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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비불설(佛說․非佛說) 논의에 대한 검토 / 마성

slowdream 2009. 11. 22. 23:22

불설비불설(佛說․非佛說) 논의에 대한 검토 / 마성
-대승경전 찬술 어떻게 볼 것인가
[0호] 2009년 10월 23일 (금) 마성스님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I. 머리말

원래 불설․비불설 논쟁은 대승경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의는 대승불교 흥기와 동시에 제기되었다. 그 증거는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불설․비불설 논쟁은 대승경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의는 대승불교 흥기와 동시에 제기되었다. 그 증거는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아직까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승경전의 진위 여부는 판가름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대승경전이 ‘불설’이라고는 하지만 ‘친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의 성립과 대승경전의 편찬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위상이나 권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본에서 1901년 ‘大乘非佛說論’을 제기하여 승적을 반환할 수밖에 없었던 무라카미 센조(村上專精, 1851-1928)는 “대승경이 역사적인 불타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불교를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확립은 대승비불설론과 관계가 없다.”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필자가 ‘대승비불설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에 관한 논의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諸學說을 검토해 보고, 제3장에서는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본 뒤, 제4장에서는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저술을 佛說로 假託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의는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이 직접 설한 친설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II. 대승불교의 성립에 관한 諸學說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대승경전이 찬술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대승경전이 찬술된 뒤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그 독자적인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승경전은 일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고 여러 역사적 발전 단계를 거쳐 현존하는 대승경전의 형태로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가 누구인지를 알면 대승경전의 성립에 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이른바 대승불교의 원류 혹은 기원에 관한 탐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불교의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첫째,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러한 작업을 시도한 학자는 헨드릭 케런(Hendric Kern, 1833-1917), 막스 뮬러(Max Müller, 1823-1900), 케이트(A. B. Keith, 1879-1944), 체르바스키(Th. Stcherbatsky, 1866-1942) 등이었다. 케런은 대승불교가 우빠니샤드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大衆部는 대승과 공통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대승은 ?바가바드 기따(Bhāgavad Gītā)?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바가바드 기따?와 ?法華經?의 유사한 偈句를 대조함으로써 ?바가바드 기따?의 박띠(Bhakti) 신앙이 대승경전 불타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윈터니츠(Maurice Winternitz, 1863-1937)도 케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이들은 대승불교가 대중부에서 기원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외부적 요인도 영향을 받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체르바스키는 대승불교는 經量部에서 발전한 것이며, 대승불교의 汎神論的 佛陀觀은 힌두교의 神觀과 우빠니샤드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무르티(T. R. V. Murti)는 神性, 信愛(Bhakti), 절대에 관한 힌두교적 관념으로부터 대승불교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케런, 막스 뮬러, 케이트, 체르바스키 등의 견해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외부적 요인은 간접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도 힌두교의 사상․종교․문화가 대승불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명확한 흔적은 아직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샴(A. I. Basham)은 최근에 대승불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 배경과 이란 종교와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고, 슝가 왕조, 쿠산 왕조를 거치면서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전통적인 사회적 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혼란의 시대는 실로 새로운 종교운동, 즉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는 대승불교나 인도의 비쉬누 신앙, 시바 신앙 등의 종교적 헌신 운동의 시작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아미타불(amitābha), 보살 등의 사상은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특히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 사상의 형성에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증거를 네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바샴은 결론적으로 보살 사상의 여러 측면에 걸쳐 이란 종교의 영향이 인정될 뿐 아니라 보살 사상 자체도 그 출발점은 부분적으로 이란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둘째,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은 대승불교의 뿌리를 ‘역사적 붓다’에서 찾고자 시도된 것이다. 그 결과 도달한 대표적인 두개의 가설은 대중부 기원설과 재가불탑 기원설이다. 먼저 대중부 기원설부터 검토해 보자.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기원을 대중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그의 저서 ?大乘佛敎史論?에서 대승불교의 원류를 대중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1결집의 전설과 부파불교의 교리를 설한 자료 등에 의해 菩薩藏이 존재하였음과 大衆部系의 諸部派 교리가 대승불교의 교리와 공통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멸 100년간의 대승에 관한 소식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탄식했다.

 

 나리나끄샤 둣뜨(Nalinaksha Dutt)는 상좌부계의 說一切有部가 대승불교의 발전에 공헌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대중부가 곧 대승의 선구자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는 佛身論, 阿羅漢을 인간적으로 보는 점, 空思想, 法無我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의 기원에 기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대승불교가 어떤 것에서 파생되었다면, 그것은 대중부로부터이다.

