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토끼 뿔’이나 ‘거북이의 털’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이 결코 허무(虛無)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空’은 ‘空의 작용’이 있어서 ‘묘유(妙有)’이기도 한 것이다. ‘공(空)’은 말길이 끊어진 자리로서 체득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물리학에도 ‘空’과 비교할 만한 개념이 있다.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말하는 파동을 현대물리학에서는 확률파(確率波)라고 해석한다. 입자가 파동처럼 전 공간에 퍼져있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존재할 확률이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전 공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확률파를 잘못 이해하는 수가 종종 있다. 입자가 공간상의 어디에 있긴 있지만 측정하기 전에는 정확히 그 위치를 알 수 없고 존재할 확률만을 알 수 있는데 존재할 확률을 말해주는 것이 확률파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률파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측정하기 전에도 입자가 공간상의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입자는 측정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측정을 하지 않고서 입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측정 전에는 오직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만이 전 공간을 뒤덮고 있을 뿐이다. 측정하면 파동은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난다. 측정 후에야 비로소 입자의 존재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물결파나 음파는 실체를 가진 무엇인가가 진동하여서 생기는 파동이다. 물이나 공기와 같은 매질(媒質)이 있어서 매질이 진동하는 모습으로 파동의 모양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확률파는 이러한 매질이 없는 파동이다. 확률파는 매질이 진동하는 것이 아니고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존재다. 아무도 확률파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어떤 실체를 가진 구체적인 존재가 진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확률파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복소수(複素數)로 표현된다.
복소수란 a+bi처럼 실수(實數)와 허수(虛數)로 결합된 수를 말한다. ‘i’는 허수단위로서 제곱을 하면 ‘-1’이 되는 수를 뜻한다. 물리적 실재는 모두 실수로 나타낸다. 길이 질량-에너지 등 무슨 물리량이든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수로 표시한다. 이런 뜻에서 통상적으로 실수(實數)란 물리적 존재를 나타내는 수이고 허수(虛數)란 물리적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수라고 생각해왔다.
허수란 수학의 공리체계를 만족시키는 추상적인 수학적 존재를 나타내는 기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확률파가 등장함으로써 물리적 존재와 추상적 존재 사이의 관계가 애매해졌다. 확률파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고 간섭무늬를 통해 파동의 성질을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확률파를 가상적(假想的)인 존재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복소수로 표현되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입자-파동의 물리현상을 나타내는 파동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확률파는 존재-비존재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을 깨뜨리는 개념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측정 전에는 복소수로 표현되는 추상적(抽象的)인 세계, 또는 가상(假想)의 세계가 측정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실수(實數)로 표현되는 현실적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객관적인 실재란 없다. 인간이 보는 것은 측정행위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현상계가 본질적으로 가유(假有)임을 뜻한다. 물리현상은 진정 ‘공’과 ‘묘유’를 말하고 있다. 결국 제법실상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인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2호 [2009년 06월 15일 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