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하늘이 감춘 땅] 월출산 상견성암

slowdream 2008. 7. 20. 19:03

[하늘이 감춘 땅] 월출산 상견성암

 

대나무 울 문, 닫기 위함일까 열기 위함일까

‘행복 집착’이 병고보다 더한 장애가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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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 그 암자에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요. 산천어가 뛰노는 계곡물처럼 맑던 스님이 머물던 그 수행 터에. 월출산 상견성암 가는 길은 어느 때보다 설렙니다. 풍수의 비조 도선국사와 일본에 유학을 전한 왕인 박사, 다성(茶聖) 초의 선사를 낳고,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을 품어 거듭나게 한 영산(靈山)인 때문만은 아닙니다. 생전에 몇 번 뵈었던 청화 스님(1923~2003)의 그 맑은 잔영 때문일까요. 아니면 첫사랑의 산에 안기기 때문일까요.

 

이젠 많은 산들과 친해졌지만, 대학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에 오르거나 수학여행으로 설악산 흔들바위를 간 것 외에 마음먹고 이름난 산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월출산은 그런 초심자를 받아준 첫 산이었습니다. 마치 이 지역명이 왜 영암(靈巖·영묘한 바위)인지를 말해 주듯이 코끼리 상아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통바위들과 구름 사이를 뛰어 오르던 초심자가 피안을 향해 '지상' 을 박차 오른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월출산은 해발 809미터지만 평지에 돌출한 산이라서 마치 수천 미터의 산처럼 맑았다가 흐렸다가 부슬비가 내리다가 우박이 쏟아지다 다시 화창하게 갤 만큼 변화무쌍합니다.

 

산천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 초심자의 인생과 마음도 그런 일기만큼 천변만화했습니다. 그런데도 월출산은 내겐 늘 세월의 흐름이나 변화와는 무관하게 내 마음에 영원히 정지한 첫사랑입니다.

 

온 몸에 고드름 매단 채 정진했던 스님의 가슴 시린 후일담
  
 내가 2003년 히말라야를 떠도는 동안 청화 스님은 몸을 벗었습니다. '청화'(淸華)라는 이름 그대로 '맑은 기운이 빛나던' 그 모습은 시린 코끝 너머에서 무상(無常)한 무아(無我)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스님의 재가 제자들이 모여 일군 참선 도량인 하동 기원정사에서 들은, 스승을 기리던 이들의 후일담이 다시 가슴을 시리게 했습니다.]

 

스님이 젊은 시절 깊은 산 속 암자에서 홀로 수행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출가 뒤 열반 때까지 50여 년 간 오후불식(午後不食·오후엔 식사하지 않음)과 장좌불와(長坐不臥·눕지 않음)를 했던 스님은 그때도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속 토굴에서 생식가루 한 되로 100일을 버티며 수행하기도 하고, 한겨울에도 번뇌망상과 수마를 이기기 위해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온몸에 고드름이 열린 채로 수행 정진했습니다. 그런 스님이 행여 굶어서 잘못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던 보살(여자 불자)들이 미숫가루를 만들거나 깨를 볶아 머리에 이고 산에 올랐습니다. 그날은 한 보살이 쌀과 기름을 이고 갔습니다. 스님은 나무를 한 짐 가득해서 지게에 지고 산 위에서 토굴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보살의 인기척을 알아챈 순간 스님은 지게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산 위로 도로 올라가 버리는 게 아닙니까. 스님을 위한 마음 하나로 그 험한 산길을 올라갔던 보살을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젊었던 스님은 한창 공부할 시기에 아예 색경계(색욕)가 발동할 동기 자체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여성을 만나는 것 자체를 삼갔을 수도 있었고, 아는 이를 만나게 되면 묵언 수행이 깨질 수밖에 없어서 피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아는 보살은 스님이 가버린 빈 자취를 향해 합장을 하고 눈물을 떨구며 하산했다고 합니다.

 

허공에서 노니는 고사목처럼 얼마나 버려야…

 

Untitled-3.jpg상견성암은 그 청화 스님이 1978년부터 3년간 머무르며 묵언 정진한 곳입니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 경내 뒤편 도선국사 탑비를 지나 산길을 오릅니다. 상견성암엔 전화가 없어 미리 연락도 하지 못했습니다. 숲길을 감싼 대숲 바람이 맑습니다. 그 바람이 댓잎처럼 날카로운 검이 되어 쇠심줄 같은 집착의 가지를 싹둑싹둑 베어내고, 지날 때마다 가지에 앉아 있던 번다한 마음의 조각들이 종이비행기처럼 상공을 부유합니다. 무더위 속 고갯길에선 집착의 몸통에서 끈적끈적한 진액들이 흘러내립니다.