이것조차도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어떤 혁신을 가져오기는커녕, 전통적인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측면들을 새롭게 강조한 것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빠윳또(P. A. Payutto)도 대중부가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대중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교리적인 공통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중부 외에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는 부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교리적 유사점은 단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와의 관련성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승불교의 대중부 기원설이 비판받기 시작했다.

 

미야모토 쇼손(宮本正尊)은 ?大毘婆沙論?을 연구하여 그 중 설일체유부에 의해 격렬히 비판되는 譬喩者(Darṣṭāntika) 교리를 명확히 하여 비유자의 설에는 대승불교와 공통되는 교리가 보이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아카누마 지젠(赤沼智善)은 대중부의 교리로 밝혀졌던 自性淸淨心說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에도 보이며, 팔리 니까야(nikāya)에도 이미 설해져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九分敎․十二分敎․十地說․頭陀說 등을 단서로 하여 대승경전에 이용되고 있는 부파교리를 상세히 추구하여 化地部와 法藏部 등이 대승경전과 관계가 있음을 명확히 밝혔다. 또한 心理說의 발전에 대해서도 대승불교 특히 有部의 心理說과 관계가 깊음도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로 인해 대중부 기원설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한편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대승의 기원은 교리의 기원임과 동시에 교단의 기원이기 때문에 교단으로서의 대승불교가 초기에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였으며,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대승의 ‘교단으로서의 기원’을 문제 삼았다. 그는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불탑 숭배이고, 그 중심은 재가신자의 활동이었으며,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佛傳文學과 佛塔信仰이 대승불교의 원류라고 주장했다.

대승불교는 대중부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뒤엎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시즈타니 마사오(靜谷正雄)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를 기반으로 原始大乘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또한 폴 윌리엄(Paul Williams)도 히라카와 아키라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설과는 정반대로 대중부 혹은 다른 진취적인 사상을 가졌던 부파불교의 승가 집단에서 대승불교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를테면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폴 해리슨(Paul Harrison), 조나탄 실크(Jonathan A. Silk),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 등이다. 이들의 연구 방법론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쇼펜과 해리슨은 비문의 증거를 바탕으로 대승불교운동은 출가수행자 집단에서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모다 마사히로는 쇼펜의 연구 방법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헌적 중심의 연구가 간과해 온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파겔(Ulrich Pagel)은 ?大寶積經?에서 재가보살과 출가보살은 수적인 면에서 거의 대등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거로 쇼펜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안성두는 쇼펜의 논의는 어느 집단이 대승경전의 찬술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고, 또한 쇼펜이 의거하는 소수의 비문적 자료가 대승불교의 광범위한 시기를 커버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운동의 주체가 부파교단의 출가자 집단이었다는 주장과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그룹, 즉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을 주도했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두 가설 모두 그 뿌리를 ‘역사적 붓다’에 연결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시모다 마사히로는 “전자는 교설이나 교의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는 것이며, 후자는 교단의 연결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아 불교사 안에 위치 설정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즉 ‘역사적 붓다’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그 의미를 측정하려 하고 있는 점에서는 양자가 완전히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가 부파불교 시대의 대중부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대승경전의 연원은 붓다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어떤 집단에서 비롯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보면 대승경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 보면 대승불교는 대중부를 비롯한 諸部派에서 유래했다는 증거와 불전문학과 불탑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흔적이 동시에 발견되고 있다. 특히 교단사적으로 보면 ‘비구승가(Bhikkhu- saṅgha)’와는 별도로 ‘보살가나(Bodhisattva-gaṇa)’가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출가자 집단에서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주도했다고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만일 대중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대승불교 교단이었다면 굳이 별도의 大乘戒經을 찬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부는 이미 ?摩訶僧祇律?이라는 율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집단이 대승불교의 성립을 주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대승불교는 다양한 외적인 요인과 불교 내적인 복합적 요소가 얽혀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전된 사상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다른 이질적 요소를 통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III. 불설․비불설 논의의 전개과정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親說論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佛說論이다. 그러나 대승의 논사와 많은 학자들은 친설론과 불설론을 구분하지 않고 논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친설론과 불설론을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친설론에 관한 논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아니면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지어낸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대승경전은 석가모니불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부파교단의 비구들은 대승경전은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어낸 것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그러자 대승불교도들은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찾아와서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고 비난하더라도 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내부를 단속함과 동시에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임을 증명해 나갔다. 그 증거는 ?大品般若經?, ?大智度論?, ?大寶積經(Mahāratanakūṭa)?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대승경전이 친설임을 언급한 문헌은 한역 ?增一阿含經? 권1 「서품」, ?菩薩處胎經? 권7, ?大智度論? 권100, ?金剛仙論? 등이다. ?증일아함경? 권1 「서품」에 “세존의 설법은 제각기 다르다. 보살은 뜻[菩提心]을 세워 대승을 따른다. 여래는 이런 갖가지 차별을 모두 설하며,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 六度無極(六波羅密)을 설한다. … 契經은 一藏, 律은 二藏, 阿毘曇經은 三藏, 방등과 대승의 뜻은 깊어 여러 契經을 雜藏으로 삼는다.” 또한 ?보살처태경? 권7에 “迦葉이 阿難에게 말하되, ‘菩薩藏이든 聲聞藏이든 戒律藏이든, 佛陀가 설한 敎法은 一言一字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한 ?대지도론? 권100에 “붓다 입멸 후, 문수와 미륵 등 諸大菩薩이 阿難을 이끌고서 이 摩訶衍(大乘)을 結集하였다.” 그리고 ?금강선론?에 “여래는 철위산 밖에 머물러 있되, 다른 세계에도 도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여래는 그러한 二界의 중간에서 無量한 諸佛과 함께 모여 佛話의 經을 설해 마치고 大乘의 法藏을 결집하기 위해 다시 大衆을 불러 모았다.” 이러한 經證은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니까야나 有部의 論書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 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하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 대표적 논사는 無着(Asaṅga, 310-390), 世親(Vasubandhu, 400-480), 淸辨(Bhāvaviveka, 500-570) 등이다. 무착은 그의 저서 ?大乘莊嚴經論? 제2 「成宗品」에서, 세친은 ?釋軌論(Vyākhyāyukti)? 제4장에서, 淸辨은 ?中觀心頌(Madhyamaka hṛdaya kārikā)?과 ?중관심송?의 自註 ?思擇炎(Tarkajvārā)?에서 대승이 불설임을 적극적으로 논증해 나갔다.

