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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비불설논쟁/권오민 ‘하나만 진실’은 다양성시대에 역행

slowdream 2009. 9. 28. 01:49

‘하나만 진실’은 다양성시대에 역행
권오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초기불전이 부파 소산이듯 대승도 부파에서 비롯”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도식적 이해는 잘못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25일 10:12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이를 반박하면서 서로 논쟁이 이어졌고, 황순일 동국대 교수도 최근 권 교수와는 다른 입장을 표명했다.(본지 1008~1015) 이런 가운데 권 교수가 다시 황순일 교수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인도 룸비니의 붓다 탄생상.

(1)

이제 이 논쟁을 마무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 그동안 대다수의 독자들께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두고 서로가 불설이 아니라고 하니,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구차스럽게 다시 변명하자면, 필자는 초기든 대승이든 혹은 위경이든 불설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초기경전은 친설이지만 후대 찬술인 대승경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한다면, 아함 또한 친설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다면 아함 역시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좌불교에 새로이 신념을 갖게 된 분들께는 초기불교와 대승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고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학자’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구업에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 올린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미 부파불교 당시에도 ‘친설’과 ‘불설’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함과 니카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불설’이 오로지 불타의 금구언설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논쟁에 참여한 일련의 ‘니카야=친설’ 논자는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이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대반열반경』의 말이나, “불설에는 불타가 설한 것뿐만 아니라 성문․선인․천․변화인이 설한 것도 있다”는 팔리율장의 말에 대해 왜 해명하지 않는 것인가? 현존하는 초기경전도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헌대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원론적인 말을 서구학계라는 권위를 끌어들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지난 호에서 이를 전제로 “왜 전문 암송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고 물었으므로 황 교수는 이에 답했어야 하였다. 그들은 다만 불설(=친설)을 정확하고 한결같이 전승하기 위한 암송집단이었던가? 이 또한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a라는 부파와 b라는 부파가 전승한 경이 다를 경우, 어느 부파의 경이 진실의 불설인가? 이에 따라 제 부파 사이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마련된 것이 불설의 정의였으며, 이는 대․소승 모두에 의해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다. 그것은 불타 교법(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성(진실)이었다. 독자들께서는 대승과 소승뿐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조차 법성을 달리 이해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불설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타의 정법을 추구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있었다. 이에 따르는 한 비록 경전의 전승과 주장을 달리할지라도, 그리하여 극도의 비난을 가할지라도 불교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4-5세기 유부논사 중현은 말하였다.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2)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필자 또한 양자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할만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곰브리치 등의 서구학자의 견해를 인용하여 말한 “대승경전은 문자라는 도구를 통한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 견해”라는 주장(이 또한 우리의 불교개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이고 마성 스님 역시 누차 강조하였지만)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제 근대불교학 시대에 형성된 이와 같은 다수의 미확인 명제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미 밝힌 대로 필자는 예컨대 『잡아함』제322경이 유부 찬술임을 인정한 중현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부파의 찬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 즉 기존의 경전에서 파생된 것일뿐더러 ‘결집’이라는 형식의 교단의 확인절차를 거친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독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승경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대승경전은 개인 견해(혹은 작품)’라는 추측성의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을 갖는 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잠시 밝혔지만, 우리는 대개 서구의 근대불교학에 따라 불교를 초기불교-부파(아비달마)불교-대승불교로 도식화하고 이를 실체화하여 부파불교가 생겨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초기불교를 전하는 텍스트가 부파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지만, 대승 또한 부파와는 독립된 별도의 실체로 보기 어렵다.

 

삼장의 요지를 해설하고 있는 『유가사지론』「섭사분」에서는 경을 크게 별해탈경(戒經)․경(4아함)․성문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을 제외한 것)․대승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으로 나누고서 성교(聖敎)를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결집자들이 지은 섭송(攝頌, Uddāna)의 해설에 거의 모든 지면(권85-98)을 할애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아함에 관한 것이다. 『대지도론』에서도 역시 대승경은 취지(大事)가 다르기 때문에 아함 중에 안치하지 않았을 뿐이라 하여 아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여전히 대승불교는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관계없는 보살(재가)교단에서 기원한다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가설을 불교의 상식처럼 여기지만, 이에 비판적인 G. 쇼펜, J. 실크, P. 해리슨, 사사키 시즈카, 시모다 마사히로 등의 학자는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있다. 시모다는 “처음에는 대․소승의 구분이 없었지만, 전통적인 부파교단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지속적인 경전제작 운동을 통해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며, 사사키는 “파승(破僧)의 정의가 어떤 시기 법륜(정법)의 파괴에서 갈마의 파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부파가 갈마를 함께 시행함으로써 하나의 불교승단이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부파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대승 또한 이 같은 계기에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하승기율』에 의하면 데바닷타는 정법을 파괴해서가 아니라 포살을 함께 하지 않아 파승자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문제의 논문에 따르면, 유부에 의해 불설의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대승경전이 찬술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대승경전이 기존의 부파불교와 무관한 개인 견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대승의 기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여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막연한 가설에 따라 대승경전을 초기경전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그같이 단언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양 경전은 편찬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3)

