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선불교(禪佛敎)

선불교 36.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

slowdream 2007. 9. 14. 23:30
 

*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묻는다 : 15일 이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으니 15일 이후의 일을 한번 일러 보아라

 답한다 :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雲門文偃禪師의 自問自答이다. 雲門의 이 自問自答을 話頭로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한다. 이 話頭는 現在 中國 觀光기념품가계, 畵廊 등에 붓글씨 족자로 많이 나와 있는 명구(名句)이기도 하다. 이 話頭가 뜻하는 바는 일단 自信의 참본성(眞我)을 되찾은 자는 慾望으로 인한 障碍에서 解放돼 있어서 그에게는 모든 일이 다 幸福하고 모든 나날이 다 最高의 즐거운 날이라는 것이다. 모든 禪問答은 이처럼 絶對肯定에 一致하는 삶을 살려는 觀點에서 그 意味를 把握해야 한다.


 禪에는 厭世主義나 悲觀主義, 隱遁主義 같은 逃避的 京鄕이 눈곱만큼도 없다. 禪이 渴求하는 진공(眞空)은 絶對로 現存하는 實體를 破壞하지 않는다. 무형(無形)은 形象의 世界와 하나라는 점을 强調, 진공묘유(眞空妙有)로서 現實世界를 收用하도록 한다. 이것이 禪的 삶이다. 雲門이 말한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文字的으론 過去와 未來, 禪學的으론 禪林慣習인 대참(大參)을 뜻한다. 대참은 1, 15일의 方丈 朔望上堂法에 이어 方丈과 學人들이 禪問答을 하는 慘聞이다. 禪林에서 大參은 方丈 赴任 때 행하는 진산상당(진산상당 : 일명 入院上堂)의 법거량 다음으로 重要한 禪問答 時間이다. 大參에 대비되는 소참(小參)은 方丈이 아침 저녁으로 每日 法堂에서 學人들과 가지는 禪問答 時間이다.


 이 話頭의 선리(禪理)는 雲門이 朔望上堂한 15일을 基準으로 區分한 過去, 現在, 未來를 超越한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다. 15일은 한달의 가운데로 1일과 30일이라는 兩極端을 여윈 中道, 즉 眞理를 象徵한다. 禪家는 “中道가 곧 부처”라고 한다. 그렇다면 雲門이 提示한 15일은 見性을 이루어 부처가 됐음을 暗示한다. 부처가 된 道人의 삶은 어떤 것이냐는 게 雲門이 묻는 禪的 質問이다. 물론 15일 以前, 以後라는 區分은 禪理上으론 한가로운 葛藤이며 禁忌時하는 分別心의 發露다. 雲門은 쓸데없는 平地風波를 일으킨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世俗現實의 場所에서 한마디 일러보라고 함으로써 積極的인 現實肯定의 삶을 살고자 한다.


 禪師들은 哲學者가 아니다. 때문에 時間이 어떠니, 空間이 어떠니 하면서 有無의 存在論과 정반합(正反合)의 論理가 어떠니 하는 槪念的 分析을 하지 않는다. 오직 日常生活을 꾸준히 反省할 것만을 促求한다. ‘永遠한 現在’인 이 場所를 여의지 않으려면 이를 떠 받쳐줄 智慧가 있어야 한다. 바로 15일 前後로 區分하면서도 15일이 永遠할 수 있는 無分別의 분별지(分別知)가 必要한 것이다. 이러한 지(知)는 人間에게만 주어진 特惠다. 이러한 智慧를 산뜻하게 보여준 단적인 예가 雲門의 ‘日日是好日’ 이라는 말이다.


 하루 24시간에 사용당하는 被動的인 人間이 아니고 하루 24시간을 主體的으로 使用하는 能動的인 道人에게는 過去니 未來니 하는 時間區分이 있을 수 없다. 그에게는 오직 永遠한 現在만이 있다. 禪에서는 이렇게 즉금(卽今)만이 存在한다. 그렇다면 ‘오늘’이 즐거우면 과거 未來의 날마다도 즐겁고 좋은 날이다. ‘日日是好日’이 밝히고 있는 3세(三世) 超越의 卽今 中心 時間關이다.