 

그런데 도쿠가마(德川) 시대 중기에 최초로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가 그의 저서 ?出定後語?(1745)에서 이른바 ‘大乘非佛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불교경전은 시간을 두고 발달했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차츰 발전해 갔다는 이른바 加上說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대승경전은 불멸한 지 500년 뒤에 차례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결코 붓다의 친설이 아님을 지적했다. 이 책의 출판 이후 많은 반박서가 저술되었다.”

 

한편 자이데와 싱하(Jaideva Singh, 1893-1986)는 체르바스키의 ?열반의 개념? 解題에서 붓다는 통속적 교리(vyakta-upadeśa)와 심오한 교리(guhya-upadeśa)를 동시에 설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심오한 교리란 곧 대승을 뜻한다. 붓다는 두 가지 교설을 동시에 설했지만 심오한 교리는 통속적 교리보다 심오하기 때문에 뛰어난 제자들에게만 가르쳤다고 했다.

그는 대승경전이 친설론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경전을 ‘역사적 붓다’에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주지하다시피 대승불교운동은 기원전 100년경에 일어났으며, 그때 ?般若經?의 원형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부파분열이 끝난 시점이다. 그리고 기원후 1년부터 초기대승경전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대승이 붓다의 친설임을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불멸 100년간의 대승에 관한 소식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된 신화는 ?대지도론?에 언급되어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승경전은 불멸후 보살과 신들에 의해 은밀히 보관되어 왔는데, 불멸후 500년경에 용수 등의 보살이 출현하여 깊은 바다에서 꺼내왔다는 것이다. 청변은 ?사택염?에서 “대승경전은 성문이 아니라 보현․문수․미륵 등에 의해 결집되었다거나, 혹은 龍(Nāga)들에 의해 결집되어 용궁(Nāgaloka) 등에 보관되었다가 그것을 인간세계에 퍼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 자체가 대승경전은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이라는 주장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초기경전인 아함경도 불멸 후 3-400년 이상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설 그 자체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아함경 이후에 성립된 대승경전은 더구나 불설일 리가 없다. 대승경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초기경전은, 현재의 형태는 어찌되었든 역사적으로 보면 그 원천은 붓다의 설법에서 유래한다. 그렇지만 대승경전은 사정이 다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불멸 후 50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욱 붓다의 직접적인 설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대승불교의 특징은, 거기에 나타나는 붓다가 ‘역사적 붓다는 아니다’라고 하는 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대승의 기원을 ‘역사적 붓다’에게서 찾으려는 연구자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수로를 파서 ‘역사적 붓다’라고 하는 원류에 다다르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아직도 결실을 보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는 “대승경전은 불멸후 배출된 여러 불교학자가 자기들의 깨달은 바를 佛說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뒤에 여기에 다시 여러 학자가 고치고 보태어 정리한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째 불설론에 관한 논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이 논의는 대승경전의 정통성(orthodoxy)과 정법성(authenticity)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Nikāya, 尼柯耶)와 아가마(Āgama, 阿笈摩)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첫째,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설의 기준’이었다. 불설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설의 기준인 ‘四大敎法’(Mahāpadesa)과 ‘四依’(catuṣ-pratisaraṇa)이 등장하게 된다. 현대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대승경전에 대한 해석학적 방법론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불설론은 대승경전은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대승경전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음을 논증함으로써 대승경전이 니까야나 아가마보다 오히려 위대한 가르침임을 강조한다.

 

명치(明治) 이후 일본의 불교학계는 서구 학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불교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센조(村上專精, 1851-1928)와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7-1930)은 서구 학문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이 논의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村上는 1901년 출간된 ?佛敎統一論?에서 ‘대승비불설’을 주장하여 불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뒤 村上의 ?佛敎統一論?에 대한 비판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村上는 승적을 반환하게 되었지만 그는 결코 대승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대승비불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은 대승이 붓다의 直說임을 대장경에서 찾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大乘佛敎史論?(1903)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대승불설론을 옹호하고 있으나 일반인들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불설․비불설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의 ?根本佛敎?(1910), 이토 기켄(伊藤義賢)의 ?大乘非佛說論の批判?, ?續大乘非佛說論の批判? 등의 저술을 통해 꾸준히 이어져 왔다.

 