 

얼마나 다 쏟고, 혹은 얼마나 버려야 할까요. 저기 생명과 사멸을 넘은 등신불처럼 의연하게 구름과 함께 허공에서 노니는 고사목처럼 되기까지. 

무차별이 불법의 지향하는 바이지만, 고통도 기쁨도 상대적 차별감의 부산물입니다. 기쁨의 끝은 고통이지만, 고생의 끝은 낙입니다. 거대한 바위 산 아래 숨은 상견성암의 지붕 한 자락이 인연의 눈길을 끕니다. 눈길 따라 다시 숲길을 걸으니 어느새 거대한 통바위가 발길을 막습니다. 통바위 위엔 암자가 앉아 있고, 암자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엔 대나무로 울타리를 쳐놓았고, 문을 엮어 두었습니다. 

 

문은 닫기 위한 것일까요, 열기 위한 것일까요.   

 

 월출산이 내어준 감로수 한 바가지로 주와 객이 용해됩니다. 문을 엽니다. 계단을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열린 곁문 속 공양간입니다. 비구승 홀로 사는 곳이 어쩌면 이리도 정갈할까. 먼지 하나 앉아 있지 않은 듯싶습니다. 암주는 없습니다. 잠시 암자를 비운 모양입니다.

 

하늘로 솟은 일자바위와 코브라인 듯한 희유한 나무 한 그루

 

암자 마루에 앉으니 높 낮은 봉우리들과 빼어난 바위들이 한눈 아래 펼쳐져 있습니다. 그 중 최고 일미는 암자 마당 아래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비석인 것 마냥 우뚝 일자로 서 있는 바위입니다. 1722년 호남지방을 여행하고 <남유록>이란 기행을 나긴 담헌 이하곤이 마치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자리일 것입니다.

 

"율령에서 북쪽으로 꺾어 몇 리를 걸어가서 백 길이나 될 듯한 절벽에 나 있는 실 같은 길로 빙 돌아가는데, 지극히 위험스러워 무서웠다. 무성하게 난 대나무가 촘촘히 우거져 제멋대로 이리 가로막고 저리 뚫려 더 갈 수가 없었다. 상견성암에 이르니 뒤편에 석봉이 있는데 식규암과 같다. 서쪽에 큰 돌이 깎아 세운 듯 대를 이루고 있으며 노목 몇 그루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돌 위에 퍼져 있다. 돌 위에 노승 3~4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나무뿌리에서 올려다보니 거의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남쪽으로 와서 이름난 암자를 관람하며 들러본 곳이 수십 곳이나 이곳이 당연 제일이다. 비록 금강산 가운데에 갖다 놓는다 해도 영원암의 진불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혜정 스님은 사람됨이 조용하며 맑고 조심하며 주의함이 있는 것 같다. 나이는 80인데, 용모는 60세쯤 돼 보인다. 바야흐로 여러 스님들과 참선하는 중이다."

 

그 '큰 돌' 옆엔 한 사람이 좌선하기에 알맞은 평상이 놓여 있습니다. 희유한 것은 그 뒤 나무입니다. 그 평상 뒤엔 49일 동안 고타마 싯타르타의 최후의 결전을 지켜보며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했던 코브라인 듯, 왕의 우산인 듯 머리 위에 서 있습니다. 좌대에 앉으니 그대로 인간 세상의 길이 동시에 끊깁니다.

 

텅 비어 고요한, 그래서 가득 찬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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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기운이 세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원래 암자 이름에 '상'(上)자가 붙은 터는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빼어날수록 마장도 크게 마련입니다. 통바위에 철분이 많아서인지 천둥 번개가 바위에 내리치면 훤훤 장부들도 사시나무 떨듯 떱니다. 보통의 배포로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요. 저 멀리 고갯마루에서 인기척이 납니다. 잠시 뒤 한 젊은이가 등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린 채 암자 마당에 들어섭니다. 30대 중후반인 듯하지만 용모는 20대로 보일 만큼 젊고, 수줍음에 얼굴이 붉어지는 그 표정은 어느 산골의 사춘기 소년입니다. 상견성암에서 홀로 수행 중인 범종 스님입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장마철이 오기 전에 쌀과 김치를 구해 지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수줍음 많은 산승은 "도갑사에서 객이 상견성암에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래에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이 시간쯤 되면 이제 하산했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쯤 되니 불청객을 '인연'으로 받아들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오느라 여전히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채 닦기도 전에 방에 들어가 죽비를 두들기며 불전에 절을 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라도 스스로 지키는 규범일 것입니다. 그가 산천수로 끓여 객 앞에 살짝 밀어준 차 한 잔이 감로수입니다. 방 안엔 번뇌망상이 내려앉을 사이가 없습니다. 텅 비어 고요합니다. 그래서 가득합니다.

