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착한 글들

해학-마음의 상처 다독이며 삶을 구원하는 웃음의 미학

slowdream 2008. 4. 21. 16:19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⑭


해학-마음의 상처 다독이며 삶을 구원하는 웃음의 미학



박공습은 빈한해도 술을 좋아했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술이 없어 영통사에 사람을 보냈다. 영통사 승려는 두루미에 시냇물을 가득 담아 마개를 단단히 하여 보냈다. 박공습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두 말 미주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마개를 열어보니 물이었다. 박공습은 크게 웃고는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손님이 왔는데 / 주머니엔 무일푼이라 / 여악(廬岳)의 술을 얻으려다 / 허랑히 혜산(惠山)의 샘물만 얻었으니 / 범처럼 생긴 숲속 바위요 / 벽 위의 활이 만든 뱀 그림자라 / 푸줏간 앞만 지나도 크게 입맛 다시거늘 / 하물며 술잔을 앞에 두었음에랴.


여악(廬岳)은 고승 혜원(慧遠)이 도연명 등 산 밖의 벗들이 찾아오면 술을 대접했다는 산이고 혜산(惠山)은 차를 달이기에 가장 좋다는 물이 있는 곳이다. 한나라 장수 이광(李廣)은 사냥을 하다 바위를 범으로 알고 활을 힘껏 쏜 적이 있으며, 진나라 때 악광(樂廣)을 찾아온 손님은 술잔 속에 비친 활 그림자를 뱀으로 착각하고 마신 뒤 배앓이를 하였다. 모두 두루미 속 가짜 술을 일컬은 것이다. 괘씸한 심정을 숨긴 채 천연덕스럽게 옛 사연을 늘어놓은 뒤, 빈 술잔을 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고 있노라고 했다. 영통사 승려는 빙그레 웃고는 좋은 술을 가득 담아 보내주었다.(‘파한집’) 이럴 때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선조 때 이옥봉은 서녀였는데 총기가 넘쳤다. 하루는 이웃 아낙이 찾아왔다. 남편이 소도둑으로 몰려 관아에 갇혔다는 것이다. 옥봉은 대신 소장을 써주었는데, 그 말미에 두 구절을 붙였다.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온대 /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리오.(妾身非織女, 郎豈是牽牛.)” 그 수령은 남편을 풀어주었다.(‘지봉유설’) 꾸며낸 말이겠지만, 세상의 각박함이 덜어지는 느낌이다.


북경에 사신 갔던 문사가 하루는 수레를 타고 가는 미인을 보았다. 문에 기대 넋을 놓고 바라보던 그는 문득 필묵을 찾아 두 구절 시를 적어 보냈다. “마음은 미인을 따라 나서고 / 몸만 덩그러니 문에 기댔네.(心逐紅粧去, 身空獨倚門.)” 그 미인은 수레를 세우고는 그 자리에서 답시를 지어 주었다. “수레 무겁다 나귀 성을 내더니 / 한 사람 넋이 더 탔던 거군요.(驢嗔車載重, 却添一人魂.)”(‘어우야담’) 인생이 즐거워진다.


유희춘(1513~1577)과 송덕봉(1521~1578) 부부는 오랜 벗처럼 사이가 좋았다. 1569년 겨울의 일이다. 유희춘이 승지로 있으면서 엿새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모주(母酒) 한 동이를 아내에게 보내며 시 한 수를 덧붙였다.


눈 내려 바람 더욱 차니 / 냉방의 당신 모습 생각났다오 / 이 술이 품질은 변변찮으나 / 찬 속을 덥히기는 충분하리다.(雪下風增冷, 思君坐冷房. 此료雖品下, 亦足煖寒腸.)


송덕봉도 남편에게 답시를 보냈다.


국화잎에 눈발이 날린다 해도 / 은대에는 따스한 방이 있으리 / 추운 집서 따스한 술을 받들어 / 고맙게도 뱃속을 채웠답니다. (菊葉雖飛雪, 銀臺有煖房. 寒堂溫酒受, 多謝感充腸.)


대궐 숙직 중 생긴 술 단지 하나를 아내 몫으로 챙겨 시와 함께 보내준 남편과, 그 술을 마시고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세워놓고 몇 줄 시를 엮어 보내는 아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배려가 없이는 지어지기 어려운 풍경이다. 술을 보낸 유희춘의 마음도, 술을 마신 송덕봉의 마음도, 이 풍경을 상상하는 나의 마음도 흐뭇하다.


프로이트는 두 종류의 농담을 구별했다. 하나는 속이고 놀리는 목적을 지니며, 때리고 벗기는 공격과 파괴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농담과 웃음은 자주 상처를 남긴다. “낚시질은 한가한 일이지만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으며, 바둑은 맑은 놀이지만 전쟁의 마음이 꿈틀댄다.(釣水逸事也, 尙持生殺之柄, 奕棋淸戱也, 且動戰爭之心.)”는 ‘채근담’의 구절처럼 말이다. 한때 유행했던 참새와 식인종 시리즈에서는 살해와 식인이 놀이처럼 자행된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잔인한 폭력을 내면화했던 것이다. 폭압이 사람들을 짓누르던 시절의 일이다.


