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가가 물었다.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스님께서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달마대사가 말씀하였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리라.”
혜가는 말하였다. “마음을 찾으나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달마가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혜가가 달마를 만난 것은 40세가 넘어선 이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경덕전등록』에 따르면 그날은 눈이 엄청 내렸고, 또한 밤새워 기다린 혜가는 자신의 팔뚝을 잘라 달마에게 바침으로써, 진리탐구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달마를 만나서 혜가는 아주 단순하게 ‘마음이 불편합니다’고 호소했다. 이것은 현실 생활에서 어떤 적응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한 마음의 불편함이 아니다.
이것은 40년의 세월, 자신의 삶 그 실존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선문답은 일상의 삶에 대한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와 더불어서 전체적인 삶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이런 점에서 선문답은 포괄적이고 초월적이다.
달마는 혜가에게 다만 ‘그 불편함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불편한 마음이 발생되는 조건과 그 원인을 따져보고 묻지 않는다. 결코 아비달마 불교처럼 내담자의 마음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윤리적인 판단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이점은 선문답의 특징적인 성격이다. 돌아가는 논리의 길보다는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직관의 길을 선택한다. 설명하는 대신에 ‘가져오라’고 말한다. 혜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결국은 자신의 마음에게로 되돌아가서(返), 그것을 점검해보는 것(照)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달마가 원하는 바다. 그 결과로 혜가는 ‘찾으나 찾을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달마는 ‘그대에게 편안한 마음을 주었노라’고 말한다.
혜가(慧可)의 질문에 내포된 전제조건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는 ‘과연 마음이란 존재하는가?’ 또한 ‘그것은 편안하기도 하고 혹은 불편하기도 한 그런 종류인가?’ 반문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불편한 마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다만 혜가가 스스로 만들어낸 ‘언어의 감옥’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혜가는 이미 부족함이 없다. 결코 달마가 혜가에게 편안한 마음을 준 것이 아니라, 혜가는 처음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이런 종류의 문답을 명상상담이라고 하자. 이것은 일상의 적응적 문제가 아닌, 명상과 관련된, 우리 삶의 근본적인 과제를 다룬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마음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 문답의 끝은 바로 무비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전제조건, 곧 언어적인 통념을 타파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명상상담의 길은 언어적인 자기 인식의 한계를 깨뜨리고, 일상의 함정에서 벗어나 새롭게 세계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명상상담은 내담자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이룩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 상담과 궤를 같이 하지만, 내담자 가지는 일상의 맹목적인 인식을 총체적으로 깨뜨린다는 점에서는 초월적이다.
선문답은 일상의 상담처럼 현실에 대한 적응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세월 굳어진 자기 이해의 껍질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불편하다면, 그것을 회피하기 전에 먼저 불편한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살펴볼 일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2호 [2009년 03월 30일 1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