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태어나는 자리]⑮
분노-노여움 곰삭여서 문장으로 풀어내 세상을 바꾸는 힘
기원전 92년쯤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던 임안(任安)은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에게 현사(賢士)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임안은 적극적인 간언으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 바깥 출입을 삼가며 ‘사기’의 저술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편지를 받고 고심하던 사마천은 붓을 들었다. 편지는 길어졌다. 사마천은 자신이 궁형을 당하게 된 경위와 그 이후의 참담한 심정을 절박하게 풀어냈다.
가난하여 속량 받을 돈도 내지 못했고, 사귀던 벗들 중에도 구해주러 나선 사람이 없었으며, 가까운 친지들조차도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선비들이란 땅을 그어 감옥을 만들어도 들어가지 않고, 나무를 깎아 관리를 삼아도 따지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행동에 앞서 득실을 따지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인정세태의 무상함은 물론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속으로는 득실을 셈하는 선비들의 이중성을 통절하게 깨달았다. 사마천은 절망했고, 그 절망은 깨달음을 낳았으며, 깨달음은 ‘사기열전’의 인물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피와 살이 되었다.
그는 욕된 삶을 견뎌 끝내 뜻한 바를 이룬 역사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문왕은 갇힌 채 ‘주역(周易)’을 풀었고, 공자는 횡액을 만나 ‘춘추(春秋)’를 지었고,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이 실명하자 ‘국어(國語)’가 새겨졌고, 손자는 다리가 잘린 뒤 병법을 정리했으며, 한비자는 감옥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다. ‘시경(詩經)’의 300편 시도 성현들이 발분(發憤)하여 지어낸 것이다. 이들이 오욕을 참고 물러나 문장으로 비분(悲憤)을 풀어낸 것은 후세에 자신의 뜻과 존재를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사마천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는 책이 완성되면 명산에 숨겨 ‘그 사람(其人)’에게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사기’ 130권이 완성되었고, 오늘 수많은 이들이 ‘그 사람’이 되어 무시로 사마천과 밀어를 나눈다. 사마천은 좌구명과 손자, 한비자 같은 선배들에게서 치욕을 창조로 전환시키는 힘을 얻었다. 그 힘이 바로 뜨거운 마음, 즉 분노였다. 그 이전에 공자는 자신에 대해 “뜨거운 마음이 일면 먹는 일도 잊는다(發憤忘食)”고 했고, 그 뒤로 이지(李贄·1527~1602)는 “분노 없이 지은 글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 격이니 지은들 무어 볼 게 있으랴”라고 했다.
‘수호전’에서 임충(林沖)은 본래 온후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환경, 즉 비교적 높은 사회적인 지위와 유복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내가 희롱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참아낸 것이나, 고구(高)의 음모로 유배를 떠나면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은, 모두 주류 세계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그에게는 기존 질서를 부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핍박에 분노가 폭발하여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다. 이로써 그는 귀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채 주류 사회에서 이탈하여 양산박으로 향한다.
양산박 두령 왕륜(王倫)은 특출한 무예나 도량도 없으면서 어쩌다가 녹림객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다. 그는 의심이 많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하며, 내세울 만한 명분이나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인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려 시기하여 내친다. 왕륜은 양산박을 찾은 임충과 양지(楊志), 그리고 조개(晁蓋) 일행을 차례로 박대하여 내쫓으려 한다. 분노를 삭이고 있던 임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왕륜을 척살한 뒤 양산박을 접수한다. 임충이 왕륜을 죽인 명분은 ‘심흉협애(心胸狹隘), 질현투능(嫉賢能)’ 여덟 글자이다. 도량이 좁아 어진 사람을 미워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시기한다는 말이다.
