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고봉의 회상에 들다]3. 경산사(徑山寺)
천년을 거슬러 구자무불성 화두를 보이다
경산사는 대혜 선사가 황제의 명으로 42세와 70세에 주지를 살았고,
입적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사진은 경산사 선당 전경.
융흥 원년(1163년) 8월 9일, 대혜 선사는 경산사 명월당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갑작스런 스승의 호출에 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혜 선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가리라.”
일순간 명월당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제자들은 멍하니 스승의 얼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승의 말은 오늘 입적에 들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윽고 제자들의 어깨가 하나둘 들썩이기 시작했고, 몇몇 제자들이 스승에게 나아가 더 머물며 후학을 지도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승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혜는 생각했다. 당대 많은 선지식들이 그의 경지를 인정했을 때 스스로 엄중한 자기 검열의 기준을 세워 잠시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원오 선사를 만나 일대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후 역경과 순경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중생교화를 위해 전념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대혜의 미소는 제자들이 하루 속히 자신의 등불을 밝혀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인천의 스승이 되라는 또 다른 경책이었던 셈이다.
“스님, 마지막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생야지임마(生也只任麻, 사는 것도 다만 이러하고)/ 사야지임마(死也只任麻,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하네)/ 유게여무게(有偈與無偈, 게송을 남기고 남기지 않는 것)/ 시심마숙대(是甚麻熟大, 이것이 무슨 유행인가).”
대혜 선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곧 적멸의 세계로 떠났다. 당시 나이 75세. 대혜 선사의 열반 소식은 곧바로 효종 황제에게 보고됐고, 황제는 친서를 통해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명(塔銘)을 보광(寶光)으로 할 것을 명했다.
대혜 선사가 입적한 도량
항저우(杭州)시를 출발한 버스가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도로를 2시간째 달리고 있다. 경산사로 가는 길은 그만큼 험하고 멀기만 했다. 경산사가 위치한 경산에 도달하니 산꼭대기까지 대나무 밭과 차 밭이 번갈아 펼쳐져 있다. 이곳이 모죽산(毛竹山)이라 불릴 정도로 대나무가 잘 자라고, 중국의 명차 경산차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선과 차가 둘이 아니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과 ‘선원청규’를 바탕으로 한 각종 사찰다례 의식인 경산다연(徑山茶宴)이 탄생할 만큼 경산은 선과 차를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다.
버스의 검은 매연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만큼 산이 높고 길이 험하다는 뜻일 터. 문득 경산사에 주석하던 대혜 선사가 진국태 부인에게 전달한 편지글의 내용이 떠오른다.
“아드님이 재상이 되었고, 부인께서는 국부인이 되신 것은 사실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육신 속에서 무가보(無價寶)를 찾아내어 영원히 다함없는 것을 받아들이심이 비로소 참된 귀함입니다. 거기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부귀영화도 본래 자리를 찾는 것보다 못하니 잠시도 화두를 놓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 첩첩산중에서 대혜 선사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몇날며칠을 왔다 갔다 했을 누군가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에겐 이 길이 더 없이 힘겨운 인욕 그 자체였을 것.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 공덕으로 견성했기를 늦게나마 기원해 본다.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혜 선사 주석 당시 1700 대중이 머물렀던 도량, 그러나 만수선사(萬壽禪寺)라는 현판이 걸린 경산사는 108명의 순례단만으로도 대웅전 앞마당이 빈틈없이 꽉 채워질 만큼 단출했다. 과연 이곳에 어떻게 1700 대중이 기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 채 선사의 자취를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선당(禪當) 앞에서 자연스레 발길이 멈췄다. 그리고 많은 발길이 함께 멈춰 섰다.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선불장(選佛場)이란 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처를 뽑는 곳, 대혜 선사가 정진했던 바로 그 장소다. 이미 아육왕사에서 한 차례 경계(?)를 넘은 마당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선당의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쓰는데, 어느새 중국 스님이 달려와 앞을 가로 막는다. 함부로 공개할 수 없는 곳이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설명이다.
“들여보내 달라.”, “들어갈 수 없다.”
한동안 순례단과 중국 스님간의 입씨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싸움은 오래지 않아 순례단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한 스님이 순례단을 “대혜 스님의 유적을 찾아 한국에서 온 임제종의 후손들”이라고 소개하자, 순간 중국 스님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스님의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잠시 둘러보는 것만 허락하겠다”며 굳게 닫힌 선당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둑이 하나 터지면 연이어 무너지는 법. 순례단은 어느새 선불장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도나도 나무 의자 위에 하나둘 좌정해 앉기 시작한다. 중국 스님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아마도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거나 차라리 이 사태를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대·차 밭에 둘러쌓인 경산사
“딱! 딱! 딱!”
문경 대승사 선원장 철산 스님이 죽비를 치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들이 허리를 곧추 세운다. 생각지도 못한 장관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숨 가쁘게 울리던 그 소리마저 잦아들자 이번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와 선당을 휘감던 이른 봄 찬바람도 순례단의 구도열에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비껴 돌아간다.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나무 의자 위에 자리를 잡는다. 대혜 스님이 후학을 제접하며 본안을 참구하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잠시도 의심을 놓지 말라’고 후학들을 경책하고 있는 1000년 전 대혜의 회상에 자리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도 잠깐,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범부의 한계인가 보다.
날카로운 죽비 소리가 선불장 안에 울려 퍼진다. 짧은 정진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의자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몇몇의 눈에는 맑은 이슬방울이 맺혀 있다. 그만큼 감격스럽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터.
“마치 대혜 스님의 회상에서 공부하는 것 같았습니다.”
범어사 승가대학장 무비 스님이 순례단을 대신해 떨리는 음성으로 감격의 순간을 말로 옮겼다.
선불장에서 입정에 들다
어느새 선불장을 차지한 순례단이 문경 대승사 선원장
철산 스님의 죽비 소리에 맞춰 입정에 들었다.
감격의 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순례단은 또 다른 호기심에 빠졌다. 아무리 보아도 부처님은 아닌데 선불장 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 주인 행세를 하는 이가 누구냐를 놓고 또다시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중국 스님들조차 “교진여다”, “달마다”, “혜능이다”며 제각기 다른 답을 내놓는다.
혹여 대혜 선사는 아닌지 물었다. 경산사는 대혜 선사가 황제의 명으로 42세와 70세에 주지를 살았고, 입적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그러나 대혜 선사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눈치다. 당연히 선사가 입적한 명월당도 알 턱이 없었다. 이곳 역시 문화혁명 당시 완전히 파괴된 후 지금의 모습으로 도량을 복원시켰지만, 역사 복원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다.
선당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잠깐의 정진이었으나 머릿속까지 맑아진 느낌이다. 선당 계단을 내려서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길을 가로 막는다.
“저 개가 바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의 원조야.”
무비 스님의 일갈(一喝)에 순례단이 함박웃음을 터트린다.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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