지난 6백년 이래 우리의 불교는 굴절되었으며, 불교학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단절되었다. 김동화 박사는 고려의 불교를 의천과 지눌에 의한 일시적 재흥(再興)이 있었을지라도 다만 제불보살께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타면적(惰眠的) 불교, 조선의 불교를 억불에 따른 은둔의 불교로 규정하였다. 개화이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결코 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불교는 민간신앙으로서만 역할하였다. 혹자는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한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5백여 년의 탄압에도 살아남은 것은 세계종교사에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헌대 어느 시기 대중들의 학력도 눈도 높아졌고, 더 이상 민간신앙 형태의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그런 와중에 개방화에 힘입어 라즈니쉬 등의 명상법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법이 들어왔고, 니카야도 뒤따라 들어왔다. 기존의 불자들에게 이는 분명 신선한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중국의 불교 초전(初傳)시기에 이미 들어왔고 비담종이라는 이름의 종파도 형성하였지만, 분석론적 성향의 이 불교는 동아시아의 사유에 맞지 않았고, 해서 다만 소승의 관법선, 어리석은 이들이 닦는 선법으로 폄하되었으며, 사라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영향 미친 불교는 미타신앙과 화엄 그리고 간화선이지만, 조선의 불교는 간화선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승려들이 경을 읽게 된 것은 숙종 이후부터이다. 그나마 어느 때부터인가 교학은 ‘알음알이’ 운운하며 타기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수미산보다 더 큰 볼륨의 불교학에서 우리의 불교이해는 황무지나 다름없으며, 그것조차 종파적 입장의 구호와 선전의 단계를 넘지 못한다. 여전히 “아비달마는 난삽하며 치심의 사견만을 더하는 불교”라고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보물이지만, 우리에게는 다만 문화재로서의 보물일 따름이다. 한글대장경은 서가의 성물일 뿐이다. 불교철학의 핵심이라 할 논서의 경우 이성적인 머리로는 한 줄도 읽을 수 없다. 과연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의 번역이 가능한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현대불교학’이라 하면 문헌학 운운하며 불교학의 이방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외국의 불교학자들을 초빙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지만 “한국은 불교전통이 살아있다”는 그들 말에 흡족해 할 뿐 그들의 불교학 방법론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필자는 초기불교 신봉자들의 말과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필자도 말하자면 초기불교 전공자이다.(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주었으면 좋겠다. 그전에는 ‘원시불교’였다) 어떤 이는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가 무엇 때문에 대승불설론을 옹호하느냐고 물었다. 대승을 위해, 한국불교를 위해 옹호한 것 아니다. 대승에 의해 ‘악마의 설’로 불린 유부 아비달마를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지만, 적어도 필자는 그것이 진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법성은 ‘하나’라는 획일적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오로지 ‘진여일심’만을 외친다. 그러나 아비달마에는 아비달마의 법성이 있고, 중관과 유식에는 그 나름의 법성이 있으며, 진여일심도 이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글자’로 이루어진 그러한 온갖 법성을 한데 모은 것이 대장경이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현이 말하였듯이 남아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팔리 니카야를 진실로 여겼다면 그렇게 여기면 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친설=불설)이고 다른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대승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악마든 패종(敗種)이든 소승이든, 이는 그 때의 이야기임에도 우리의 대승교가들은 지금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면서도 대승의 진실은 자신의 말로 보여주지 못한다. 다만 ‘전통’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말할 뿐이다.

오늘날은 더 이상 교조적 획일화시대가 아니며, ‘믿어라’해서 믿는 세상도 아니다. 심증이 아니라 구체적 논거로써 니카야의 경전사적 정통성을 의심하였음에도 불교사에 무지하다거나 극단적 궤변론자(Lokāyata)로 치부하는 것은 논쟁의 도리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제 바야흐로 불교교양대학과는 다른 차원의 불교계몽의 시대를 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도의 지적수준이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6호 [2009년 09월 25일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