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들은 ‘이것이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하고 ‘이것이 아니다’라고 해도 틀렸다고 한다.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思考)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사물을 대립되는 개념, 즉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보기 마련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논리의 법칙과 경험적 직관에 꼭 들어맞는다. 생사(生死)의 문제라면 살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이지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란 없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오는 개념들을 몇 가지 더 꼽는다면 주(主)-객(客), 음(陰)-양(陽), 유(有)-무(無), 선(善)-악(惡) 등일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컨대 세상에 이중성(二重性, Duality)을 갖는 사물이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이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성질을 함께 가질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불교는 일찍부터 이중성이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범부 즉 부처’, ‘생사 즉 열반’, ‘번뇌 즉 보리’, ‘색심불이(色心不二)’와 같은 표현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파동(波動)이라고 생각했던 ‘빛’이 입자(粒子)처럼 행동하는 현상을 몇 가지 발견하고 당황하였다. 벽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 빛을 쪼이면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면에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交叉)하는 무늬를 만든다. 이것을 간섭무늬라고 하는데 입자는 간섭무늬를 만들 수 없고 파동만이 간섭무늬를 만든다. 빛이 간섭무늬를 만든다는 것은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가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파동과 입자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몇 가지 더 갖고 있다. 음파(音波)인 소리를 하나 둘하고 셀 수 없는 것과 같이 어떤 파동이든지 파동을 셀 수는 없다. 반면에 입자는 모래알처럼 똑 똑 떨어져 있기에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다. 입자는 한 곳에 가두어 둘 수 있지만 파동은 전파되어 허용된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된다. 또한 입자는 다른 입자를 튕겨낼 수 있지만 소리나 물결파와 같은 파동은 입자를 튕겨내지 못한다.
1923년 컴프턴(A. H. Compton, 1892~1962)이라는 물리학자가 컴프턴 효과를 발견한다. 이것은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쳐서 튕겨내듯이 ‘빛’이 다른 입자를 쳐서 튕겨내고 ‘빛’ 자신도 튕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발견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의 이중성에 이어 곧바로 입자인 전자(電子, Electron)도 빛처럼 간섭무늬를 만드는 것이 관찰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임을 발견한 것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에 잘못이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율배반적인 성질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불교는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사물전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여여(如如)라고 하며 이분법적 사고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여여한 것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에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지구의 구면(球面)을 평면(平面)인 지도에 있는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불교는 즉(卽) 또는 불이(不二)로써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여여한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성구 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998호 [2009년 05월 18일 1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