 ‘날마다 좋은 날’은 雲門의 가장 幸福한 發言이다. 이런 삶과 體驗이야말로 禪師들이 希求하는 가장 理想的 生活이며 그러한 生活을 하게 될 때 비로소 解脫道人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禪은 高次的인 綜合의 立場에서 정(淨)과 부정(不淨) 양자를 統合해 各自가 놓인 狀況의 한복판에서, 매일 매일의 現實生活 가운데서 부정(否定)과 矛盾이 없는 統一속의 삶을 實現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宇宙 大肯定이다.


 로마 敎皇 요한23세(1880-1963)도 ‘날마다 좋은 날’을 살고자 했다. 그는 1962년 聖誕節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이고 어느 달이고 다 똑같이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똑같이 아름답다. 오늘로 나는 여든두 살에 접어든다. 이 해를 넘길 수 있을까. 어느 날이고 태어나기 좋고 어느 날이고 죽기 좋은 날이다.”

 그는 죽기 전날 친구들이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자 “성모 마리아 讚歌를 불러달라”면서 “힘을 내, 울 때가 아니야. 지금은 기쁨과 榮光의 瞬間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醫師를 慰勞하면서 “敎授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旅行 가방을 이미 꾸려 놓았습니다. 떠날 瞬間이 오면 遲滯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그가 雲門의 ‘日日是好日’이라는 話頭를 알고 있었는지는 確認할 길이 없다. 짐작컨대는 전혀 몰랐으리라. 그러나 나는 偉大한 聖人들은 時間과 空間을 超越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眞理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意味에서 宗敎間 對立과 分別, 排他性은 전혀 無意味하다.


 흔히 禪家에서 ‘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마음(自性, 佛性)이란 태어나면 죽는 道理와 宇宙 森羅萬象을 認定하는 ‘大肯定’을 뜻한다. 人間이 날마다 좋은날을 살려면 가장 어려운 難關인 生死의 問題를 順理대로 肯定해야 한다. 生은 좋아하고 死는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日日是好日’은 不可能하다. 禪은 絶對自由속에서 卽今의 삶을 만끽하는 ‘日日是好日’의 임운자연(任運自然)을 아름다운 詩로 즐겨 描寫한다.


 묻는다 : 자아(自我)란 누구입니까?

 답한다 : 山에서는 自由로이 徘徊하고 江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雲門과 한 衲僧의 禪問答이다. 雲門은 자신의 아름다운 속마음과 매일매일 좋은 날로 살아가고 있는 임운자재(任運自在)를 이렇게 文學的으로 描寫했다.

 臨濟宗의 原悟克勤禪師(1063-1135)는 ‘日日是好日’의 體驗者가 갖는 任運自在를 詩적인 偈頌을 지어 표현했다.


깊은 산 흐르는 물소리를 헤치고,

언뜻 날아가는 새의 자취를 그린다.

풍성한 풀, 낮게 드리운 구름이여,

하늘과 땅이 하나로 이어진 듯

絶對의 偉大한 神秘속에 아스라이 휩싸였구나!


 陰曆 15일에는 둥근 보름달이 뜬다. 보름달은 개오(開悟), 見性, 圓融無涯를 象徵한다. 雲門이 朔望法問을 하러 上堂한 15일은 모든 사람이 깨침의 문을 연 ‘십오야 둥근달’이 떴다. 깨친 사람에게는 敎皇 요한23세에게서 보듯이 ‘날마다 좋은날’이다. 禪의 전 歷史를 貫通하고 있는 偉大한 ‘逆說’들도 다 날마다 좋은 날을 살기 위한 희구(希求), 바로 그것이다.


