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8> 화두는? 목구멍의 밤송이 돼야
‘화두’라는 게 뭘까요.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일화 속에서 쟁쟁한 선사들이 내뱉었던 ‘한 마디’만 화두일까요. ‘무(無)’자라든지,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똥막대기’라든지 하는 말들만 화두일까요.
지난 주에 만났던 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죠. “화두는 목구멍에 걸린 밤송이가 돼야 한다. 삼키지도 못하고, 꺼내지도 못한 채 ‘퍽!’하고 내 목에 걸려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꺼내지 않고선, 지금 당장 풀어내지 않고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야 한다.” 그게 바로 ‘화두’라고 하더군요. ‘내 속의 절절함’이 없다면 ‘무’자를 들든, ‘마삼근’을 들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일전에 만났던 어느 처사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출가해서 10년간 화두를 들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습니다. 결국 내 몸에 병만 생겼죠. 그래서 환속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간화선’을 접었습니다. “너무도 비논리적”이라는 게 이유였죠. 그리고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짭짤한 재미’를 보더군요.
지난 주에는 한 외국인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스리랑카와 인도를 오가며 10년간 위파사나 수행을 하다가 한국의 선불교를 택한 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한국 선불교는 비논리적이라서 좋습니다. 논리를 통해선 결코 고통을 여읠 수가 없거든요. 남방불교는 끊임없이 ‘삶은 고통’이라고 되뇌는데, 한국 선불교는 ‘삼라만상이 완전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게 좋다”고 했습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A의 독이 B에겐 약이 되고, B의 독이 A에겐 약이 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화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봅니다. ‘화두’란 무엇인가요. 과연 당나라, 송나라 때의 선문답 일화에 등장하는 몇 마디만이 ‘화두’인가요. 역사 속에서 선사들에 의해 검증됐다는 이유로 무조건 ‘화두’가 되는 건가요.
저는 달리 봅니다.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숨 쉬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퍽!’하고 내 가슴에 박히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내 안에서 ‘꿈틀꿈틀’ 살아있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를 비움의 절벽으로 몰아가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화두’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깨달음을 향한 모든 절절한 물음을 ‘화두’라고 봅니다. 그게 ‘간화선’이든, ‘위파사나’든, 아니면 ‘제3의 방법’이든 무슨 차이가 있나요. 그 모든 수행법의 종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부처의 자리’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팔만사천 경전의 의미를 한코에 꿴다면 말입니다.
중요한 건 사람에 따라, 체질에 따라 좋아하는 ‘메뉴’가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21세기에는 수행법도 ‘골라 먹는 뷔페식’이 돼야한다고 봅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듯, 비워야 할 삶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메뉴를 준비해야죠. 채식을 하는 이에게 육식만, 또 육식을 하는 이에게 채식만 강요해선 곤란합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메뉴도 갖추고, 선택권도 줘야죠. ‘내가 걸었던 길과 다른 길’도 인정을 해야죠. 결국 구도의 종점에선 모든 길을 여의게 될테니까요.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입적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말했죠. “왜 이리 슬피 우느냐. 너희가 내 가는 곳을 안다면 이렇게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죠. 간화선이든, 위파사나든, 그 종점을 안다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내겐 어떤 게 쉽고, 빠르고, 확연한가. 그걸 택하면 그만이죠.
백성호 기자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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