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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비불설논쟁/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slowdream 2009. 9. 28. 00:54

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마성 스님 논평 조목조목 반박
니카야는 상좌부-잡·중아함은 유부 경전
마성 스님 비평은 학문보다 상식 기댄 것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17일 11:50 월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 한국불교사연구소 발행)에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가 다시 마성 스님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불상이 성립되기 전에는 부처님의 모습 대신 법륜, 보리수,불족석(佛足石) 등으로 부처님을 표현했다. 사진은 인도 보드가야에 남아 있는 불족석.
마성 스님이 논평에서 ‘충격적’이라고 하였듯이 필자 역시 그러하였으며, 문제의 논문(「佛說과 非佛說」,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도 ‘놀라운 일’임을 거듭 밝혔다. 그러니 초기불교 전공자나 테라와다 불교에 신념을 두고 있는 이라면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는 말씀부터 올린다.

 

한정된 지면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마성 스님의 논평은 필자가 제시한 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어야 함에도 다만 개론서에 나옴직한 상식과 정의(情意)에 기댄 것이어서 반론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지만, 논쟁을 ‘종파적 대결’로 몰아가는 점만은 묵과할 수 없어 반론의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처음부터 그것을 경계하였으며, 그래서 논문 서두에서 대·소승 제 학파의 학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오늘의 우리보다는 경전성립시기에 훨씬 가까웠을 시대(대략 2~6세기)의 문헌상의 증거로만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필자는 제 부파 사이의 비불설의 사례를 20가지 이상 들었다. “어떤 성문의 부파에서 전승한 경은 다만 성문이 설한 것일 뿐이다”는 『성실론』에서의 문제제기는 물론이고, 독자부(정량부를 포함하여)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무아에 관한 제경(예컨대 잡아함 제303경 등)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경량부가 눈 등의 5근과 색 등의 5경이 4대와 4대소조라고 설한 경(잡아함 제322경)을 유부에서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필자에게도 충격이었다. 더욱이 경량부는 경(經)을 지식의 표준(量)으로 삼는다고 표방한 부파였다.

 

그렇다고 필자는 승의의 자아(pudgala)를 인정하는 독자부와 정량부를 부법장(付法藏) 외도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또한 그것이 역사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법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불교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유가행파(법상종)는 비록 역사상에서 사라졌지만 여래장이나 화엄을 통해 존속되고 있으며, 유부의 제법분별 또한 이후 불교교학의 토대가 되었다. ‘구사8년 유식3년’이란 말이 생겨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불설/비불설’의 논쟁이 종파적 대결로 번지는 것을 경계한다고 하였는데, 마성 스님은 필자의 논문을 그렇게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하고 있다. 필자는 “유부의 학설이 정설인양 대변”한 적이 없으며,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논증을 끌어들여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적도 없다.

다만 어느 시기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에 근거하여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이에 따를 경우 說者는 중요하지 않다)는 등의 4의설(依說)과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불설이다”는 불설의 정의가 확립되었고(문헌상으로는 유부에 의해), 그것이 무착, 세친, 청변 등의 대승논사를 비롯한 하리발마, 중현 등의 소승논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경전 또한 이에 기초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이다.

 

또한 유부가 당시 분별설부로 알려져 있던 상좌부를 공격하던 내용을 ‘자세히’는 고사하고 한 번도 소개한 적이 없다. 아마 마성 스님은 상좌 슈리라타를 상좌부로 오인한 모양인데, 여기서 상좌는 『구사론』 상에서 ‘경량부’로 일컬어진 논사로서 세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이다. 그리고 공격(비판)하였던 것은 상좌 슈리라타였지 유부가 아니었다.
주지하듯이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의 경명(經名)이 아니라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일군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 아함이 아함경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중국에 이르러서였다. 청변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전통’과 ‘진실’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 스님의 말대로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했다.”

 

그렇다면 이 때 ‘정법’은 불교보편의 정법인가, 상좌부 전통에서의 정법인가. 스님은 계속하여 “이를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좌부 이외 부파,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법성(진실)’이나 ‘정리(正理)’라는 이름 하에 결집한 불설”은 비법(非法)이라는 말인가. 오늘날에 있어 이 같은 독선적 발언이 어떻게 가능한가. 묻고 싶다. 대저 아함과 니카야는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

결코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성 스님은 “아함이나 니카야도 개변 증광되었고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롯되었다’는 말과 ‘친설’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 필자는 논문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아함이나 니카야 또한 친설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제 논사들은 ‘불설(buddha vacana)’과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교(聖敎, buddha ´Sa-sana 즉 아함과 니카야)’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성교는 말하자면 불설의 정의에 따라 각 부파에 의해 불법(佛法)으로 승인된 불설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카야는 불타친설이라기 보다는 유부나 상좌부에 의해 불법으로서 취사선택되고 편찬 결집된 불설로서, 제 부파간의 불설/비불설의 논쟁 또한 이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마성 스님은 이러한 부파 간의 비불설 논쟁과 부파교단에서 비판한 대승 비불설론(실제 소승 논서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의 단순비교는 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로서는 잘 납득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스님은 개론서에서의 진술처럼 대승과 소승을 칼로 무 자르듯이 시기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혹은 교단 상으로 완전히 별개의 그룹으로 간주한 것 같다.

 

유부와 상좌부는 원래 동일계통이었기에 교학상의 크나큰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부 계통이나 정량부는 이들과는 교학체계 자체가 다르며, 유부 계통으로 알려진 경량부조차 유부와는 전혀 다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 불교를 전공한다는 필자도 그들의 논서(예컨대 삼미저부론, 성실론)를 읽어내기 어렵다. 유부교설(우리가 익히 아는 ‘불교기초교리’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들 부파의 학설은 비법인가.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당시 대중부와 정량부는 상좌부 유부와 더불어 가장 볼륨이 컸던 불교교단이었으며, 정량부가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 역시 삼장을 갖고 있었지만(현장은 그것을 갖고 오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그들의 경전이 존재하였다면 대승경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함에서 설한 18계의 ‘법계’와 여래장불교 계통의 ‘법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경량부(상좌 슈리라타)를 통하면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부에 의하는 한, 여래는 항상 선정에 머물기 때문에 일생토록 한 말씀도 한 적이 없지만 중생들이 설하였다고 여겨 환희용약하며, 보살은 중생의 요익을 위해 스스로 악취에 태어난다. 이러한 불타관과 보살관은 유부나 상좌부의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해서 다만 현존의 아함경과 니카야에 근거하여 대승경전을 딴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표를 던져 결정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나아가 세친도, 청변도, 중현도 제1결집은 모두 산실되었다고 전하며, 그 이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이는 필경 ‘정법의 소멸’과 관계 있다) 제1결집 또한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교범파제는 율장을 결집할만한 이로 추천되었지만 이를 거절하였고(『대지도론』), 흔히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는 결집의 추인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들은 것만을 전승하였으며(남전 율장 소품), 가섭 주도의 결집과는 별도로 대결집이 단행되기도 하였다.(『대당서역기』)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카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문자로 작성되기(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30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그 때는 이미 대승경전도 편찬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온갖 한계를 간과한 채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학자의 소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정의(情意)와 신념에 의탁하여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0호 [2009년 08월 17일 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