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공(空)’을 무(無)라고 해석하면 많은 불교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를 허무(虛無)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는 ‘없음’만을 뜻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그릇에 든 물건을 깨끗이 들어내면 그릇은 비게 된다. 이 빈 그릇의 상태를 ‘무’라고 표현하면 누구나 이 ‘무’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며 ‘무’엔 ‘없음’ 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무’가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무’는 조화를 부리기 시작한다. ‘무’를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하면 이성제일주의(理性第一主義)의 철학이 나오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 ‘무’는 현대수학의 중요한 개념이 된다.
뿐만 아니다. 텅 빈 공간의 상태를 진공(眞空)이라 부르는데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양자론은 진공이 무엇인가로 빈틈없이 차 있다고 본다. 양자론적 진공을 뜻하는 이 ‘무’에서는 우주도 탄생할 수 있다. 이때의 ‘무’는 무한대(無限大)와 유사한 개념이 된다. 극(極)과 극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여 ‘없는 것(無, 非存在)’과 ‘있는 것(有, 存在)’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무’란 없는 것이기에 사유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사유는 오직 ‘유’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사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고 존재와 사유가 같은 것이므로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이성적 사유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철학의 합리주의(Rationalism)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무’는 없는 것이기에 ‘참 존재’는 유일실재(唯一實在)일 수밖에 없으며 충만함과 영원불멸을 뜻하게 된다. 이것은 유일신(唯一神)의 개념과 잘 맞는다. 이렇게 보면 서양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없는 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기호로 표시하면 ‘무’는 또 다른 작용을 하기 시작한다. ‘중변분별론’에서 말하는 ‘없음의 작용’이 작동하는 것이다. 존재의 측면에서 ‘무’를 표현하면 영(零)이라는 숫자가 되고 작용의 측면에서 표현하면 항등원(恒等元, Identity)이 된다. 항등원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어떤 정해진 종류의 연산(演算)을 하더라도 대상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수학적 원소를 가리킨다.
‘영’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이 진법(進法)에 맞추어 숫자를 자리수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덧셈과 곱셈의 항등원으로서 ‘0’과 ‘1’이 없다면 사칙연산(四則演算)과 이와 관련된 다른 수학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수학과 물리학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론(群論, Group Theory)이라는 수학이론이 있다. 이 군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항등원, 즉 ‘무’의 개념이 꼭 필요하다. 군론이 없었다면 현대의 소립자물리학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를 분류하고 새로운 소립자를 예견하는 것은 다 군론 덕분이다. 이 세상을 한 가지 종류의 소립자와 상호작용만으로 설명하려는 통일장이론도 군론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
정신적인 면은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역설적이고 신비스런 조화를 부리는 개념이 ‘무’다. 정신적인 면까지 포함하여 신비한 ‘무’의 참 모습을 그대로 체득한 것이 반야(般若)요, 이를 불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공’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반야심경에 의하면 그렇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986호 [2009년 02월 16일 1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