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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⑨한 물건

slowdream 2009. 5. 29. 06:00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 ⑨한 물건
역사적 해석 경계 … 진리 자체에만 골몰해야
기사등록일 [2009년 05월 25일 18:01 월요일]

 

 

 

하루는 혜능조사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시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얼굴도 없고 등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 그때 신회가 나와서 대답하였다. “그것은 모든 부처의 본래적 원천이며, 저의 불성입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고 했는데, 너는 근본이니 불성이니 하는구나.” 이때 신회는 예배만 하고 물러났다.

 


 

이것은 한 물건[一物]에 관한 혜능과 신회의 문답이다. 이 문답은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고 부정하여, 끝내는 신회를 침묵시킨다. 이 문답과 유사하지만, 다른 판본이 있다. 여기서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덮는다. 항상 움직이고 작용하지만, 그 움직이고 작용하는 가운데 휩쓸리지 않는다. 너희들은 알겠는가?”고 기술한다.

 

전자가 부정적 기술이라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긍정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하나이다. 후자의 경우는 보조(1158~1210)의 『법집별행록절요병립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와 그의 제자인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제111고칙(古則)에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원오극근(1063~1125)의 『원오불과선사어록』과 최근에 발견된 몽산덕이의 『제경촬요』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이 문답이 당시에 광범위하게 널리 유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위의 문답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문답이라고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전하는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존재하지 않고, 혜능대사가 입적(713년) 한 이후 291년이 지난 1004년 송대에 편찬된 『경덕전등록』에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문답을 만들어냈을까? 무엇보다도 일물(一物)에 대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새로운 선사상의 대두와 함께 송대 임제종에서 자파의 전통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와중에 중요한 관점은 바로 하택신회에 대한 평가부분이다. 1290년 편집된 덕이본 『육조단경』에서는 신회를 “앞으로 네가 종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다만 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무리[知解宗徒]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한 부분이 첨가되었다.

 

이런 악의적 평가는 『경덕전등록』에는 없던 부분이다. 이것을 통해서 편집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맞지 않다”고 한 남악회양과 대조시킴으로써, 이후 세대에게 남악회양이 진정한 혜능의 법을 얻었고, 반대로 하택신회는 깨닫지 못한 지해종도로 낙인찍는 것이다. 이것은 한 물건의 진리와 전혀 무관한, 그렇다고 역사적인 사실도 아닌, 단지 종파의식을 반영한 편집태도이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의 서산대사가 편찬한 『선가귀감』이다. 여기서는 남악회양을 본처에게서 낳은 아들이란 의미의 적자(嫡子)로 하택신회를 첩의 소생이라는 얼자(孼子)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전승되어온 이런 조작된 편견, 종파의식을 버리고, 이제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원오극근은 어느 날 상당법문에서, “한 물건을 본래의 근원이나 불성으로 보는 것은 지해종도요,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고 하는 것도 역시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긴 힘들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긍정과 부정, 역사적인 모든 허위의식을 벗어난 이것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한 물건도 아니요, 영혼도 아니다. 이것은 무엇일까?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고, 등도 없고 얼굴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을 받치고 땅을 뒤덮고, 항상 움직임과 작용하는데 있지만, 한 번도 움직임과 작용에 휩쓸린 적이 없다. 이것은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 하고, 입에 있으면 말한다 하고, 손에 있으면 잡는다고 한다. 마음에 있으면 안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일까?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9호 [2009년 05월 25일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