다른 하나는 순진하여 무해한 농담인데, 이것이 바로 해학(諧謔)이다. ‘해(諧)’는 어우르다, 어울리게 한다는 뜻을 지녔다. 학(謔)은 우스갯소리(농담)이다. 해학은 이질적인 것들을 어울리게 하고 어색한 사이를 조화롭게 하는 농담인 것이다. 여기에는 약점을 까발리고, 등 뒤에서 조롱하는 공격성이 없다. 상대방의 아픔에 연민을 보내고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욕망, 이것이 해학의 마음이다. 박공습과 영통사 승려, 이옥봉과 고을 수령, 문사와 북경 아가씨, 유희춘과 송덕봉은 아주 우아한 해학을 나누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더 넉넉해지고, 그들의 사이에 온기가 흘렀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웃음뿐이다. 민중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귀족들을 원하는 것은 신(神)이고 권위며 이름이다. 그들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어 숭고한 가치를 좇는다. 그들에게 농담은 천박한 것이 된다. 반대로 민중들은 당장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하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더 자주 더 크게 웃으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생각해보라. 민중들이 전승시켜 온 이야기들의 태반은 해학담이다. 그들은 해학을 징검다리 삼아 오랜 세월을 견뎌왔는데, 그 다리의 많은 부분은 문학이 놓은 것이다.


이도령은 버들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춘향에 반하지만 방자의 태도가 녹록지 않다. 애가 탄 이도령은 방자를 형님이라 부르며 애원한다. 방자는 아우 이도령에게서 단단하게 다짐을 받고 나서야 걸음을 옮긴다.(‘남원고사본 춘향전’) 이춘풍은 주색으로 가산을 탕진하고도 정신을 못 차려 호조 돈 2000냥을 빌려 평양으로 장사를 떠나지만, 평양 기생 추월에게 빠져 기방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한다. 비장(裨將)으로 변복하여 평양에 간 그의 아내는 춘풍을 잡아 형틀에 올려 매고 추상같이 호령한다. “이 놈 들어라, 네가 이춘풍이렷다. 사정없이 매우 쳐라!” 춘풍은 울며불며 목숨을 구걸한다.(‘이춘풍전’) 주색이 과도하여 병이 골수에 든 남해 용왕 앞에 현신 별주부는 온갖 지혜로 토끼 한 마리를 용궁으로 데려오지만 용왕은 토끼의 말에 속아 충신의 간언도 듣지 않고 토끼를 돌려보낸다.(‘토끼전’)


세 편 이야기에서는 일상의 질서가 뒤집힌다. 관노 방자는 부사 아들 이몽룡의 형님이 되고,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휘둘리던 아내는 이춘풍을 꾸짖으며 매질을 하고, 지존의 용왕은 세상 물정에 깜깜한 바보가 된다. 설화에서도 탈춤판에서도 굿마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완고한 현실의 질서를 일순 흩뜨려 관계를 역전시켜 시원하게 웃는 순간 삶은 고통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해학에는 불균형을 교정하고 평형을 회복하는 힘이 있다. 이항복과 박문수와 정수동과 김삿갓이 오랜 세월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은 이유이다.


씩씩하고 부끄럼 타지 않고 점순이는 나만 보면 심술이다. 악담을 해대고, 저희 수탉으로 우리 집 수탉을 못 살게 군다. 분을 못 이긴 나는 점순네 수탉을 단매에 죽이고 걱정에 울음을 터뜨리는데, 의외로 점순은 부드러운 말로 달래주며 몸을 포개 넘어뜨렸다. 나는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 정신이 아찔해졌다. 점순은 남몰래 나를 좋아했던 것이다.(김유정, ‘동백꽃’) 생기가 돌아 따스하다.


나와 장인님과 점순 사이의 묘한 실랑이를 빚어내는 김유정의 손끝에서 악의라고는 찾을 수 없다.(‘봄·봄’)


목욕탕에 앉은 그 사내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몸짱들도 그 근처에서는 몸가짐이 조심스럽다. 그의 왼쪽 팔에는 ‘참자’, 오른쪽 팔에는 ‘착하게 살자’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독’)


 500점 하수의 도전을 물리친 1000점 당구 실력자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야말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 고수가 뒷정리를 하면서 신발을 벗고 부채질을 하는데, 그의 양말 엄지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나있는 것이다. 그의 가방에서 나온 양말들도 모두 그랬다. 의아해하는 내게 친구가 살짝 귓속말을 했다. “고수 체면에 몸을 쓸 수는 없잖아. 대신 구두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다 보면 양말이 이 모양이 된다네.”(‘고수’) 조폭의 고독과 고수의 고심에 보내는 성석제의 시선에도 따스한 해학이 농익어 있다.


앞에 닥친 한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긴박한 상황에서도 마음 구석에 한 치 자리를 남기는 여유, 그리고 우울과 슬픔을 걷어내려는 따스한 배려에서 해학이 발생한다. 상처를 주지 않고 웃음을 일으키는 것이 해학이다. 그것은 활을 쏘지 않고 적장을 사로잡고, 약을 쓰지 않고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그윽한 통찰과 무궁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야말로 문학의 소임 중에서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순진하여 무해한 농담이 바로 해학(諧謔)이다. ‘해(諧)’는 어우르는 것이고 ‘학(謔)’은 농담이다. 해학은 이질적인 것들을 어울리게 하고 어색한 사이를 조화롭게 하는 농담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약점을 들추고, 등 뒤에서 조롱하는 공격이 없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우리 모두를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해학의 마음이다.


〈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