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활동가 도반 윤남진-한주영 부부

slowdream 2008. 6. 10. 17:29
 

활동가 도반 윤남진-한주영 부부


 

 

     윤남진 거사는 한주영 보살이 ‘최후의 의지처’라며 고마움과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한주영 보살은 윤남진 거사가 “팥으로 메주를 쑨 데도 믿을 것”이라며

남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부부란 도반이며 거울과 같다. 삶의 동반자이자 반려자로 때로 그것은 푸른 하늘을 비추기도 하고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인연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 약 15㎞)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가득 채운 겨자씨를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내도 끝나지 않는 겁. 8천겁의 선연으로 맺어진 부부의 인연은 그 만큼 소중하다. 비록 이혼 사례가 급증하는 오늘날 세태에 비춰보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아직도 부부의 연을 알알이 여물게 하는 재가 활동가들이 있다.


파주서 7년 째 선농일치 실천


윤남진(42·이공) 교단자정센터 정책위원장과 한주영(40·수선화) 불교여성개발원 사무국장. 이 재가 활동가 부부는 경기도 파주에서 7년 째 전세방을 얻어 텃밭을 가꾸며 (시)어머니, 세 자녀와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날을 만들어가고 있다.


윤 거사는 저녁 10시나 되어야 귀가하지만 하루 마감을 가족과 함께 한다. 아내 한 보살과 어머니, 첫째 민규(14), 둘째 민서(8), 셋째 민우(4)까지 빙 둘러앉아 하루를 점검한다. 오늘은 무슨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답하며 의견을 공유하고, 딸 아이 민서가 달라이라마 기도문을 읽는 가운데 모두가 기도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든다. 이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보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수행을 가족 이란 울타리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람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물론 가족 간 화목에도 한 몫 톡톡히 한다.


이와 함께 고구마, 파, 상추, 쑥갓 등 열다섯 가지나 되는 농작물을 텃밭에서 아이들과 함께 가꾸다 보니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이타심도 생겼다고. 한 번은 민규와 민서가 개미떼에 둘러싸인 애벌레 구출 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다. 개미에게 잡아먹히려는 애벌레를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윤 거사와 한 보살은 마음이 따듯해졌었다고 추억했다. 또 지난해에는 하루 100원씩 여섯 가족이 저금을 모아 민규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 후배 장학금으로 20만원을 보시하는 등 더불어 사는 삶도 가르치고 있다.


재가 활동가의 넉넉하지 못한 수입 탓에 생계가 어렵지 않을까.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니며 재래식 화장실에 방 한 칸 덩그러니 있는 곳에서 살았더랬다. 그러나 윤 거사와 한 보살은 이구동성으로 ‘그렇지 않다’였다. 지금 사는 집도 연탄보일러를 때는 탓에 겨울엔 하루 두 번 연탄을 갈아야 한다. 아궁이가 셋이나 돼 방독면을 쓰고 갈아야 하는 불편함은 답답함보다 탁 트인 자연과 호흡하기를 원하는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해 감수키로 한 것이다.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연탄을 때는 덕분에 오히려 절약했다고 윤 거사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렇다면 교육비 등 생활비는? 한 보살이 말을 거든다.


“사실 죽어라고 운동만하며 살줄 알았어요. 마치 정토행자들처럼요. 둘의 단체 활동비를 합해도 평균임금에 못 미치니까. 근데 지금은 시댁이나 친정에 용돈도 드리고 아이들 태권도, 피아노 학원도 보냈다니까요. 부처님 법에 의지하며 돈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요.”


