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김성구교수의 불교와 과학] ⑭ 사량분별(思量分別)

slowdream 2009. 8. 8. 23:31

[김성구교수의 불교와 과학] ⑭ 사량분별(思量分別)
‘너’와 ‘나’ 분별하는논리, 고전물리학바탕
불교와양자역학에서는 이분법적사고경계
기사등록일 [2009년 07월 28일 18:40 화요일]
 

불교는 ‘나’와 ‘너’를 구별하는 것이 허망분별이라고 하며 선악시비(善惡是非)를 일삼는 사량분별(思量分別)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세계를 주체와 객체,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육체와 영혼이라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불교인과 물리학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적 지혜의 시작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지성과 논리의 법칙은 이분법적 사고(思考)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서양 합리주의 철학의 바탕이자 고전물리학의 바탕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서 사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계를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인가? 불교의 수행자들은 선적(禪的) 체험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선승들과는 달리 하이젠베르크가 ‘주’와 ‘객’의 개념을 떠나 사물이 하나임을 체험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이젠베르크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이라는 과학적 관찰 결과를 통해 사람이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사물의 표피(表皮)만을 보고 있음을 추론(推論)하고 그 내용을 말한 것이다.

 

표피만 보면 사람은 대립적인 개념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 불교의 초기부터 불교의 논사들 사이에서 “부처에게도 욕망(慾望)이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처가 초탈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고요하여 욕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비심(大悲心)은 중생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따라서 대비심은 욕망이다. 이것이 논란의 요지다. 이 논란은 부처님의 열반 후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논자들이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여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깊이 빠져들어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문자에 매였던 것이다. 고(苦)의 원인이 욕망으로 인한 집착(執着)에 있다고 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시각으로, 즉 이분법적으로 욕망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욕망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다. 욕망은 무엇을 바라고 탐(貪)하는 마음이다.

 

탐하는 것은 애착에서 오는 것인데 애(愛)의 근본은 우리 마음의 활성(活性)이다. 즉 마음의 본성(本性)이다. 활성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활성은 옳고 그름을 떠난 마음의 본성이다. 마음의 본성에 잘잘못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자유스럽고 원만한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만 구하여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삶의 참다운 가치를 생각지 않고 욕망의 달성만이 삶의 목적이 된다면 삶이 고달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욕망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견(正見)이 없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실 진리를 깨달았다 할지라도 이를 언어로 나타내려고 하면 논리의 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량 분별하는 사유(思惟)의 법칙이 바로 논리의 법칙이므로 언어로써 진리를 표현할 길은 없다.

여기엔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진리란 언어를 떠난 것”이라 말하고 유마거사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묻자 유마거사는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적 법칙은 언어로 표현된 것이지만 언어 이상의 것이다. 관찰이 과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달은 아니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08호 [2009년 07월 28일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