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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비불설논쟁/권오민 교수, “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slowdream 2009. 9. 28. 01:37

권오민 교수, “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에 재반론
‘디파밤사’ 1차 사료 부적합은 학계 정설
“니까야 고층-대승경전 신층” 금시초문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11일 10:31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으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도 니까야는 창작이 아닌 여러 지역서 수집된 ‘리얼리티’ 자료로 권 교수는 고고학‧문헌학적으로 입증된 사실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본지 1008호~1013호) 이에 권오민 교수가 전재성 회장의 반론을 다시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인도 부드가야의 석상.

반론자가 바뀌었지만 반론의 내용은 역시 놀랍다. 우리나라 불교학에서 ‘신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기불교 연구자조차 이토록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연성[調柔]은 불타의 7선(善) 중의 하나라는데. 필자의 명색의 전공은 아비달마불교이다. 아비달마는 아함과 니카야로 대변되는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이다.

 

필자는 지난 삼십 년 간 이 불교를 포함하여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진 초기불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구호로 점철된 우리 불교학계의 경직된 사고에 대해 비판해왔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러한 내용의 몇 편의 글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투정’이라 자조하였다. 헌대 거의 모든 인도불교사에 기술된 ‘니카야는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이라니.

 

거듭 말하건대,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사족에서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음에도 반론자마다 그것을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카야도 비불설이다”고 오독하여 필자를 물귀신(Lokāyata의 vitandā sattha)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힐난할까 두렵다. 딴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신념이 두려운 것이다.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한정사는 불설의 기준이 ‘친설’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말로서, 필자는 오로지 이를 밝히기 위해 4백 매에 달하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논거만도 30여 종의 대․소승의 경론 상에서 200개 이상을 제시하였다.

전재성 회장은 필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을 친설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알고 있다면 ‘명심보감 운운’하며 희화할 것이 아니라 필자가 제시한 논거를 비판했어야 하였다. 필자는 이미 논문의 본문에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법성에 부합하면 불설이다”는 중관학파의 대표논사인 청변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또한 “도미나가의 대승비불설 충격으로 인해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하였다”고 하여 필자의 논문을 그것의 아류로 여기고 있지만, 중현은 대승불교권도 아닐 뿐더러 일본의 어떤 이가 소승의 아비달마논서를 이용해 대승불설론을 펼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제의 논문에서 소승의 부파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불설/비불설론을 통해 ‘불설=친설’이라는 종래의 상식을 비판하고 대‧소승이 다같이 수용한 불설론의 자취를 탐구하였다. 헌대 전 회장은 엉뚱하게도 여기에 고층/신층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다.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쇼카왕 비문에 기록된 7가지 경설을 통해 볼 때 아함․니카야는 고층임이 명백하다”고 하였는데, 이 때 ‘고층’은 친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쌍윳따』 하나만 해도 경의 수는 3천에 이른다) ‘까마귀 운운’의 로타야타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초기경전이나 『숫타니파타』 안에서 고층과 신층을 나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아함‧니카야는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다.

한편 전 회장은 『아미타경』도 무상․고․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라니도 탐진치의 소멸이기 때문에 비불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설하고, 번뇌소멸만 설하면 불설(=친설)인가? 무아설 등이 불설의 기준인가? 그러나 독자부나 정량부에서는 무아를 설하는 제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가 아니다”고 한다면 필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현장이 인도에 체류할 무렵 유부에 버금가는 세력의 부파였다.

 

또한 4의설(依說) 자체가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증거라고 하였지만(4의설은 아함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좌부에서는 4의설을 인정하는가?(마성 스님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은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도 경과 율에 위배되면 비불설로 버려야 하고, 경과 율과 논모를 지닌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도 이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다만 설한 사람인가,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인가?

