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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비불설논쟁/동국대 황순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slowdream 2009. 9. 28. 01:45

니까야 체계적 전승…‘친설’ 담겼다
동국대 황순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대승경은 개개인 사경…가감 가능성도 커
‘친설’ 잣대로 동일선상 놓고 볼 수는 없어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18일 09:41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권오민 교수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본지 1008호~1014호) 이런 가운데 황순일<사진>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가 권오민 교수와는 다른 견해의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 도솔천에 올라가 설법했다는 ‘상카시야 전설’을 조각한 인도 바르후트 탑. 상좌부 전통에서는 아비담마도 이때 설해졌다고 본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불설’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빨리어는 buddha-vacana이다. 인도유럽어에서 복합어 앞자리에 오는 용어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buddh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 용어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단수 고유명사로 본다면 buddha-vacana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친설’이라고 할 수 있고, 복수 일반명사로 본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불설과 친설은 모두다 buddha-vacana에 해당되는 한문용어로 볼 수 있지만, 그 외연은 친설보다 불설이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양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종교로서 받아들여졌을까? 불교가 일반적으로 Buddhism으로 영역된다면, 라이벌 종교였던 자이나교는 Jainism으로 영역된다. 자이나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Jina 즉 승리자로 불린다. Jaina는 Jina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승리자들에 속하는’이란 의미를 지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는 한사람의 승리자(Jina)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수의 승리자들의 교리체계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교가 결코 Baudhism으로 지칭되지 않았다는 점은 불교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교리체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이라도 초기경전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옮겨놓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동일한 경의 이본들 사이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경들에서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수행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전통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교단은 빨리 삼장(tipitaka)을 이러한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즉 친설 로서 받아들인다.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서로서 확실히 붓다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빨리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상카시야(Sāmkāsya)와 관련된 전설까지 동원하고 있을 정도로 빨리삼장의 정통성을 부처님의 말씀 즉 친설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불교가 학문적으로 연구된 이래에 남방불교 교단의 이러한 주장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빨리어 문헌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발견된 8세기경의 필사본으로, 남방불교 국가에서 발견된 오래된 필사본들은 거의 대부분이 17~18세기경의 문헌으로 추정될 뿐이다.

 

특히 스리랑카의 경우 15세기 이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소실되어 버렸고, 12세기 미얀마 문법학자들에 의해서 음운체계가 대대적으로 수정된 필사본들이 미얀마와 태국을 통해 17세기 이후에 역수입된 것들만 남아있다. 빨리경전협회(PTS)에서 출판된 빨리 삼장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역수입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편집되고 로마자화 되어서 출판된 것에 불과하다.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 남방불교 테라와다 전통은 빨리어(Pāli)를 마가다어(Māgadhī)라고 주장한다. 고따마 붓다가 자신이 활동했던 마가다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을 것임으로, 빨리어가 마가다어라는 것은 빨리삼장의 언어가 고따마 붓다의 언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전역에서 그 지역의 방언으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언어들과 빨리어를 비교해보면 빨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인도 지역의 방언들보다는 서인도 지역의 방언들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

 

한역 아함경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기인도어인 프라끄릿어 (Prakrit)로 문자화 되어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한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마치 단일한 부파에 속하는 것처럼 모여 있지만, 장아함은 법장부, 중아함과 잡아함은 설일체유부, 그리고 증일아함은 대중부에 속하는 문헌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북서인도에서 발견되어 독일과 영국에서 편집되고 있는 싼스끄릿어(Sanskrit) 근본설일체유부 장아함경이 한역 장함경에 비해서 크기가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중아함에 있는 몇몇 경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역 4아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빨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전전통의 측면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은 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초기경전은 최초에 성립된 후 적어도 200~300여 년간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점차적으로 문자화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멸직후 라자가하(Rājagaha)에서 있었던 제1결집에서 경․율․론의 삼장이 합송되었다는 율장의 기록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따마 붓다의 사후에 그 직계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율장에서 나타나는 제1결집과 같은 규모로 500여명의 아라한들이 모이는 거대한 결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스승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칙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승단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암송에 의존한 구전의 경우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변형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쉽게 삽입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시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시기보다 훨씬 더 적게 변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경전은 한명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라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목록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주석전통은 여기에 더해서 디가 합송자(Dīgha-bhānaka) 맛지마 합송자(Majjhima-bhānaks) 등으로 이러한 역할이 점차적으로 더욱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숫자의 전문가집단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암송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기억의 한계에 기인한 실수가 전체 승려들의 합송을 통해서 보안되고 정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단순한 오기와 의도적인 가감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자에 의한 전승보다도 구전의 경우에 변형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하여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경전은 이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조사했던 랑스카진이 「빨리구전문학」이란 논문에서 주장했듯이 부파를 달리하는 개별적인 판본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경이 설해진 장소, 등장인물, 상황전개순서 등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서, 교리적 부파적 차이에 기인한 차이는 아주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한편 대승경전은 체계화 분업화된 승단에서 조직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처드 곰브리치, 폴 윌리엄스와 같은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탄생을 경전의 문자화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승불교 필사본의 연대가 기원전 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도의 중심부에서 대승불교의 흔적은 기원후 400년 이전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부파불교와 같은 체계화되고 분업화된 승단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고립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자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서 대승불교는 개개인의 생각과 개개인의 체험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환경을 만난 것이다. 구전 전통에서 승단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는 경전은 합송을 통해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인 견해가 이미 문자화되어 경전의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경전이 소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경전이 개개인에 의해 사경될 때,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문자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배경에서 반야경 계열의 초기대승불교 경전들은 판본을 달리하면서 점차적으로 분량이 많아지고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학계에서는 초기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전통에 기인한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전통의 체계로부터 일정 정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필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만을 불교로 보려는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초기․부파불교 전공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소망을 하나 가지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많은 외적 영향을 흡수하면서 번잡해져버린 초기경전에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친설)을 정말 한번 추려내어 보고 싶다.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5호 [2009년 09월 18일 0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