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왕(異見王)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라제존자가 대답하였다.
“성품을 보는 이가 부처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대사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성품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데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를 못합니다.”
“만약 작용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것이 나타날 때는 여덟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여덟 가지의 길을 내게 말해 주시오.”
바라제 존자는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태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에서는 듣는다 하고 /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며,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걷고 /
펼치면 세계를 덮고, 거두어들이면 티끌 속에 들어가며 /
아는 이는 이를 불성이라 하고, 알지 못하는 이는 정혼이라고 한다.”
위의 문답은 『경덕전등록』 보리달마조에 실려 있다. 여기에 의하면, 바라제 존자는 보리달마의 제자이며, 달마 대사는 이견왕의 숙부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바라제 존자나 이견왕은 그 신원이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여기서 다루는 ‘성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된 매우 중요한 쟁점 사안이다.
성품이란 ‘종성’이나 혹은 ‘불성’과 동의어로서 ‘아비담마’ 불교시대로부터 비롯된다. 아비달마 학파에서 법이란 자신의 고유한 독자성으로서의 성품(自性)을 말한다. 법에 대한 이런 정의는 북전 『구사론』이나, 남전 『아비담마타상가』에서도 동일하다. 여기서는 사람이나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법의 고유한 성품에 대해서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아비담마에서 인정했던 법에 대한 고유한 성품의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과 같은 개념을 여전히 도입되고 있다. 실제로 거의 모든 대승경전은 바로 이 성품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이 문제는 현대불교에 있어서도 해명해야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로서, 불교학뿐만 아니라, 현대 선학에서도 뜨거운 감자이다.
위의 문답은 성품(體)과 작용(用)은 구별할 수가 없는 하나라는 입장이다. 본성은 그대로 작용이지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눈에 있으면 본다.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는다. 작용하는 즉 그대로가 그것의 성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약점도 있다. 작용하는 것이 곧장 그대로 불성이라면, 거짓말하고, 온갖 악행도 마음 작용의 일부이기에, 그대로 불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적인 윤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최고의 초월적인 진리라고 하여도, 세상의 규칙과는 서로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반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사회, 윤리적인 문제와 마음의 본래적인 작용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자는 제안이 힘을 얻게 된다. 마음의 다양한 작용은 어떤 때는 우울로 어떤 경우는 불안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물론 우울과 불안 자체가 불성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관점도 존중된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을 불건강한 마음현상으로 보고, 그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아애 없애고 통제하려는 명상방식은 역시 문제가 된다.
성품과 작용이 하나란 관점은 우울과 불안이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것이며, 그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의 일부로서 허용되고 수용되어야할 삶의 진실이라는 점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내적인 작용, 그 자체 성품에 닻을 내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붓다는 ‘들을 때는 단지 듣기만 하고, 볼 때는 단지 보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법보신문 994호 [2009년 04월 14일 1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