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풍자-분노 내려놓고 여유를 입은 뒤 비수를 품다

slowdream 2008. 5. 4. 14:07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6) 풍자-분노 내려놓고 여유를 입은 뒤 비수를 품다

 

 

누이야 / 풍자(諷刺)가 아니면 해탈(解脫)이다.

 

-김수영, ‘누이야 장하고나!’

 

  1961년 8월, 5·16군사정변 직후 발표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나는 이렇게 푼다. 삶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또는 운명)과 부딪침의 연속이다. 그 불가해함과 부조리함에 눈을 감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맞설 수밖에 없다. 해탈은 결국 죽음 아닌가! 하지만 나는 약하고 상대방은 강하니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하다. 풍자는 약한 내가 거대한 힘과 효과적으로 대결해가는 방법이다. 풍자는 약자의 선택인지라 승리는 어렵다 해도, 나의 실존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최소한 패배는 아니며, 아주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역사의 승자가 되기도 한다. 해탈만 있는 세상은 죽음만 있는 세상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조선 창업 직후 태조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자리를 가득 채운 공신들 대부분은 고려 적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새 왕조의 공신들 잔치이니 그 장한 분위기야 짐작할 만하다. 자리에선 기녀 설매(雪梅)가 술도 치고 노래도 하며 흥을 돋우었다. 취기가 무르익자 개국 1등 공신 배극렴이 설매를 희롱했다. “듣자니 너희들은 동가식 서가숙을 자주 한다는구나. 오늘밤은 나와 함께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 주위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밑바닥에서 온갖 세파를 겪은지라, 설매는 농이 통할 길을 만들어놓고 노련하게 응수했다.

 

  “어머나, 정말요! 먹을 자리 잘 자리 가리지 않는 천기니, 왕씨를 섬겼다가 이씨를 섬기는 대감과 무엇이 다르리까? 사리에도 마땅하니 기꺼이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배극렴은 낯빛이 하얘져 술잔을 떨어뜨리고 무리 속에 몸을 숨겼다. ‘연려실기술’ 등 여러 야담과 사서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다. 설마 설매가 그랬을까마는, 수백년 동안 사람들은 설매의 이름으로 철마다 배를 갈아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객들을 조롱해왔다.

 

  1484년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1415~1487)는 한강 남쪽 가에 정자를 짓고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아뢰었다. 정자 이름은 압구(狎鷗)라 했으니, 갈매기와 가까이 지낸다는 말로 강호에 은거함을 뜻한다. 성종은 그를 옛날의 명신에 견주며 작별의 시를 지어 주었다. 조정 문사들이 다투어 그 시에 화답하였다. 모두 축하와 덕담 일색이었는데, 뒷사람들은 그 중 최경지(崔敬止·?~1479)의 시를 으뜸으로 꼽았다.

 

  세 차례 부름 받아 총애가 두터우니 / 정자가 있다 한들 와서 놀 마음 없네 / 가슴속 끓는 욕심 고요케 하다면야 / 벼슬 바다 가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것을.(三接慇懃寵渥優, 有亭無計得來遊. 胸中政使機心靜, 宦海前頭可狎鷗.)

 

  처사의 맑은 이름은 얻고 싶고 작록(爵祿)은 버릴 수 없어, 겨우 한강 가에 정자 하나 지어놓고 그마저 찾지 않았던 가식을 조롱한 것이다. 한명회는 최경지를 미워하여 이 시만은 정자에 걸지 않았지만, 수백 편 중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최경지의 시 한 수뿐이다.(‘추강냉화’)

 

  심정(1471~1531)은 1519년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주역이다. 뒷날 그는 한강 가에 소요정(逍遙亭)을 지어놓고 다음 시를 새겨 걸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떠받치다가,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있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어느 날 밤 한 소년 협객이 들어와 머리채를 끌어 잡고, ‘부(扶)’와 ‘와(臥)’ 두 글자를 각각 ‘경(傾)’과 ‘오(汚)’로 고쳐 새길 것을 명했다. 시는 이렇게 바뀌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기울여놓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노라.(靑春傾社稷, 白首汚江湖)”(‘현호쇄담’)

 

  소년 협객은 공론이 빚어낸 형상이고, 이 이야기가 장강처럼 유전되어온 것은 바로 역사이다. 심정은 공을 세우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공성불거(功成弗居)의 처신을 흉내냈지만, 사직을 기울이고 강호를 더럽힌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공론과 역사가 살아있는 한 한 때의 허위와 가식은 달아날 길이 없다.

