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제가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짐은 왕위에 오른 지금까지 절을 짓고, 경전을 출간하고,
불교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내게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가 대답하였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왜 공덕이 없습니까?”
“그것들은 인천(人天)의 복을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은 됩니다.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아서, 실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功德)인가요?”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실재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합니다.
이런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제일의 성스런 진리입니까?”
“거룩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짐을 대하는 그대는 누구요?” “모릅니다.”
위의 문답은 돈황굴에서 발견된 선문헌 가운데 하택신회의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런데 정말로 달마와 양무제는 서로 만났을까? 결론부터 말하여 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선학자(禪學者)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이런 종류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점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입장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입장이다. 선문헌에 나타난 역사적인 의미를 가능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정하게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사상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에 머물기 쉽기 때문이다. 엄격한 문헌적인 비판이 선행하지 못한 채로 선종사서를 읽어간다면, 역사적인 진실과는 무관한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는 주장이다.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실증적인 근거에서 판단하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성보다는 사상성에 촛점을 맞춘 입장이다. 실제로 달마가 말하는 바는 종교적인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의 가치나 역사적인 문맥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재는 텅 비고, 고요하다’라든가, ‘성스런 진리는 없다’는 것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내 가슴에 살아 숨 쉬는 이것은 모양과 형상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답이 전하는 메시지는 절을 짓고, 경전을 출간하는 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을 ‘통해서는’ 최고의 공덕, 청정한 지혜를 성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객관성만을 강조하고 성스런 체험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오늘날 문헌학 중심의 불교학에는 선(禪)은 물론이고, 종교가 없다. 메마른 가슴과 우매한 공허감만이 존재할 뿐이다.
반대로 건강한 현실적인 토대를 상실한 종교적인 가치는 삿된 관념에 떨어지고 끝내는 소멸된다는 것이 역사적인 교훈이다. 달마의 ‘모른다’는 부처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마저 전할 수가 없다’고 『선가귀감』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로서 외면당하기 쉽다.
양무제는 황무지 상태의 중국에 불교를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남겼다. 결코 그의 역사적인 의미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달마의 부릅뜬 눈망울을 기억한다. 양자는 서로를 배제할 수가 없다. 실존은 역사적인 지평 위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름의 빛깔을 발한다. 달마도 그렇고, 양무제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이 역사의 지평에 선 당신은 누구인가?”
여기서 달마는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혜능도 ‘오조(五祖)의 법을 계승한 것은 자신이 법(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오직 모를 뿐이다. 여기에 이르러 양무제의 입장에 선 당신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말해보라. 말해보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1호 [2009년 03월 23일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