임충은 무능한 위정자를 징치하는 명분으로 왕륜을 처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목적과 방향 없는 도적들은 일순 부조리한 국가를 상대하는 의적들로 바뀐다. 무능하고 부패하며 인재를 버린다는 점에서 조정의 고구와 양산박의 왕륜은 같다. 위정자의 폭압으로 삶의 기반을 모두 잃고, 분노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권력에 맞서는 임충의 삶은 ‘수호전’ 호걸들의 삶을 대변한다. 이들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것은 공히 분노이다. 이들의 마음 뒤에는 작가의 분노가 숨어있고, 이들의 행동은 수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대신 풀어주었다. “난세의 음악은 원망하며 분노한다(亂世之音怨以怒)”고 했다. (예기)
마감동은 양반가의 사노 출신으로, 자기 아내를 범한 주인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달아나 구월산 화적떼의 부두목이 된 인물이다. 그는 장길산 일행을 털다가 외려 사로잡히고 만다. 감동의 마음에는 주류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과 뜨거운 분노가 들끓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임금과 재상은 화적보다 더 큰 도적놈들이고, 선비라는 것들은 이름이나 얻으려고 이 솟을대문 저 사랑으로 주린 개 장바닥 싸돌 듯하는 도적의 뇌수이다. 금세 뜻이 맞은 두 사람은 이후 부패하고 부정한 조정에 맞서나간다.(장길산) 1970년대 젊은 작가 황석영은 조선 숙종 시절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층과 지식인들에 대한 분노를 분출한 것이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하고, 허위와 부정이 공도를 가장하는 사회에서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들은 갈 곳이 없다. 맨손으로 범을 잡은 무송(武松), 70근 선장(禪杖)을 지팡이처럼 휘두르는 노지심, 80만 금군(禁軍)의 교두였던 임충은 양산박에 흘러든다. 표범처럼 날랜 장길산,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는 이갑송과 강선흥, 상술과 검술에 두루 능한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등은 구월산에 모인다. 이들 사이의 정직과 신의는 세상에서 통하지 않고, 출중한 용력과 무예는 살인과 방화에 쓰인다. 이들은 모두 쓰이지 않는 인재의 표상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리에 쓰이지 못하는 인재는 도적이 되기 십상이다.
연경을 다녀오고 네 해가 지난 1770년 홍대용(1731~83)은 집 근처에 작은 초가 정자를 지었다. 이름은 두보 시에서 빌려와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초정이라니, 운치가 넘친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가을 터럭을 크다 하고 태산을 작다 한 것은 장주(莊周)가 분격(憤激)해서 한 말이다. … 쇠미한 세상에 태어나 화란을 겪자니 눈이 아리고 마음 아픈 것이 이를 데 없다. … 언뜻 태어났다가 문득 죽어가는 것이야 하루살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 정자에 누웠다가 장차 조물주에게 이 몸을 돌리고자 한다.
긴 제목의 일부이다. 장자의 논법대로 초정이 건곤처럼 광대한 것이라면, 새로운 생각 하나를 수용치 못하는 조선은 더없이 비좁은 곳이 된다. 이미 세계 수준의 과학을 체득한 홍대용은 비좁은 조선 사회에서 운신할 길이 없었다. 그는 절망하고 분노했다. 예로부터 일군의 사람들은 ‘장자’에서 달관과 여유가 아닌, 지식인의 거친 분격(憤激)을 읽어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시대에 분격하던 사람들이다. ‘건곤일초정’은 자기 시대에 대한 참지 못할 분격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의 생각에 깊이 공명한 사람들은 혈기 왕성한 20대 서얼 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덕무와 유득공과 박제가이다.
마르쿠제(1898~1979)는 ‘1차원적 인간’(64)에서, 외적으로 계급 차이가 지워지고 사람들의 정신 활동이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통합되면서, 부정과 비판 의식이 사라지고 만 선진기술사회의 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청백리의 후손 마준은 취직을 위해 북촌 김대감 집을 드나들면서 차츰 세상의 허위와 비리에 관대해진다. 다 먹고 살기 위한 게 아니냐며 가치 판단의 눈을 감아버린다. (서기원·마록열전3) 이유야 어찌됐든 이제 중요한 건 적응과 생존뿐이고, 비판과 부정은 패배한 자들의 불평처럼 취급된다. 문인 학사들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판단, 참과 거짓의 기준, 그리고 먼 옛날과 먼 뒷날의 역사에 대한 고려는 당장의 밥그릇 논리에 묻혀버렸다. 문학은 개인의 내면과 가족의 애환만을 끌어안고 있으며, 문인은 더 이상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세상 또한 이제는 작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문학은 역사의 이정표와 사회의 거울 역할을 그친 것인가. 1710년 설악산 백담 계곡의 김창흡은 겨우내 공부하고 떠나는 제자에게 준 글에서 ‘노하여 떨치면 만 리를 솟구치는 대붕’과 ‘한번 노하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겐 노여움이 없을 수 없고, 그 노여움은 또한 자잘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 문학은 너무 말랑말랑하기만 하다. 이 시대 나는 다시, 더 많은 식견과 더 뜨거운 용기를 장착하여 역사와 사회를 맞대면하는 작품들의 출현을 기다린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하고, 허위와 부정이 공도를 가장하는 사회.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들은 갈 곳이 없다. 그 인정세태의 무상함에 절망하고, 그 절망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욕된 삶을 견뎌내고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룬다.
< 이승수 | 경희대 연구교수>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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