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禪家)에서는 “진리는 말로 설명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으니(言語道斷 心行處滅) 진리란 경전이나 문자로 설명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不立文字 敎外別傳)”고 말한다. 또는 “곧바로 마음을 살펴 성불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도 말한다. 이에 대해 보통사람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면 경전은 왜 있는가?”하고 물을 수 있다. 당연한 물음이다.
현대물리학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나 이심전심(以心傳心) 또는 ‘직지인심 견성성불’과 같은 말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언어도단 심행처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를 입자-파동의 이중성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벽면에 전자선(電子線, Electron Beam)을 쪼이면 맞은편 벽면에 밝고 어두움이 교차하는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입자는 간섭무늬를 만들지 못하므로 이것은 전자가 파동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간섭무늬는 파동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할 때만 나타나는 법이다. 구멍이 두 개 있더라도 한 번에 하나의 구멍만을 통과하도록 전자선의 세기를 약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간섭무늬는 생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의 전자가 둘로 쪼개져 각각의 조각이 구멍을 하나씩 통과하는가? 확인을 해보면 언제나 하나의 전자가 하나의 구멍을 통과한다. 전자 하나가 둘로 쪼개지는 법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확인하면 이번엔 간섭무늬가 사라진다.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면 마치 자신이 입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발각되었으니 더 이상 파동의 행세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전자는 더 이상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같은 상황, 같은 실험 장치에서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를 관찰하면 입자처럼, 관찰을 중단하면 전자는 다시 파동처럼 행동한다.
구멍을 열 개 뚫어 놓으면 하나의 전자가 열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전자가 해파리처럼 전 공간에 넓게 퍼져 있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중성을 처음 발견했을 때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하나의 전자가 넓은 공간에 퍼져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찰해보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관찰하면 언제나 전자는 하나의 점(點)과 같이 공간적 크기를 갖지 않는 점입자(Point Particle)일 뿐이다. 그런데 입자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의 점이 동시에 여러 곳, 열린 공간이라면 전 공간에 퍼져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의 입자일지라도 ‘관찰하지 않으면 파동으로서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고 관찰하면 어느 한 곳에 점입자로 나타난다’는 것은 관측결과이다. 이것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그냥 관찰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자연이 내 뜻대로 행동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다. 자연현상, 즉 자연의 생긴 모습에는 쉽고 어렵고가 없기 때문이다.
장차 설명하겠지만 물리학자들은 이 파동을 실체가 없는 파동으로 해석하고 확률파(確率波)라 이름 짓고 이론을 정립한다. 그 때 ‘이 이론적 해석은 어렵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삼라만상이 본질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본 선승들은 “언어도단 심행처멸 불립문자 교외별전(言語道斷 心行處滅 不立文字 敎外別傳)”라고 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0호 [2009년 06월 01일 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