 

전 회장은 이에 따라(다시 말해 부파마다 불설/비불설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마성 스님의 반론은 탁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 성립의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성(史實性)’을 무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일찍이 『인도불교사』(1985, 경서원)라는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는 대개 경전성립에 관해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밧지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과 상좌부/대중부의 근본분열) 아쇼카왕 시대 목갈리풋타 팃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이는 모두 남방 상좌부 전승에 따른 것으로, 결집과 분파에 관한 한 제 전승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제2결집의 경우, 우리는 대개 장로 야사가 밧지 비구들이 행한 금은수납 등의 열 가지 일을 비법으로 지적하자 도리어 거갈마(擧羯磨, 교단에서 일시축출)에 처함에 따라 이를 서방의 장로들에게 알려 이른바 제2결집을 단행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도 대결집을 단행함으로써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하고 이후 18개 부파로 지말분열하였다고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수납을 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역시 비법으로 배척한다. 그렇다면 근본분열에서의 ‘대중부’ 정체는 무엇인가?

 

제2결집을 근본분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4~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사서 『디파밤사』뿐이다. 여기서는 계속하여 불멸 100년과 136년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제3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āvatthu)』를 지었으며, 불멸 236년에도 다시 제3결집을 단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성 스님도, 전 회장도 이에 근거하여 상좌부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니카야를 친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사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난한다.

 

“아쇼카왕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제3결집)을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한 다른 부파의 사적인 경전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훈계하였는데, 불교의 전승 상에 도대체 몇 명의 아쇼카왕이 등장하는지 알고 한 말인지, 무슨 근거에서 ‘사적 경전 운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쇼카왕 때 대천(大天)의 5사송에 의한 근본분열이나 카니시카왕의 후원으로 실행된 유부의 결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사송 또한 대천과 관련지어 설한 것은 오로지 『이부종륜론』뿐이다. 『디파밤사』든 『이부종륜론』이든 일차사료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경 스님도 “가상적 사서인 『디파밤사』를 역사적 증언으로 수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라모트 같은 이는 “결집의 전승은 성전문헌과 그 후의 여러 부파의 성전들(양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학계에 자주 회자되었던 사사키 시즈카는 부파분열을 비롯한 초기불교 교단사에 관한 한 서로 상충되는 거의 모든 정설(定說)은 후대 개변되거나 가탁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인도불교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유래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이에 관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시대적으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혹자는 여기에 불타 재세시의 불교라는 뜻의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든 근본불교든 그것을 전하는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였지 반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카야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문자로 작성되며, 스리랑카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도 팔리어 삼장의 분류와 구성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황순일 교수는 곰브리치 교수의 불교학 방법론을 전하면서 “우리는 팔리 니카야 또는 한역 아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문헌일 것이란 환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하며,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교리적 영향 아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 또는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모트 역시 말하였다. 모든 성전들이 부파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초기불교시대에 이미 고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제1결집 이래 3~4백여 년 간 면면히 구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사자상승의 계보도 전할뿐더러 경은 송경자(誦經者, sūtrāntika)라 불린 전문집단에 의해 전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율상수나 법사들의 계보는 부파마다 다를뿐더러 후대 작성된 것이다. 송경자 또한 다수의 부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도 확인된다.

 

그런데 왜 송경자가 필요하였을까? 다만 경을 암송하는데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인가? 필자는 이들이 정법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잡아함』제640경을 비롯한 다수의 전승에서는 샤카․야바나 등 서방에서 침입한 왕들의 무자비한 파불(破佛)과 불교 내부의 분쟁으로 인한 정법의 멸진을 전하고 있으며, 논서에서는 “불타 교법은 누구에 의해 유지 전승되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불교에 누가 될지라도 불교학은 그것이 ‘학’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전 회장은 니카야는 아무런 단절 없이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목갈리풋타가 비판하였던 이설자는 누구인가?

 

『디파밤사』에서는 외도 적주라고 하였지만, 리스 데이비드 부인은 『카타밧투』의 이설자로서 독자부, 정량부, 설일체유부, 대중부, 안다카, 계윤부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들은 왜 외도 적주로 불렸을까? 그들은 상좌부의 무엇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상좌부의 대응논리는 무엇이었던가? 상좌부는 그들을 끝끝내 배척하여 불교교단에서 몰아내었던가?

 

이상과 같은 학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오로지 상좌부 전승의 니카야만이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으로, 이를 상대로 논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쟁의 생명은 모름지기 논거의 제시와 상대방 논거(또한 비유)의 비판적 검토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4호 [2009년 09월 11일 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