 

  박문수(1691~1756)가 병조판서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1737·8) 영조가 오군영의 장수들을 불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강화도 방어시설의 형편을 물었다. 장수들이 각각 자기가 맡고 있는 군영의 사정을 말하고 나자, 박문수가 나서 말했다. “신의 생각에 한양이 강화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군사들은 어차피 나아가 항복할 것이 뻔하니, 강화도 연미정(燕尾亭) 앞 뻘밭보다는 차라리 모화관(慕華館)의 깨끗한 모래밭에서 무릎을 꿇는 게 낫습니다.” 왕은 크게 웃었다.(‘송천필담’) 웃었다고는 하나, 슬픔이 배어있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웃음이다.

 

  김소행(1765~1859)의 ‘삼한습유(三韓拾遺)’에서 천군과 마군은 열녀 향랑의 환생(還生) 재가(再嫁)를 둘러싸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마군 측의 마모(魔母)는 치맛자락으로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치는데, 이는 여색을 상징한다. 천군 측에서 천라지망에 걸려 침 흘리며 정신 못 차린 군사들은 모두 유자들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전장에 나가기를 기피하고, 나갔다가 창을 거꾸로 들고 도망친 자들 또한 모두 유자들이다. 겉으로는 예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음행을 일삼고, 인의도덕만 앞세워 사회를 나약하고 가난하게 만드는 유자들에 대한 조롱이다.

 

  과장되게 의리와 명분만을 내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만 바라보았다. 이후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라고 떠받들다가 청나라로부터 ‘아녀자의 나라’라는 조롱을 들었다. 청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핏대를 세웠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렸다. 열강의 세력이 미쳐오자 청나라만 바라보았고, 러시아까지 끌어들였다. 일제가 망하자 그렇게 망할 줄 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후예들은 오늘날 일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일언척구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이들이 내세운 건 언제나 숭고한 명분이었지만 속으로 챙긴 건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이었다. 전쟁 불사 등의 강경론을 펼쳤으나 활 한번 잡아본 적이 없고, 배에 물이 새면 먼저 달아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박문수와 김소행의 이야기가 아직도 뼈저린 이유이다.

 

  박지원은 북경에서 열하를 가는 도중 건장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리는 청나라 군사의 모습을 보고, 잔약한 과하마를 타고도 견마를 잡히며 그나마도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처연하게 돌아보았다. 달리지도 못하고, 유사시 전장에서도 쓸 수 없는 선비들의 말은 쇠미한 국력의 징표였다. 그는 말했다. “불과 몇 십년 안 가 베갯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 통을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날이 올 걸세.” 동료가 의아하여 말뜻을 반문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아서 너덧 해 지나면, 베갯속에서 우는 꼬마 닭이 되는데 이놈을 침계(枕鷄)라 한다네. 말도 역시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침마(枕馬)가 아니 되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열하일기’ 농을 했지만 촌철살인의 비수가 감추어져 있고, 말(馬)을 말했지만 말에만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식인들의 동종교배는 궁극에 침마와 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형의 인사들을 낳으리라는 이야기다. 침마는 과하마의 단계에서 또 한참 퇴보한 지식인들의 미래상을 예견한 것이다.

 

  북곽선생은 벼슬에는 관심 없는 듯 가장한다. 저술한 책이 1만5000권으로 천하가 그의 이름을 사모한다. 어느 날 밤 그는 같은 마을의 수절 과부 동리자의 방에 몰래 들었다가 쫓겨났다. 달아나다가 그만 똥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배가 출출하던 범이 지나다가 북곽선생을 보고 한바탕 준엄하게 꾸짖는다. 유자들이란 아첨이나 일삼으며, 인의와 문자를 내세워 서로를 잡아먹는 족속들이니 더러워서 먹지 않는다고. 똥은 그들 정신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속에 똥만 든 인간들이란 뜻이다. 한순간 1만5000권을 저술한 지식은 세상을 속이는 교지(巧智)가 되었고, 천하에 알려진 이름은 허명(虛名)이 되었다.(‘호질’)

 

  풍자가는 현세를 초월하는 숭고하고 엄숙한 가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 시선은 숭고함과 엄숙함의 이면을 투시하고 겉과 속, 말과 짓의 사이를 예리하게 파고들어 그 간극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더 나은 삶이다. 모순을 통찰하되 분노는 살짝 가라앉힌다. 한 호흡 쉬고, 한번 눙을 치고, 상황을 통해 허위가 절로 드러나도록 한 뒤, 살짝 몸을 빼 그림자를 거둔다. 참과 거짓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고상함에서 저급함으로 추락하는 속도가 빠르고 낙폭이 클수록 효과는 극대화된다.

 

  바야흐로 풍자의 시절이다. 시민들은 건전한 의식과 전문 식견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위선의 위정자와 지식인과 종교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풍자는 최소한의 비폭력 무장인 셈이다. 문학은 최소한의 무장을 해제했는가, 대상이 너무 많아 과녁을 잃은 것인가, 네티즌 논객들의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춤사위에 넋을 잃고 있는가, 아니면 이정표를 찾고 있는가?

 

  〈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