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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⑧ 불상

slowdream 2009. 5. 3. 21:16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⑧ 불상
불상은 진리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편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복만 빌면 허망
기사등록일 [2009년 04월 28일 11:15 화요일]
 

불상(佛像)을 모시고 그 앞에서 절하고 불공(佛供)드리는 것을 미신(迷信)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미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를 찾는 마음이 없이 삿된 견해와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복(福)만 빈다면 허망한 행위요 보답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단하(丹霞) 순(淳) 선사(禪師)는 태연히 목불(木佛)을 쪼개어 땔감으로 썼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이 말과 글로 표현하는 언어다. 그런데 사람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이 느낀 감동과 아름다움을 일상적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언어가 아닌 다른 표현 수단을 사용한다. 노래로 표현하면 시(詩)요, 소리로 나타내면 음악(音樂), 몸으로 표현하면 무용(舞踊), 선(線)과 물감으로 표현하면 그림, 돌이나 금속으로 형상(形象)을 나타내면 조각(彫刻)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예술이다.

 

사람이 느끼는 감동과 경외감 중 최고의 것은 종교적 진리를 깨달았을 때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최고의 진리를 여러 가지로 표현해왔다. 언어로 표현하여 신(神)이나 불(佛)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법성(法性, Dharmata), 공(空), 하늘, 도(道) 또는 태허(太虛)라 부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이들 언어가 주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진리를 원(圓)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얻은 감동을 특별히 조각상(彫刻像)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이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을 따라 인도까지 와서 북부인도를 지배하게 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이들은 불교적 진리를 말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이들은 부처님의 색신(色身)의 형상(形象)으로 진리를 표현하였다. 이것이 불상(佛像)이다.

 

역사적으로 북부인도를 침공한 사람들은 불교인들이 불상 앞에서 예불(禮佛)을 올리는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조롱을 해왔고 때로는 불상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람들의 무지에서 온 독선적 행위이다. 불상은 진리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불상을 통해 불상이 상징하는 진리를 보는 것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사람은 불상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예불을 드리고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불이야말로 수행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단하 선사도 이런 사람 앞에서는 불상을 태우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그 영역과 목적이 다르다고 하지만 공통적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도록 하는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에서 첫째로 꼽는 덕목도 정견(正見)이다. 진리를 알고 그릇된 욕망과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하는 말도 같은 뜻일 것이다. 진리를 찾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열린 마음이다. 열린 마음은 이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남을 이해하고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다.

 

불상이 진리의 상징이냐 미신의 상징이냐 하는 것은 사실 고정된 것이 아니다. 불교인의 자세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서 지혜와 자비를 묻고 참다운 가치를 찾고 실천한다면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불교는 과학적인 종교가 되고 불상은 진리의 상징이 될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6호 [2009년 04월 28일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