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달마는 문인들을 모아놓고, 각자 얻은 바를 말하게 하였다.
먼저 도부(道副)가 대답하였다.
“제가 보기에는,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버리지도 않음을, 도(道)로 삼는 것입니다.”
달마가 말씀하였다.
“너는 나의 가죽(皮)을 얻었다.”
비구니 총지(總持)가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볼 때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음과 같습니다.”
달마가 말씀하였다.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
도육(道育)이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는, 사대(四大)가 본래 공(空)하고 오온(五蘊)이 존재하지 않으니, 한 법(法)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달마가 말씀하였다.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혜가(慧可)가 앞으로 나섰다. 혜가는 절을 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 섰다. 이에 달마대사가 말씀하였다.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이 문답은 ‘피육골수(皮肉骨髓)의 대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1004년 송대에서 제작된 『경덕전등록』에 나온다. 여기에 의하면 달마의 제자는 혜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네 사람이다. 하지만 현대 선학에서는 이 문답은 송대 선종에 의해서 창작되어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피육골수의 문답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774년에 만들어진 『역대법보기』이다. 이것은 달마가 중국에 와서 입적한 때(533년?)부터 약 250년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역대법보기』의 내용과 『경덕전등록』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역대법보기』의 내용에는 달마의 제자가 세 사람이라고 나와 있지만, 그들이 얻은 법의 내용은 없다. 그러나 『경덕전등록』에는 4명의 제자들이 얻은 법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먼저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버리지도 않는다”는 도부(道副)의 경우를 보자. 언어, 문자에 대해서 버리지도 그렇다고 집착하지도 않음을 말한다. 이것을 달마는 진리, 도(道)에 대한 가장 표층적인 이해, 가죽(皮)이라고 본다. 사실 언어의 문제는 도 자체를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비구니 총지(總持)는 “아난이 아촉불국을 볼 때,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않음과 같다”고 말함은 번뇌에 두 번 다시 마음이 흔들지 않는 수행의 경지를 말한다. 이것을 달마는 피부보다는 깊은 살에 해당된 것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번뇌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끊어야 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사대(四大)가 본래 공(空)하고, 오온(五蘊)이 존재하지 않으니, 한 법(法)도 얻을 것이 없다”는 도육(道育)이다. 사대란 지수화풍의 육체나 세계를 말하고, 오온은 마음이나 정신을 가리킨다. 곧 몸과 마음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얻을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에 대한 달마의 코멘트는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뇌가 본래 존재하지 않다’는 용수의 중관(中觀)철학을 계승한 중국 우두종(牛頭宗)의 입장을 대변한다.
마지막으로 혜가이다. 그는 그냥 아무런 말이 없이 침묵한다. 이것을 달마는 나의 골수라고 말한다. 혜가는 그냥 절을 하고, 다시 돌아와서 자기 자리에 그대로 선다. 이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그대로 진리임을 드러낸다. 진리는 전혀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곳엔 비밀이 없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입문자(不立文字)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은 달마시대의 사상이기보다는 ‘달마와 그 제자들의 문답을 통해서’ 구체화시킨 『경덕전등록』이 제작된 송대(宋代)의 선사상이다.
이에 따르면, 피부, 살, 뼈, 골수(皮肉骨髓) 들로 엮어진 지금 여기는 그것들의 흔적이 온전하게 씻어나가 버린, 개나리꽃이 활짝 핀 앞산이다. 새와 냇물이 그대로 설법을 한다. 일체의 언설을 떠난, 혜가의 몸은 그대로 잣나무이고, 무자(無字)이고, 들판에 우뚝 선 나무이다.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3호 [2009년 04월 06일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