가장 최근에는 와타나베 쇼코(渡辺照宏, 1907-1977)의 ?お經の話?(1967),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의 ?佛敎經典成立史論?(1977),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1901-)의 ?經典―その成立と展開?(1980) 등이 출판되었다. 이 3권은 모두 국내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후자의 불설론을 증명하기 위해 논증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도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이라는 논증은 신화적 논증에서부터 문헌적 고증, 역사적 고증, 사상적 해석, 해석학적 논증 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친설론은 대승경전을 ‘역사적 붓다’에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니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비록 ‘역사적 붓다’의 친설은 아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논의는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강조하기보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에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부각시킨다. 이 주장은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 또한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친과 청변이 당시에 근본결집(mūlasaṅgīti)이 산실되었다는 주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제 부파 간의 결집 전승의 상위를 다룬 것도 이에 해당된다. 권오민은 ① 전승자의 오류나 자의적 개변을 지적한 경우, ② 불설의 오류를 지적한 경우, ③ 견해가 달라 誦持하지 않는 경우, ④ 독자적으로 편찬한 경이라고 한 경우 등의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와타나베 쇼코(渡辺照宏)는 자신의 저서 ?お經の話?(1967)에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전승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는 제1결집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성전의 편집형식에 문제가 있으며, 다른 부파가 전승한 아함과 비교할 때 니까야가 가장 古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제1결집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 증거로 가밤빠띠(Gavāṃpati, 憍梵波提)의 설화를 끌어들인다. 그는 그때 天界의 시리사(Siriśa)殿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하깟싸빠(Mahakassapa, 大迦葉)가 使者를 보내 결집에 참여하라고 했지만, 붓다가 입멸했다는 말을 듣고 그도 곧바로 입멸했다고 한다. 또 다른 증거로 뿌라나(Purāṇa, 富樓那)의 일화를 소개했다. 뿌라나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교여행을 마치고 마가다국의 수도로 돌아왔을 때, 500명의 장로들이 편집한 성전을 승인해 달라고 권유하였으나, 뿌라나는 자신이 붓다로부터 직접 들은 그대로 수지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의 결집에 참가하지 못한 다수의 수행승들이 별도로 집합하여 성전을 편집했다는 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玄奘이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교외의 다른 장소에서 대중부가 결집한 유적을 보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500명의 회의와는 별도의 성전 전승을 가지는 집단이 몇 개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증거로 제시한 가밤빠띠의 설화나 뿌라나의 일화는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하며, 玄奘의 여행기 또한 수세기가 지난 일이라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주장은 니까야나 아가마의 전승에 대한 의문만 증폭시킬 뿐,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하는데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최근 권오민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비불설이다. 대승경이 대승론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 역시 유부 등에 의해 취사되고 개변 증광 찬술된 제경의 집성으로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받았을 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불타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비담마(abhidhamma) 논장을 승법(勝法)으로 간주하는 상좌부의 니카야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설․비불설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김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실익은 없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처음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의 친설 논쟁에서부터 니까야와 아가마도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경전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IV.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

