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이 대유령에 이르렀을 때, 혜명이 뒤쫓아 왔다. 그때 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혜명은 “법을 구하고자 할 뿐, 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혜능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어떤 것이 상좌의 본래면목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혜명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위의 문답은 역시 매우 유명하다.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혜명스님이 광동성의 대유령에서 혜능의 설법을 듣고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만 하고, 그 교법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송 태조시절 967년경에 편집된 혜흔본(惠昕本)에 기초한 흥성사본 『육조단경』에는 혜능이 질문한 위의 내용이 각주처럼 부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하택 신회의 『단어』, 황벽 선사의 『완릉록』에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설법이 있고, 『무문관』 제23칙에도 등재되어 있다.
특히 『무문관』에는 ‘혜능이 바위에 올려놓은 가사와 발우를 혜명 수좌가 집어 들려했지만, 마치 산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이때 혜명은 다만 법을 구할 뿐, 가사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이 첨가되어 있다. 사실 선과 악은 인류 사회의 중요한 윤리적 문제이다. 집단이 있고, 공동체가 있으면 그곳에는 지켜야할 선(善)과 행하지 말아야할 악(惡)을 규정하는 법이 생겨난다. 이것들은 시대에 따라서 혹은 집단에 따라서 바뀌지만, 이것들이 바로 세상의 법칙, 관습적인 진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의 관심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악을 벗어난 나의 본래면목이다.
이를테면 유교의 경우를 보자.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근본적으로 인간이 선하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반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면, 어떻게 선을 희망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유교가 봉착하는 미해결된 딜레마, 매우 중요한 쟁점사안이다. 서구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보자. 여기서도 선악의 문제는 역시 중요한 쟁점사안이다. 태초에 그때 에덴동산에 사과나무가 있고, 그것에 선악과가 열려 있다. 하지만 이 선악과는 따먹어서 안 된다는 윤리적 금지조항이 붙여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혜능은 말한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적 면목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함축된 선악과 관련된 의미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악에 의해서 규정되거나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적 면목은 선악의 가치로부터 벗어난, 영역임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조선의 성리학은 사회적인 선악의 가치를 너무 강조함으로써, 근본적인 성품의 이치를 망각하여, 결과적으로 기득권의 신분사회를 옹호하면서, 인간의 근본적인 평등을 위배하였다.
또한 기독교의 경우도 선악의 가치규정에 강박적으로 천착함으로써, 종교적인 편향을 만들고, 인간의 근본적인 조화로움을 깨뜨린다. 위의 문답에도 마찬가지이다. 『무문관』이 전하는 혜명 수좌는 처음에는 혜능에게 전해진 가사와 발우를 빼앗기 위해 광동성의 대유령까지 머나먼 길을 쫓아왔다. 그런데 막상 바위에 올려놓은 발우를 들기 위해서 온힘을 쏟았지만, 산처럼 꼼짝도 하지 않자, 마음을 바꾸어서 “다만 법을 구할 뿐이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가사와 발우를 빼앗고자 했으니, 악한 마음이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의 법을 구하니 선한 마음이라 할 수가 있다. 이것을 바라본 혜능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다시 말하면, 가사와 발우를 빼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진리의 법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을 때, 혜명 수좌의 본래적 면목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아, 그렇다. 선과 악을 벗어난 혜명 수좌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대답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오늘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쏟아졌지만, 새로 발견한 잎사귀는 한 번도 물에 젖지 않았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7호 [2009년 05월 03일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