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하늘이 감춘 땅] 간도 일광산 범바위

slowdream 2008. 7. 6. 03:26
 

[하늘이 감춘 땅] 간도 일광산 범바위


경허 맏상좌 수월 선사, 곳곳 유적·증언 생생

만해 한용운도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 기려



 


조국은 지척이었다. 두만강 너머 조국 강토를 품에 안은 곳. 90여 년 전엔 나라 잃고 울며 두만강을 넘는 유랑객들이, 지금은 굶주림에 지쳐 넘어오는 동포들이 가장 잘 보이는 중국 연변 도문시 일광산. 수월 선사는 바로 그곳에서 나라 잃고 고국을 등진 유랑객들을 맞고 있었다.


지난 26일 오후. 수월선사의 발자취를 찾아 한국 불자 120여명이 일광산을 찾았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함께 하고 나선 순례였다. 수월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자'였다. 더구나 1백년 전의 인물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좌장격인 지관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의 스님 등 120여명의 한국불자들이 먼 이국까지 직접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머슴살이 하다 출가…낮에 소 키우고 밤엔 짚신·주먹밥


수월은 충남의 어느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서산 천장암에 출가한 뒤에도 나무를 하며 머슴이나 다름없이 살았던 스님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천성을 지녔던 그는 스승 경허선사의 가르침대로 천수다라니를 일심으로 주력해 깨달았다. 그 뒤 수월은 세 가지 특별한 힘을 얻었다.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념지를 얻었고, 잠이 없어져 버렸으며,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이었다고 한다. 그 후 천장암을 떠나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이 절 저 절을 떠돌던 수월은 뜻하지 않는 방광(이적의 하나로 몸에 빛이 나 퍼져나감)으로 자주 정체가 드러나 조실로 추대되곤 했는데, 그러면 그는 다시 남몰래 길을 떠났고, 결국 1912년 이곳까지 건너왔다. 이곳에서 그는 낮에는 소를 키우고 밤에는 짚신을 삼고 주먹밥을 해 나라를 잃고 일제의 억압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오는 동포들을 위해 고갯길에 주먹밥을 쌓아놓고 먹이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아픈 발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노구를 이끌고 수월이 머물던 일광산 중턱의 화엄사 폐사터에 오른 지관 스님은 아직도 수월의 덕화를 잊지 못하는 연변의 조선족 불자 200여명의 염불 속으로 들어와 "수월 선사야말로 이 시대 불자들이 본받아야할 보살"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임을 내세우고 있다. 혼자만이 아니라 만중생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대승'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이다. 한국불교에선 여성 불자에겐 누구나 보살이라고 호칭한 만큼 보살이 흔하다. 그러나 말은 많지만 실천은 많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이들은 많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채 무주상보시(조건 없는 보시)를 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는 '대승 보살의 표본'으로 수월을 꼽았다.


지관 총무원장 선양 앞장…조선족들 정신 기려 신흥불당 열어



수월선사 선양 사업을 추진하다 갑자기 열반한 전임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에 뒤이어 2년 전 총무원장에 오른 지관 스님이 말없이 그 유지를 계승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절집안의 문중을 중시하는 불교계 풍토에서 수월선사와 같은 덕숭문중인 법장 스님의 유지를 용성문중인 지관 스님이 문중 일쯤으로 폄하하고 지나칠 수 있었지만, 그는 수월이야말로 한국 불교가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로 확고히 한 것이다.


따라서 총무원장에 부임하자마자 서울 강남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에게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방치돼 있는 간도의 수월선사 유적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그 뒤 봉은사 총무국장 진화 스님이 연변을 오가면서 수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선족들이 연길시내 중심가에 세운 신흥불당의 개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29일 조선족 불자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3층짜리 건물에서 개원한 신흥불당에서 지관 스님은 "왜 수월선사를 참된 보살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대승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달이 일천강을 비추더라도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수월 스님은 그런 보살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비의 화신인 수월관음보살처럼 자비의 그림자를 이곳 간도 땅 어느 한곳에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는 위대하신 성자입니다."


그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가르지 않은 대승보살 수월의 정신을 기렸다.


"우리는 나와 남을 가르고 작은 실천을 내세우는 일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천강에 모습을 드리운 달이 아무 말이 없듯이, 물 위에 비친 달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습니다."


남북 분단과 중국 국교 단절로 ‘잊혀진 전설’


수월은 근대 선의 영웅 경허선사의 맏상좌(첫 제자)이지만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사였다. 하지만 수월의 사제로,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선사는 생전에 "수월 사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면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냈고, 수월의 열반에 즈음해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펴낸 잡지에서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이신 수월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수월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인들 사이에선 대도인으로 추앙받은 존재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월은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기에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저 단절돼 그는 '잊혀진 전설'로 사라져갔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만공을 시봉했던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지난 3월 열반)과 원담의 상좌인 정혜사 수좌 설정 스님 등이 간도에서 수월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의 얘기를 전해 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에 대한 책을 펴낸 김진태 청주지검장 등을 통해 수월의 면모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 말고도 전남 여천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이 1990년대 초부터 소리 없이 간도와 흑룡강성을 십여 차례나 누비며 수월의 행적을 더듬어왔다. 그는 수월의 유일한 제자인 묵언 스님의 상좌인 도천 스님(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 조실)의 상좌다. 수월의 증손상좌인 셈이다.


명선 스님은 "수월 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 스님을 쫓아 북쪽으로 왔다가 (1912년부터) 이곳 먼발치서 스승을 지켜오다가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옛 고구려 땅인 흑룡강성 나자구 왕청현 송림산에 들어가 3년을 보내다 1928년 열반했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단숨에 오가…손만 대면 병자들 나아


그는 "90년 초까지만 해도 일광산과 송림산에서 수월을 직접 뵈었던 노인들이 있어서 많은 증언을 채록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노인은 수월 스님의 삶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방씨노인의 전언에 따르면 수월은 매일 아침 공양(식사)뒤엔 산을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레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갔다.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죽는 일이 많았다. 수월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레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어 아사를 면케 했다. 당시 나자구 사람들은 소금을 사기 위해 송림산 300리를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며칠 걸려 다녀오곤 했는데, 수월은 단시간에 그곳을 다녀와 사람들은 수월이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또 수월이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들이 나아서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은 소년의 부모에게 찾아와 "이대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일주일만 내 곁에 두라"고 말했고, 수월을 불보살의 화현으로 여겼던 부모의 명에 따라 수월을 따라 올라가 단칸 흙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 때 보니 수월은 일체 눕지 않았고,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 방을 나서려는데, 수월이 손목을 잡고 주저앉힌 뒤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라고 말해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 수월이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하얗게 수북이 쌓인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한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방씨 등의 고증을 받아 수월의 진영을 새로 완성한 명선 스님은 올해 안으로 <수월선사 평전>도 발간할 계획이다.


조현 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