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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산책] ⑪보배창고

slowdream 2009. 6. 12. 15:44

[인경 스님의 선문답산책] ⑪보배창고
마음은 이미 완전하고 부족함 없는 부처
기사등록일 [2009년 06월 09일 15:45 화요일]
 

 대주(大珠)가 처음 마조를 참방하고 물었다. “불법을 구하려 왔습니다.” 마조가 대답하였다. “자기 집안의 보배를 그냥 두고 사방을 다니면서 무엇을 하려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서 불법을 구하겠는가?” 대주는 절을 하고 물었다. “무엇이 나의 보배입니까?” 마조가 대답하였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을 구족하여, 아무리 사용하여도 부족함이 없다. 어찌 밖에서 구하겠는가?” 이에 대주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주로 강서지역인 홍주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래서 마조의 가르침을 선종에서는 ‘홍주종(洪州宗)’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곧 부처다’는 마조의 가르침은 홍주종을 대표하는 모토가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선종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이런 점에서 마조는 선을 실질적으로 동북아시아에 토착시킨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제자인 남전(南泉)은 ‘마음이 부처이다’는 언구를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이다(平常心是道)’란 말로 구체화시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평상의 마음은 화도 내고 슬퍼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로 부처라면, 살생하는 것도, 길(道)이 되는가라는 반론이 있다. 이것은 주로 성리학에서 선불교를 비판을 할 때, 자주 제시하는 반론이다. 과연 마조는 화내고 슬퍼하고 판단 분별하는 마음을 그대로 부처라고 말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이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위의 문답에서 마조가 말한,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고 한 점에 주목하여 보자. 이때에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찾고 구하는 ‘지금 묻고 있는 마음’이 평상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찾는 마음의 현상과 마음 그 자체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

 

마조가 가리키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혹은 ‘알지 못하는’ 마음의 내용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담는 그릇, 공간, 맥락 자체로서의 ‘마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그 내용물로서 마음을 평상심이라 하고, 이것이 그대로 부처라고 한다면, 살생이나 거짓말도 모두 길이요, 부처가 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마음의 내용물은 시대와 여건에 따라서 변하고, 서로 장애가 되고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의 바탕으로서 마음 자체는 그런 생각이나 감정들에 대해서 장애가 없다. 이런 장애 없는 마음, 그 바탕이 바로 평상심이다.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그것의 내용물에 한 번도 물들지 않는 마음 그 자체이다. 그래서 마조는 자주 말하지 않았던가? “억지로 수행하려하지 말라. 이미 우리는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보배이다. 단지 물들지만 말라”고.

 

물론 마음은 관찰되고, 언어로 기술할 수 있으며, 서로 소통이 되거나 혹은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의 내용물로서 마음현상의 경우이다. 반면에 이런 마음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서의 마음 자체는 언어로 기술할 수 없다. 이것은 대상화시킬 수가 없는 초월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히려 이것은 생각과 같은 모든 마음현상의 근거가 되는, 근본적인 바탕이다.

 

감정, 생각 혹은 갈망 등은 마음의 현상으로서 관찰이 가능하고 언어로 명명함으로서, 그래서 서로 소통이 가능한 내용물들이다. 하지만 마음바탕 자체는 관찰할 수 없고, 모양이나 형상으로 그림 그릴 수가 없다. 직접적으로 체득하는 체험의 대상이지, 인식의 대상은 아니다.

 

위에서 보듯이, “무엇이 나의 보배창고입니까?”라고 묻자, 마조는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멈추고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다. 이 문답은 언제나 지금 여기 현재의 시점에서 발생된다. 이것이 선문답이다. 선문답은 과거가 아닌, 언제나 지금여기의 사건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1호 [2009년 06월 09일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