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효 칼럼]진정한 학문은 알음알이가 아니다
옛 중국 대선사 대부분 교학의 대가
학문 무시 풍토서 선종 열매 못맺어
가끔 학문을 알음알이로 평가절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어떤 스님들의 법문을 듣게 된다. 중국 선종의 영향으로 학문을 통하지 않고 참선으로 인심(人心)에 직입하여 문득 견성하려는 마음가짐이 이론적 학문을 알음알이로서 밀어내는 것 같다. 달마대사가 같은 인구어(印歐語)권인 서양으로 가지 않고, 전혀 언어가 다른 중국으로 온 까닭은 부처님의 심법을 한자문화권에 씨뿌리기 위해서겠다. 아마도 그는 한문의 직관적이면서 간명하고 포괄적인 사유가 분석적이고 분절적인 인구어보다 더 불심의 본질을 전파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더구나 중국에는 이미 노장사상이 불심을 토착하는데 비옥한 토양을 가꾸고 있었기에, 대번역가인 서역인 구마라습 스님의 제자였던 승조(僧肇)스님이 불교사상을 노장사상과 잘 습합(習合)해 놓았다. 이런 역사의 선업이 작용하여 대선사들의 황금시대가 중국(당송시대)에 열렸겠다.
그러나 그 중국의 대선사들은 거의 대부분 먼저 교학의 대가들이었다. 선의 황금시대는 화엄종과 천태종 계통의 찬란한 고승들의 훈습을 받아 이루어진 토양에서 움텄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없는 무식한 풍토에서 선종의 열매를 맺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가의 삼조 승찬대사의 ‘신심명’이나 육조 혜능대사의 ‘단경’이나 영가스님의 ‘증도가’ 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고 깊은 철학적 통찰력이 없이 생길 수 있는 글이 절대로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정도(八正道)가 불법의 신행생활의 기본 지침이 되겠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로 시작되는 팔정도는 불자로서 부처의 길을 밟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다. 먼저 정견은 이 우주의 사실을 바로 보고, 그 다음에 그 사실에 대하여 올바로 사유하고, 이어서 올바른 법칙으로서 우주의 사실을 바로 말하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우주의 사실을 바로 볼 줄 모른다. 사실이라면 중생들은 객관적 사실만 생각한다.
객관적 사실은 중생들의 주관적인 아전인수의 태도를 배격하기 위하여 오직 증명가능한 물증들만을 다루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정견이 봐야 할 사실은 우주적 사실로서 우주의 일체존재가 마음으로서 서로 상입상즉하는 상관성을 뜻한다. 정사유는 그 상입상즉하는 상관적 사실들을 제대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논리의 사유는 중생들의 객관적 논리와 다르다. 부처님은 이 상관적 사실들을 사유하여 ‘연기법(緣起法) 즉 개공법(皆空法)’이라는 법칙으로 논리화했다. 정어는 이 법칙을 세상이 제대로 인식하도록 말하는 단계를 말한다. 정어는 단순히 나쁜 어업을 짓지 않기 위한 도덕적 말하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정어는 우주의 사실과 그 이법을 제대로 왜곡하지 않고 말하는 길을 말한다. 그래야만 중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논서를 지은 고승들은 이 정견과 정사유와 정어를 위해 애쓴 대학자들이었다.
불자가 되는 길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우주적 사실과 그 이법, 그리고 제대로 철학적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들이 아전인수격 주관적 감정과 객관적 사실들의 제한적 시야에 갇혀 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불교가 수행근본주의(수행원리주의)에 너무 빨리 빠져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생각을 교조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많은 수행자들이 정녕코 참선수행에 직입하는데도 확철대오한 선지식들이 희귀한 것은 학문공부를 혹시 알음알이로 멀리 한 것과 무관한 것은 아닌지? 외도들의 철학도 알음알이가 절대로 아니다. 진정한 철학적 사유의 일가견을 이룬 외도의 철학자도 불법의 길을 비쳐준다. 문제는 얼마만큼 학문적 사유를 자기화 했는가 하는 정도에 달렸겠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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