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이 순간, 한 걸음

slowdream 2009. 5. 5. 18:39

이 순간, 한 걸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저 아득하고 낯선 세계,

동화나 전설, 수억 광년 떨어진 별나라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세상에 출현한 역사적, 철학적, 종교적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외친 ‘중도(中道)선언’에서 알 수 있듯,

깨달음의 골수는 중도이며 공(空)이며 곧 연기(緣起)이다. 중언부언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과학과 철학에 힘입어 인지가 발달된 현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고작 그 정도 이치를 터득한 것을 깨달음이라 하다니!

연기가 무엇인지, 공이 무엇인지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뭔가 좀더 신비하고 환상적인 무엇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의심한다.

이런 의심과 착각에는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이 일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더 이상의 깨달음은 없다. 다만, 그 깨달음을 몸소 체화하느냐는 차원의 문제일 따름이다.

내가 즐겨하는 표현이지만, 인식론적 전환과 존재론적 전환과의 간극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험난한 산행을 마치고 마침내 정상에 이르러 세상 풍경을 내려다보며

산 아래 사람들을 위해 ‘산행지도’를 작성한다.

숲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숲 안팎의 풍경을 낱낱이 그려낼 수 있듯 말이다.

산 정상에 섰을 때 한눈에 들어온 세상풍경이 곧 ‘더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이라면,

팔정도(八正道)는 산행에 필수적인 장비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산행 중간중간 지표이자 길목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며 정상이 아라한이라 일컫는 사과(四果)이다.

 

‘깨달음이 곧 해탈’이라는 가르침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직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산 정상에 오른 경우라는 전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지식이 건네준 산행지도를 훑어보고서 ‘아하, 저기가 정상이구먼’ 하는 수준으로

깨달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될 터이다. 산행지도는 산자락에 첫걸음을 내딛고,

석가모님 부처님과 역대 조사, 선지식의 흔적을 되짚으며 꾸준히 오르는 자에게만이 의미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이후 불교는 참으로 다양하고 깊이 있게 변화해 왔다.

다양한 형태의 산행지도가 그 반증이겠다.

이는 불교의 역사적 유산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역설이기도 하지만,

수행자에게는 혼란과 불안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최초의 선지식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작성한 지도 하나뿐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원본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자칫 길을 잃고 헤매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뿌리를 좀더 깊게 내리는 주름처럼,

종횡으로 얽혀 있는 지도를 들여다보면 아찔하기 그지 없다.

 

그리하여 산길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선지식, 스승이 참으로 절실하다.

주어진 성품과 시절인연, 노력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이는 별 어려움 없이 곧바로 길을 재촉하고

어떤 이는 이 비탈에서 저 비탈로 옮겨다니며 힘을 소비하지만,

결국 정상에 서고 만다는 사실에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오래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깨달음을 증득하고서

무량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위해 다함없이 가르침을 베푸셨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이순간 내딛는 우리의 걸음 하나가 정상에 오르기까지 없어서는 안 될

지극히 소중한 디딤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蕭湛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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