이들이 귀농을 결심하며 부처님 법과 산, 그리고 물에 의지해 살게 된 것은 1994년 종단개혁 이후였다. 윤 거사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간사로 종단 개혁 일선에서 뛰었고, 한 보살은 1997년 남편의 소개로 포교분과위원회의 ‘재가불자를 위한 수행지침서’ 발간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1998년 사태를 지켜보면서 청정 승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절망감을 느껴 교계를 떠날 생각까지 하며 귀농을 택한 것이다. 또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친환경적인 대안학교와 주말농장, 수행공동체에 대한 부부의 목표를 위해서도 좋은 판단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제1기 대안학교 교사양성과정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에서 제4기 귀농학교를 수료하고 파주에 둥지를 튼 것이다.


10여 통 옥중 편지로 부부 인연


서로가 없으면 다리 한 쪽이 없는 의자처럼 삐걱댈 것 같은 이들 부부. 사실 윤 거사와 한 보살은 결혼 전 얼굴 한 번 마주한 적이 없었다. 동국대 불교학과 87학번인 한 보살은 보살의 삶을 연구하고 이 원동력을 민주화 운동으로 이끌어내려는 보살사상연구회 회장으로 불교운동에, 윤 거사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윤 거사가 3년 형을 구형받고 목포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할 무렵 둘의 인연이 싹텄다. 한 보살이 학교 선배의 권유로 고향인 무안도 들릴 겸 이름만 들어 알던 윤 거사를 찾아 온 것이다.


이후 10여 통의 편지가 오갔다. 한 보살은 불교공부를 하고자 했던 윤 거사에게 불교서적을, 윤 거사는 당시 석사 논문을 쓰던 한 보살의 논문을 편지로 도왔다. 1993년 출소한 윤 거사. 대뜸 한 보살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했고, 한 보살은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고. 아프가니스탄의 겨울의 첫 밤이자 1년 중 가장 긴 밤인 ‘옐다’. 이들 부부에겐 윤 거사의 옥살이가 연인이 오길 기다리며 지새는 별빛 하나 없는 ‘옐다’였는지도. 실상은 편지로 오간 서로에 대한 신뢰였으리라.


힘든 시절이 없었겠느냐 만은 서로의 고민을 몰랐을 때 더 힘들다고. 며칠 전 윤 거사는 파주 보광사로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1994년 조계종단 개혁 때 재가 활동가를 지극히 생각하시던 故 종태 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민주화 운동 때 두 번의 옥고를 치렀던 그였다. 때문에 혹여 정부가 주장하는 치밀한 배후세력(?)에 자칫 증거라도 되듯 지목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먼발치서 응원만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물대포에, 방패에 맞아 머리가 터져 피가 났다는 보도를 접하는 순간 대공분실로 잡혀가 강압된 허위자술서를 앞에 두고 삶을 고민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과거에 대해, 과거를 묻어버리는 방법에 대해 떠들어대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엉터리다. 아무리 깊이 묻어둬도 과거는 항상 기어나오게 마련이다. 하소연 할 길 없는 자격지심을 종태 스님에게 털어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비 주변에 무성한 잡초들을 보고 있노라니 ‘올 곧았노라’고 살아왔던 지난 삶들이 기억에서 잊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벌초하러 가기 며칠 전 아침. 퉁퉁 부은 남편의 눈을 봤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얼마 전 남편이 보낸 메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한 보살은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에게 ‘남편을 늘 사랑했고 늘 사랑한다’고 전해달란다.

“그냥 오순도순 살아요. 하루하루 고마워하며 서로를 만나게 해준 부처님과의 인연도 고맙고. 하하하. 좋은 날은 날마다 만들어 가는 것 같아요.”


친환경 수행공동체 조성이 꿈


부부는 얼마 전 지역아동센터, 방과후 교실, 공동육아 등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600평의 땅을 매입했다. 재가 활동 일선에서 물러나면 불교를 지역에 회향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둔 터였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도반은 수행의 전부’라고 하셨다. 이들을 보노라면 깨달음에 도달하는 일정한 규칙이란 없는 것 같다. 생활에서 수행, 수행에서 생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네들의 소소한 일상들. 학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맑은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어느 날 문득 찾아와 영혼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 깨달음이리라.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