 

그는 여기에 온 지 3개월째입니다. 그 전엔 청화 스님의 제자인 대원 스님이 4년간 말없이 살다가 말없이 내려갔습니다. 청화 스님이 간 이후에도 산승은 오간 자취가 없이 오고 갔습니다.

 

편리함만 따지자면 불편한 것 투성이인 이런 외딴 산골살이를 하려는 이들은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지만, 범종 스님은 상견성암행을 오래도록 간구했습니다. 13년 전 출가 직후 도갑사에서 상견성암을 와보고 언젠가는 이곳에서 수행을 해보리라는 마음씨를 심어 가꾸어왔습니다. 깊은 병 때문에 이런 토굴살이를 하긴 어려운 처지임에도. 씨는 언젠가는 싹이 트고 열매가 맺던가요. 

 

악 소리조차 낼 수 없는 통증에도 '병고로써 양약 삼아'

 

Untitled-5 copy.jpg범종 스님은 해병대까지 다녀온 몸이지만 장에 병을 얻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뒹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극한 마음으로 진언 수행을 한 지 6개월여 만에 어느새 진통제를 먹지 않고 지내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위염과 목디스크와 이명 등 여러 가지 장애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좋은 공부 터에서 정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는데, 상견성암에서 살고 싶어 하는 여러 수행자를 제치고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곳에 올라와서도 그는 여전히 보왕삼매론의 첫 가르침대로 병고로서 경책을 삼았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는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은 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특별한 시간표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한두 끼만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피곤하지 않습니다. 잠이 오면 어느 때고 잠을 자는데, 하루 3시간 정도입니다. 남은 시간은 텃밭을 가꾸거나 암자를 돌보는 때 말고는 줄곧 앉아 참선을 합니다. 찾아오는 이 없어 번거로움이 없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에 만족스럽습니다.

 

얼마 전엔 산길에서 멧돼지 십여 마리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맞부닥친 순간 놀랐지만, 멧돼지가 자신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오히려 멧돼지 가족들을 더 놀라게 한 것임을 자각하고 이내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맞아, 너희들은 늘 가족들끼리 함께 다니지. 미안하다. 가족 산책길에 놀라게 해서."

 

그가 누군가를 그처럼 해치거나 두려운 마음을 내기보다는 연민의 마음을 낼 때 멧돼지도 거짓말처럼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다가 금두꺼비를 보고선 "내가 이 산에 살아서 너를 다 보는구나. 고맙다 두꺼비야"라고 감사했습니다.

 

참선하다 몰록 시간을 잊은 찰나, 그 질긴 병고 깨끗이 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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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에 신비가 문을 열어준 것일까요. 그는 어느 날 참선을 하면서 몰록 시간을 잊었습니다. 찰나였습니다.  한마음이 고요하니, 세상이 고요했습니다. 병고의 먼지가 앉을 자리조차 텅 비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그토록 오랜 세월 그를 족쇄처럼 얽어맸던 위염도 목디스크도 이명도 깨끗이 비어있었습니다.

 

이제 몸은 가뿐하고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암자 옆 대여섯 평의 밭에 가꾸는 상추와 고추 등 푸성귀에 된장을 찍어먹으면 그만입니다. 참선을 하다 언뜻 주위를 살피면 구름이 흘러나고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끼며 춤추고, 새들이 노래합니다. 그 아래 지렁이가 기어가며 꿈틀대는 것이 그렇게 사랑스럽고, 푸릇푸릇 올라오는 새싹 하나에도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도 다행인 것은 고통의 끝에서 행복을 얻은 그가 '행복감에 대한 집착'이 병고보다 더한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고, 무엇이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있고없고를 넘어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정진하는 그 마음이 30년 전 이 자리에 앉았던 청화 스님을 닮았습니다.

 

청화 스님이 토굴살이를 할 때 한 재가거사가 "스님, 이 외딴 토굴 생활이 외롭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화 스님은 "공부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어서 계속해서 눈물이 난다"고 답했습니다.  그 곁에 걸린 두 개의 젖은 수건은 그의 눈물을 훔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글·사진 조현 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