이 부분은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서는 왜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자신의 저작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假託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이며, 그들의 태도는 바람직했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믿거나 經典成立史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논의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제2장에서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집단이 어느 그룹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 실제로 대승경전을 편찬하고 유포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출가자 집단이었을까? 아니면 재가자 집단이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에다 요시부미(上田義文)는 초기 대승경전 작가들이 재가자였을 것이라는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의 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신자나 재가자는 물론 각자가 아니다. 신자는 붓다에게 귀의하여 ‘佛說’을 믿고 받아들이는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가 쓴 책을 불설이라는 체제로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또한 이른바 재가자가 가령 재가의 구도자로서의 보살이라 하여도 그들도 또한 구도자이며 이미 도에 다다른 사람은 아니다. 스스로 자각을 갖지 않은 자가 覺者(佛)라는 입장에서 쓰여진 대승경전을 자작하였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일이다.

그는 대승경전을 직접 편찬한 자들은 출가자 집단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대승경전은 스스로 불타가 되었다고 하는 자각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깨달은 것, 즉 자기의 경험을 사상으로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승경전 작가가 스스로 각자가 되었다는 논거로서 미륵의 ?大乘莊嚴經論? 및 그에 대한 世親釋의 기술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논에) 성립하고 있으므로(siddhes) 라는 것은 만약 다른 사람이 正覺하여(abhisambuddhaya) 설하고 그것이 불설인 것(buddha-vacanatva)으로서 성립하고 있으면 지금 정각하여 이와 같이 설하는 자는 곧 부처(buddha)이다.

그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彌勒․世親 무렵에는 석가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현재 正覺하여 그 설하는 것이 佛說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라면 그 說者는 곧 불타라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미륵․세친의 말을 인용하여 대승경전이 자기는 정각한 자, 즉 불타라는 자각을 지녔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책이 佛說이라는 체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스스로 정각했다는 자각이 없는 자, 가령 신자나 재가자가 어떤 사상을 佛陀의 眞意라고 확신하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經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대승경전은 부처를 믿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된 입장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며, 기존 연구의 공통된 잘못은 바로 이점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우에다 요시부미의 견해에 동의한다. 비록 처음 대승불교운동을 주도한 자가 재가자 집단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증득한 覺者라는 자각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스스로 覺者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깨달은 자가 설하는 것은 곧 불설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을 불설로 가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성두도 “불교에서 해탈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기에 만일 누가 반야바라밀이나 진실재로서의 진여에 대한 불가언설적 인식을 통해 석가모니불과 동일한 해탈적 인식을 얻고 또 이를 스스로 자각했다고 한다면, 삼매 속에서 획득된 자신의 ‘해석’의 확실성을 ‘불설’과 동일시하고 ‘불설’로서 선언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직접 붓다로부터 친히 법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은 스스로 ‘깨달은 자’ 혹은 ‘붓다로부터 직접 법을 들었다’라고 하는 자각을 가진 자들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어떤 수행법을 통해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선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붓다에 대한 상기(buddha-anusmṛti)와 같은 수행법은 초기부터 매우 잘 알려져 왔고 그것이 주는 효과는 수행자가 마치 지금 붓다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주삼매경?에서 수행자는 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을 하루 종일 나아가 일주일 내내 관하는 관법을 상세히 배우게 된다. 그 이후 수행자는 삼매 속에서 아미타불의 영상을 얻게 되고 그를 통해 아직 듣지 못했던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경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학파에서 붓다의 우월성에 근거한 새로운 종교적 이념이 등장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항시 현존하는 붓다의 대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붓다가 됨으로써 이런 불멸성을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정 속에서 살아 있는 붓다를 친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받거나 대승경전을 받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불설의 기준인 잣대를 확대 해석하였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근에 권오민은 “유부에 의해 불설의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대승경전이 찬술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불설의 眞僞 기준인 四大敎法과 四依에 의해 대승경전을 찬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이와 같은 근거로 대승경전을 찬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붓다가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근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직접 붓다로부터 친히 설법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승경전 찬술자가 ‘반주삼매’와 같은 종교적 체험 상태에서 직접 붓다로부터 들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이라고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불설로 가탁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대승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차단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설로 가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불설의 진위 기준에 의한 대승경전 찬술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전자의 경우는 불설로 가탁하면서도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후대에 거짓말쟁이로 비난받을 것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증일아함경? 권1 「서품」에 “아난다가 말하기를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여래께서 설법하심을 보았지만 그런 법은 여래에게 듣지 못하였나니 어찌 그런 법에 의심이 없겠는가. 비록 내가 보았다 말하여도 그 뜻은 잘못이요 미래의 중생에게 거짓말이 될 것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후대의 비난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에 대해 김철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위경은 보통 진경과 쉽게 구별할 수 없게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들 위경제작자는 독특한 사상을 펼 정도로 지적인 한편 쉽게 위경임을 의심받게 만든 어리석음도 가졌다고 추리해야 한다. 또 만일 그가 새 깨달음을 전할 뜻이었다면, 그는 실제는 석존을 능가함에도 굳이 석존을 의탁해 주장을 폈거나, 아니면 논서에 불과한 내용을 권위를 높이려 위경을 편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진리를 전하면서 가장 기본적 진실이 필요한 배경 설주 등[六成就]을 거짓으로 꾸민 이중성이 문제되며, 본 내용이 진리라 해도 결국 거짓말쟁이의 진실과 같은 결점이 있게 된다.

