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은 ‘삼계허위 유심소작(三界虛僞 唯心所作)’이라고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다. 삼라만상이 알고 보면 다 마음이 만든 것으로 실재(實在, Reality)하는 것이 아니며 실체(實體, Substance)도 없다는 뜻이다. 사실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유에 의한 추론이 아니라 불교의 수행승들이 깊은 선정 속에서 체험한 바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에게는 외계에 객관적인 사물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양자역학은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 이것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보통 “입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라고 요약된다. 일상경험에서 갖는 개념으로 입자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안다는 것을 뜻하는데 불확정성원리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이유는 이렇다. 사람이 물체를 본다는 것은 물체를 때린 후 산란된 빛이 사람의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체가 전자와 같은 작은 입자라면 이 물체는 빛에 의해 튕겨나가게 된다. 따라서 미시세계에서는 입자가 어디에 있다고 위치를 아는 순간 입자가 튕겨나가게 되므로 입자의 속도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
역으로 속도를 측정하면 위치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관찰자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 모두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관찰자가 관찰한 위치와 속도에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불확정도(不確定度, Uncertainty)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것은 관찰자의 관찰행위는 언제나 관찰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하며 인간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관찰행위와 무관한 물리계란 없다는 뜻이다.
관찰할 때마다 관찰행위가 관찰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면 ‘관찰자가 보는 것’은 자신이 창조해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관찰하기 전에 입자가 어딘가에 있었기에 빛을 쪼여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물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률파의 의미다. 관찰하기 전까지 입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만이 전 공간에 걸쳐 있었다. 관찰도구가 확률파에 충격을 줌으로써 파동이 사라지고 입자가 나타난 것이다.
실재성(實在性)의 문제는 관찰자가 의식(意識)을 가진 존재여야만 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관찰자가 지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관찰결과는 관찰행위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에서는 관찰도구도 훌륭한 관찰자라고 본다. 이것은 물리학이 마음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으로 나누어 생각한 것부터가 인식하는 자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위치와 속도를 둘 다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면 어느 쪽을 더 정밀하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 문제를 측정기구가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전통적 해석은 측정도구가 관찰대상과 접촉하여 물리계에 충격을 주어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의 실험은 측정도구가 준 충격과 상관없이 관찰자가 물리계에서 정보를 얻기만 하면 물리계의 상태가 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객관적 실재란 없다. 일체유심조인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6호 [2009년 07월 13일 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