거나 그냥 돌아다니고 싶을 때. 지난 토요일 오후가 그랬다. 예술의 전당에 간 것은 한 가지 이유-추사 김정희의 자화상을 보고 싶어서였다.


추사가 남긴 것은 무엇이나 생기와 활력을 느끼게 한다. 면밀하면서도 호방하고 참신하면서도 어딘가에 뿌리박은 듯하다. 글씨나 그림, 논증과 편지 등 그가 손댄 모든 것에는 발랄한 정밀성이 배어 있다. 이것은 물론 내 아마추어적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더 자세히 논의돼야 하지만, 대충 보아도 추사의 규모는 가늠할 만하다. 이것은 이미 한 글자의 운용에도 있다. 곧고 굽은 선이나 굵고 가는 획의 형태는 때로는 그림 같고 때로는 도형 같다. 나는 추사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지난주 세상을 떠난 볼프강 이저(W. Iser)가 말한 것도 이런 것이었다.


야우스(H. R. Jauß)와 함께 ‘수용미학’을 정초한 이저는 작품의 의미란 수용자의 해석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수용자의 자의성을 강조한 측면도 있지만, 작가만큼이나 독자도 작품의 의미형성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니까 작품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드러내고, 그래서 독자는 이 ‘빈 자리’를 채우는 능동적 역할을 한다.


이런 불확정적 의미구조는 문학을 넘어 예술일반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작품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다면, 이 영향력은 곧 작품의 호소력이면서 감상자가 만들어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은 내가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채울 때 하나의 ‘사건’이 된다. 추사의 말년 자화상은 내게 사건과도 같은 체험이었다.


낡은 탕건을 쓴 한 노인네가 화면의 아래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눈언저리와 뺨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져 있고, 두 눈 밑에는 깊은 그늘이 서려 있다. 수염과 구레나룻은 아무렇게나 자라 있고, 얼굴의 핏기도 빛바랜 옷처럼 사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눈매는 빛을 발하며 앞을 응시한다. 모든 것을 허무는 시간의 엄습을 시선은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인가. 노인은 액자 밖으로 사라질 듯하다.


이 자화상은 소치 허련이 그린 다른 초상화들보다 더 핍진하게 추사의 말년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편지 쓸 종이조차 없던 과천 시절 추사는 자기의 천한 몸이 무뎌져 갈수록 어리석고 염치 없어진다고 탄식했다. 이 그림은 그 퇴락의 시간에서도 자신을 직시하려 했던 어떤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였을까. “이 사람을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다. 나이고 나 아닌 것 사이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하하.”


이 자화상은 한때 진위시비 속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찬을 내가 처음 읽었을 때 추사가 아니라면 이런 글은 쓸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시인도 이렇게 쓰기는 어렵다. 현실의 투시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렇게 투시하는 내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면, 이 의지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부질없는 의지도 ‘부질없다’고 표현될 때, 그것은 허무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 초월 속에서 나와 세계, 예술과 시간의 경계는 이미 없다. 그러니 표현된 것에 무슨 말을 더 보태며 무엇을 또 뺄 것인가. 적거나 그린 모든 것은 삶에 아무 것도 아니면서 실존의 전부가 된다.


추사에게 자기경계와 도량, 사실직시와 운치, 준엄함과 유머는 마치 연암에게 그러했듯이, 둘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늘 정격(正格)과 파격(破格)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스스럼없는 정신이 어느 한 편에 치우쳤다면, 그의 글은 이다지 큰 울림을 못 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 울림은 학문과 생활, 예술과 삶이 어긋나지 않은 데 있을 것이고, 작게는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는(自不欺心)’데서 올 것이다. 옛 것을 익히며 새 것을 만들어내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도 이런 철저함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근원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다. 최상의 예술가에게 모든 것은 낱낱의 것과 융회관통(融會貫通)한다.


남은 것은 추사의 성취를 오늘의 세계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몇 단계의 절차를 요구한다. 우선 실증적 문헌분석이 있어야 하고-여기서 한학자의 도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각 분야에서의 정밀한 논의가 축적되어야 하며, 이들 분야를 종합시킨 포괄적 관점의 해석사가 더해져야 한다. 추사 개인과 사회역사적 배경, 예술과 현실의 관계는 그런 통합적 해석의 예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바탕 위에 150년전의 추사학을 오늘의 생산적 에너지로 변용시키는 일이다. 이 서너 가지 요소들이 ‘동시에’ 구비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해석과 문장, 식견, 그리고 사상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한다면 추사의 현대적 재구성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이 작업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추사상(秋史像)까지 포함해야 한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추사는 오늘날의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전시관에서 나와 지하철을 탄다. 한강 철교를 지날 때 나는 도록 대신 밖을 쳐다본다. 서쪽 한쪽으로 구름이 걷히면서 햇살이 나고 있다. 가만 보니 오늘 처음 하늘을 본 것 같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고 했던가. “작은 창에 볕이 많이 드니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네.” 9년의 유배생활 후 추사가 예순 무렵 쓴 글이다.


학교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추사처럼 나도 볕드는 창가에 잠시 앉는다. 그리고 밖을 가만히 쳐다본다. 짧은 해가 곧 지면 마른 나뭇가지 하나 제대로 못 볼 것이다. 잦아드는 햇살 아래 나는 ‘추사의 여러 다른 나’를 떠올린다. 추사전은 이달 25일까지 계속된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