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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⑩몸·마음·성품

slowdream 2009. 6. 6. 05:15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⑩몸·마음·성품
본래 성품은 ‘닦음’ 대상 아닌 체득하는 깨달음
기사등록일 [2009년 06월 02일 10:49 화요일]
 

“진여(眞如)는 생각의 바탕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라도, 여러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은 돈황본 『육조단경』의 말이다. 보조국사는 이곳에서 첫 번째의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생각을 일으키지만,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마치 냉수를 들이마신 것처럼, 시원하다. 우리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심란하다.

 

또한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고 끊임없이 판단하고 평가를 한다. 우울과 불안을 경험하고 미래를 근심하고 걱정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물들지 않는다. 부족함이 없고,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보고 느끼고 아는 행위가 일어나지만, 그것에서 나의 본성을 보고, 자유롭고 행복하다. 마치 햇살이 깊은 냇물을 꿰뚫고 지나가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쟁점사항이 숨겨져 있다. 돈황본에서는 없지만, 혜흔본이나 설숭본 『육조단경』에서 첨가된, 혜충국사와 보조국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서 이해하는 신심이원론(身心二元論)적 태도이다. 몸은 생멸이 있지만, 마음은 생멸이 없다는 뜻에서, “진여의 성품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킴이요, 눈·귀·코·혀 등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인간을 이해하는 3가지 범주를 언급한 점에서 더 중요하다. 첫째는 눈·귀·코·혀 등의 몸[身]이고, 둘째는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心]의 영역이고, 셋째는 진여의 성품[性]이다. 여기의 쟁점이란 결국은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첫째로 몸과 마음을 서로 분리시키는 관점이다. 이것은 서구의 의학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세계관이다. 여기서는 몸에서 마음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시켜서 이해한다. 이것은 기계론적 사고방식으로 마음에서 비롯된 현대의 많은 질병과 과제들에서 한계를 보인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타난 대안들이 ‘자연치유’이니, ‘대처의학’이니 신심 ‘통합의학’이다.

 

둘째는 마음과 성품과의 관계이다. 이점은 동양전통에서 오랫동안 논쟁된 사안이다. 먼저 이들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가? 용수의 후예들은 이들의 상호작용 관계를 중시할 뿐, 마음과 성품에 대해서 그 어떤 실체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에 『기신론』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북아 선불교는 이들의 실재를 인정한다.

 

다만 이들의 관계가 서로 구별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경우와 이들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관계로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 홍주종은 “보고 듣는 마음, 그대로가 곧 성품이다. 성품은 보고 듣는 작용이 다름 아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보고 듣는 마음 자체의 작용이 그대로 성품이고 진여라면, 악을 행하는 마음작용도 그대로 인정해야하는가 하는 점에서, 하택종은 마음과 성품을 구별하려는 입장에 있다. 이런 논의는 사회적인 가치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선악을 벗어난 본래적 성품을 강조할 것인가의 차이점이다. 이들은 역사적인 맥락 위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신심명』에서 보면, “도에 들어가는 문은 쉽다. 다만 옳고 그름의 가치선택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선악의 사회적 가치판단이 곧 진여의 성품에 방해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하는 질문과 상통한다. 이것은 선과 악의 마음작용을 본래적 성품과 구별하는 입장을 드러낸다. 반면에 마조에게 “무엇이 도(道)인가?”라고 묻자,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은 평상심(平常心)이다”고 대답한다. 듣고 보고 느끼고 아는 평상의 마음작용이 그대로 진여의 성품이다.

 

재차 마조는 “도란 닦음에도 속하지 않고, 닦지 않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일까? ‘닦음’은 언어적인 비유일 뿐이다. 마음은 닦음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성품의 경우는 닦음의 대상이 아니다. 본래의 성품은 그 자체로 온전한 까닭에, 그것은 다만 스스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대상일 뿐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1000호 [2009년 06월 02일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