김철은 대승경전 찬술자의 태도 즉 “진리를 전하면서 가장 기본적 진실이 필요한 배경 설주 등을 거짓으로 꾸민 이중성이 문제되며, 본 내용이 진리라 해도 결국 거짓말쟁이의 진실과 같은 결점이 있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자신이 체득한 것이 있으면 자기 목소리로 표현하면 된다. 이를테면 팔리 七論이나 有部의 七論은 물론 復註書까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독 대승경전의 찬술자들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설로 가탁했다. 후대의 대승논사들도 자신이 저술한 책에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학문으로 말하면 해석학에 해당된다. 즉 어떤 교설에 대해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것을 불설이라 생각하고 저것은 비불설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견해나 철학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 붓다의 가르침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밝히는 해석학은 어느 시대 누구나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사상은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그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비겁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대승경전 찬술자가 종교적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했을지라도 스승인 붓다의 가르침과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구분해서 전해야 후대의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았기 때문에 스승인 붓다와 동격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불설의 기준에 의해 대승경전을 찬술했다고 해서 불설로 가탁한 것까지 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불설로 가탁함으로써 불필요한 논쟁을 초래하였고, 후학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V.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의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역사적 붓다’가 대승경전을 직접 설했느냐 설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친설론이고, 다른 하나는 대승경전이 참된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불설론이다.

 

친설론은 처음 대승경전이 나타나자 부파교단의 비구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대승경전인 ?대품반야경?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 및 ?대보적경?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임을 주장함과 동시에 비구들의 비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니까야나 유부의 논서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후대의 대승 논사들은 대승경전이 붓다의 친설임을 적극적으로 논증해 나갔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도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대승경전과 ‘역사적 붓다’와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설론은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설의 기준이었던 四大敎法을 四依로 대체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변론했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 덕택에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대승경전이 ‘역사적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은 아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불설로 받아들인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강조하기보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해 온 니까야나 아가마 또한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부파교단에서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성립 연대나 대승경전이 성립된 연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나 아가마와 대승경전은 그 전승의 계보나 체계․사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논리 전개 방식도 완전히 다르다. 이 점을 간과하고 불설․비불설 논의를 이렇게 전개하는 것은 모두에게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끝으로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자신의 저서를 불설로 가탁했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여 붓다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붓다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저술을 전승된 경전과 구별하지 않고 불설로 가탁한 것은 잘못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행위로 인해 후대에 불필요한 논쟁과 혼란을 초래시켰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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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니까야나 아가마와 대승경전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김철은 이러한 주장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듯 “이 논의는 불교 본질면에서는 독화살 출처를 찾는 것처럼 그 실익이 적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출처 불교평론