 일단 진정한 自我를 回復한 사람은 無智와 慾望에 의해 惹起된 모든 抑壓과 恐怖로부터 解放된다. 그때 그는 일을 해도, 놀아도 幸福하며 기꺼이 살고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발로 大地를 굳게 딛고 꾸준히 義務를 다하는 삶의 길을 걸어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妄想이나 空虛한 思辨과는 비교가 안되는 ‘日日是好日’의 삶이 아닐 수 없다.


 人間은 자신이 옳고 그른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이미 肯定과 否定으로 點綴된 有限世界로 이끌려 들어가는 過誤를 범하고 만다. 그렇다면 人間은 그 안에서 有限世界(俗世)의 일들과 ‘和解’하며 살 수밖에 없다. 基督敎 神學은 人間이 하느님의 形象으로 創造됐기 때문에 神과 人間은 血緣上 同質性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人間의 尊嚴性은 神聖하고 尊重되어야 할 絶對價値다. 禪이 말하는 ‘심즉불’(心卽佛)의 인간 마음도 基督敎的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形象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의 本質 중 하나는 ‘和解’다. 淸靜性이 제1 본질이라면 和解는 제2 본질이다. 頭頭物物을 肯定할 수 있는 禪의 진여관(眞如觀)이나 깨달은 후 산을 산, 물을 물로 수용하는 宇宙 大肯定도 ‘和解’라는 마음의 作用에 의해 이루어진다.


 英語의 아침인사 굿모닝(Good Morning)은 모든 아침이 좋은 아침이라는 뜻이고 가벼운 作別人事 해브 어 나이스 데이(Have a nice day)도 ‘日日是好日’과 같은 脈絡이다. 아쉬운 건 人間에게는 깨달음의 삶, 和解의 삶을 살 때만 ‘日日是好日’이 可能하다는 것뿐이다. 날마다 좋은 날들을 살았던 雲門禪師는 어떻게 죽어 갔는지 보자 그는 949년 4월 10일 圓寂했다. 雲門은 入滅에 앞서 文人들에게 遺言했다.


 “죽은 후 내 몸을 方丈室에 그대로 두거라 혹 임금이 탑액(塔額)을 내리거든 方丈室에 걸어둘 뿐 따로이 塔을 세우지 말라.”


 門徒들이 遺言대로 받들어 雲門禪師는 廟塔이 없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1988년 펴낸 ‘雲門寺 大覺禪師誌’에는 圓寂 15일만에 遺體를 全身象으로 탑에 모셨고 그후 碑文도 세웠다고 記錄돼 있다. 雲門禪師碑는 近來 새로 세웠다. 1천여 자에 달하는 碑文은 雲門宗의 宗志와 雲門禪師의 行裝을 소상히 적고 있다.


 2003. 4. 14. 오후 13 : 40분에 완성함.


 古佛叢林 方丈 西翁스님 入寂

 2003. 12. 13. 아침 白陽寺 주지 西翁스님 入寂


<臨終偈>

 臨濟一喝失正眼 德山一棒別傳斷

 恁麽來恁麽去 白鶴高峰月輪滿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임제 스님이 크게 외치니 밝은 눈이 사라지고)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덕산 스님이 몽둥이로 내려치니 교외별전이 끊어지도다)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이렇게 와사 이렇게 가니)

백학의 높은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백학의 높은 봉우리에 달빛이 가득하다)


 大鑑慧能祖師 趙州종심선사

 歸宗智常禪師 西堂智藏禪師

 南泉普願禪師 五臺禪師

 南嶽懷讓禪師 雪竇重顯禪師

 靑原行思禪師 洞山良价禪師

 永嘉玄覺禪師 園悟克勤禪師

 南陽慧忠禪師 潙山靈祐禪師

 荷澤神會禪師 天皇道悟禪師

 石頭希遷禪師 德山宣鑑禪師

 行山鑒洪禪師 雲門文偃禪師

 百丈懷海禪師 香林澄遠禪師

 大梅法常禪師 智門光祚禪師

 鹽官濟安禪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