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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⑤진공묘유(眞空妙有)

slowdream 2009. 4. 10. 04:05

[김성구 교수의 불교와 과학]⑤진공묘유(眞空妙有)
진공은 텅 빈 게 아니라 가득찬 상태
입자-반입자가 결합해 생멸을 반복
기사등록일 [2009년 03월 17일 10:12 화요일]
 

불교의 ‘공(空)’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체득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공’의 의미를 짐작하기에 좋은 대상은 아무래도 물리적 진공(眞空, Vacuum)이 아닌가 한다. 한동안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진공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영국의 물리학자 디락(P. A. M. Dirac, 1902~1982)은 진공을 다르게 생각했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자유 입자가 갖는 에너지를 계산하면 E²=m²c⁴의 꼴로 나타난다. E=±m이 되는데 이 중에서 E=(-)m은 입자의 질량이 음수(陰數)값을 갖는다는 뜻이다. 세상에 음수 값의 질량을 갖는 입자는 없다. 그러나 디락은 음수의 질량을 갖는 입자들은 관측되지 않을 뿐이고 이 입자들이 진공을 빈틈없이 가득 메우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다 속에 지능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하자. 바다 속에 있는 한 이 물고기는 바닷물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텅 빈 공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다 바닷물 가운데 기포가 일어나면 물고기는 이 기포를 입자 하나가 새로 생겨난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진공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공간이 무엇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사람은 ‘빈틈없이 차 있는 상태’와 ‘텅 빈 상태’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진공이 어떤 입자들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는 상태라면 진공에서 입자가 하나 없어진 상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 이 입자를 전자(電子, Electron)라고 부르자. 이 상태에 전자를 하나 집어넣으면 다시 진공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전자를 하나 집어넣을 때 진공으로 돌아가는 상태라면 이런 상태는 진공에 구멍이 하나 뚫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진공에 구멍이 뚫어지면 진공은 더 이상 진공으로 관측되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진공에 뚫린 구멍에서 관측되는 것은 구멍이 가진 물리량일 것이다. 진공에 뚫어진 이 구멍을 반입자(反粒子, Antiparticle)라고 부른다.

 

반입자의 질량은 정확하게 대응하는 입자의 질량과 같을 것이고 다른 물리량은 대응하는 입자가 가진 물리량과 크기는 같고 부호는 반대일 것이다. 진공과 반입자에 대한 이러한 추론은 이미 1930년에 디락이 구멍이론(Hole Theory)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 것이다. 디락의 구멍이론이 나왔을 때 당대의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모두 비웃었으나 1931년에 전자의 반입자인 양전자(陽電子, Positron)가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실험적으로 확인된 바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립자에는 대응하는 반입자가 존재한다. 디락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장론(量子場論)에서는 진공을 디락의 바다와는 약간 다르게 설명한다. 양자장론에서는 진공을 입자-반입자가 쌍으로 결합되어 있으나 관측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진공 속의 이들 입자와 반입자는 정지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진공과 현상계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을 반복하고 있는 이 입자들은 현상계의 입자들과도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진공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진공에서 이 우주가 탄생했다고 믿을 정도이다.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그야말로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리적 진공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90호 [2009년 03월 17일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