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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⑤죄와 해탈

slowdream 2009. 4. 25. 03:19

[인경 스님의 선문답 산책]⑤죄와 해탈
내 생각의 본질
정확히 알고나면
한없는 자유 얻어
기사등록일 [2009년 04월 20일 18:08 월요일]
 

#1 어느 날 혜가를 승찬이 찾아왔다. 승찬은 죄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혜가는 "깨끗히 할 죄를 내놓으라" 했다. 승찬은 마침내 대답하였다. “죄를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혜가는 “그러므로 네가 너의 죄를 씻어주었다.”고 말했다. 이에 승찬은 깨달음을 얻었다.

 

#2 어느 날 승찬을 도신이 찾아왔다. 도신은 조사가 되겠다며, 청하였다. “자비를 베풀어서 해탈의 경지로 저를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승찬은 도신에게 되물었다. “누가 너를 묶어놓았느냐?” “아무도 저를 묶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해탈을 원하느냐?” 이 말에 도신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위에서 승찬과 도신의 문답은 달마와 혜가의 안심문답과 동일한 구조를 이룬다. 중심이 되는 미해결 과제는 혜가의 경우 불편함이고, 승찬의 경우에는 죄의 문제, 도신은 해탈의 문제이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든지 부딪히는 과제이다. 종교에 따라서는 죄를 자기의 본질적 문제로 간주한다. 이런 경우에 먼저 죄인이여야 하고 그 다음엔 구원의 길이 열린다. 처음부터 죄가 없다면 구원의 문제는 허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윤리적인 갈등을 가진다. 이런 갈등은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죄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우리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가? 아니면 어떤 가족이나, 사회적인 규칙을 어겼을 때, 어른과 사회에 의해서 처벌과 양심의 문제와 함께 비로소 발생되는가? 이런 문제는 일반상담에서는 사회적 적응과 관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물론 이것은 정당하고 유용한 해결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해명은 아니다.

 

‘궁극’이란 말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해결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을 의미한다. 잠정적인 유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본래적인 의미로써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은 불교경전의 『천수경』에서 보인다.

 

“백겁 동안 쌓아온 죄의 행위도 한 생각에 모두 없어지네 / 마치 마른 풀에 불이 붙듯이 태워져서 일시에 없어지네 / 죄의 자성은 없어, 다만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니 / 마음이 소멸하면 죄 또한 없어지네 / 죄와 마음이 함께 멸하면 이것이 곧 진정한 참회라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죄의 자성이 본래 없다’는 구절이다. 자성이란 스스로의 성품을 말하는데, 불은 태움을 그 자성으로 삼고, 물은 적심으로 그 성품을 삼는다. 죄란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가? 근본적으로 죄는 존재하지 않고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고, 이 마음마저 소멸하니, 이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생각은 스스로 자성을 가질 못한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우리는 굳어진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지만 바꿀 수가 있다. 이런 작업은 인지치료의 핵심된 기술과 유사하다. 우리의 죄책감, 좌절, 우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은 스스로의 왜곡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바뀐다면, 우리의 감정은 바꾸어진다.

 

위의 문답에서 보듯이, 승찬은 죄인이라는 굳어진 믿음, 스스로의 생각이 허구임을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났다. 해탈의 경지를 원했던 도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너를 묶어놓았느냐?” 이 한 마디에, 그는 스스로 자유롭고, 본래 어디에도 매인 바가 없음을 자각함으로써, 더 이상 해탈을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마른 풀에 불이 붙듯이, 일시에 어둠이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나 자신도 모르게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그 생각에 붙잡혀 살아간다. 이런 생각이 나의 삶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생각에 메어있는지를 정확하게 잘 아는 일은 수행자나 일상의 생활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한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5호 [2009년 04월 20일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